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452화 (452/729)

# 452

제452장 꽃의 엘프

엘프에 대한 천제현의 평가는 ‘별 볼 일 없는 종족’이었다. 인간 못지않은 지혜와 긴 수명, 유구한 역사까지 갖췄음에도 이들은 결국 마수령에게 완전히 짓밟힐 운명이었다.

어째서일까?

엘프에게는 위기의식이 부족했다.

엘프족은 스스로 너무 많은 족쇄를 찼다.

엘프는 자신들이야말로 누구보다 교양 있고 우아하며 정의로운 종족이라 자부했다.

엘프들에겐 전쟁에서도 선제공격이나 적을 무너뜨리기 위한 계략 같은 건 머나먼 이야기였다.

군대 편성도 미적미적, 병력 배치도 미적미적, 적에게 한 방 맞아야 겨우 반격에 나설까. 상대를 말살할 기회를 맥없이 흘려보낸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건 관용이 아니라 미련함이었다.

마수령과의 전투에서 엘프의 승률은 언제나 9할, 그러나 주력부대 하나를 잃으면 회복까지 수백 년이 걸리는 엘프와 달리 마수령은 십여 년이면 병력을 다시 길러냈다. 항상 이런 식이니 엘프가 무슨 수로 마수령을 당해내겠는가.

하지만 종족 대 종족 측면에서가 아니라 엘프 개개인만을 놓고 본다면 천제현은 그들에게 꽤 호감이 있는 편이었다.

일단 엘프 중에는 미녀가 많았다. 일족 전체를 통틀어도 못난이 하나 찾기가 힘든 종족이 그들이었다.

다음으로, 엘프들은 순수했다. 전부 공서련 같은 성격이라고 보면 됐다.

천제현은 몰랐지만 이 마을에서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생명의 나무 부족원 중 최소 삼백 명은 천제현을 한눈에 알아봤고, 나머지도 이름 한 번쯤은 다들 들어본 상황이었다.

덕분에 그는 갇혀 지내는 동안 온갖 과일이며, 간식과 엘프 녹차를 질리게 맛볼 수 있었다.

“영화 보고 진짜 감동했어요!”

엘프 소녀가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 검술사인가요? 영화랑은 좀 다른 것도 같은데.”

“물론!”

천제현은 세상 편한 자세로 나무 오두막에 늘어져 있었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과일을 먹고 있었다. 주위에는 온갖 주전부리가 그득했고 창가에는 호기심에 가득 찬 작은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촌뜨기들 같으니, 사람 처음 보나?’

확실히 어린 엘프들이 인간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깜찍한 여우는 애완동물이에요?”

“그래.”

소지품은 모조리 몰수.

엘프들의 확인을 거쳐 위협 요소가 아니라 판단된 새끼 여우만이 천제현의 품으로 돌아와 감금 생활에 동참하게 됐다.

지금 새끼 여우는 주인과 똑 닮은 자세로 자기 몸뚱이만 한 과일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중이었다.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저런 여유라니! 역시 천제현이야!’

엘프들은 수명이 긴 만큼이나 삶에 대한 애착도 컸다. 속된 말로 하면 그들은 죽음 앞에서 겁쟁이였다. 그러니 천제현의 시큰둥한 태도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제 부족 공청회에서 장로님이 죄목을 엄청 많이 열거하시던데, 정말 겁 안 나요?”

천제현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나른하게 말했다.

“죄목이 뭔데? 어디 들어나 보자.”

“첫째, 성년도 되지 않은 엘프를 미혹한 죄. 둘째, 부족의 중요한 자원을 훔치도록 사주한 죄. 셋째, 엘프족을 살육에 끌어들여 곤충령과 적대관계로 만든 죄. 넷째…….”

천제현이 지겹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결론은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겠다는 거구만. 더 얘기할 것도 없어, 날 죽이더라도 이게 누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죽음이 무섭지 않아요?”

“무서울 게 뭐 있어?”

천제현의 표정에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몇 번을 죽는다 해도 이런 불공정한 판결에 무릎 꿇을 내가 아니야!”

꼬마 엘프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눈앞의 천제현 위로 영화 속 권력에 굴하지 않던 용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역시 그들의 우상은 달랐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음흉한 악당일 수 있을까?’

천제현이 이번에는 땅이 꺼질 듯한숨을 쉬었다.

“다만 원대한 꿈과 이상을 두고 가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

꼬마 엘프들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들의 눈에 비친 천제현은 비극적인 운명에 휘말린 이상가였다.

“꿈이 뭔데요?”

“사실 내 꿈은 단순해.”

천제현이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가진 지혜와 이 두 손으로 대륙 사람들의 삶을 좀 더 낫게 바꿔주는 것. 그리고 공서련, 공화련 자매와 함께 차원 너머 심연에서 이 세계의 궁극적인 신비를 푸는 것…….”

엘프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로?”

엘프 무리 중 하나가 숨이 넘어갈 듯 물었다.

“공서련도 진짜 존재해요?”

“당연하지, 비비안 공주님이랑 친구 사이까지 됐는걸.”

비록 고루한 종족이긴 해도 엘프들은 천성이 순진했다. 물론 종족적 관점에서는 칭찬할 게 못 되는 특징이었다. 생존에는 좀 더 약은 편이 훨씬 유리하므로.

엘프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비비안 공주님이 공서련 공주랑 친구가 됐다고?’

‘몰래 마을을 빠져나갔던 이유가 천제현 일행을 만나기 위해서였구나!’

어린 엘프들은 어른들보다 호기심이 훨씬 많았지만 비비안만 한 배짱은 결코 없었다.

천제현이 꼬마 엘프들에게 말했다.

“너희한테도 소개해 줄 수 있어. 엘프들과 친구가 되기에 딱 좋은 성격이거든. 다만, 난 곧 죽을 목숨이기도 하고, 게다가 엘프가 인간 친구를 사귀는 건 금기니까. 진짜 아쉽다!”

꼬마 엘프들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천제현은 그 뒤로도 엘프의 녹차를 홀짝이며 꼬마들에게 온갖 잡담을 늘어놨다. 이 시대보다 3만 년을 앞서 있는 그의 지식은 엘프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천제현에게 이 꼬맹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엘프들이 한창 이야기에 빠져 있을 때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장 물러가지 못해!”

화들짝 놀란 꼬마 엘프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뭐야?’

천제현이 몸을 바로 세우고 앉았다.

삼십 대쯤으로 보이는 육감적인 몸매의 엘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인간 나이로 환산하면 백육십에서 백칠십 살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냉랭한 분위기가 흡사 심빙우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엘프는 역시 엘프, 특유의 순진함만은 다른 엘프들과 마찬가지이리라.

생명의 나무 부족 제2장로 오리디스, 그녀는 부족 내의 징계처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끌려온 이상 천제현 역시 그녀의 손을 거쳐 처분될 운명이었다.

“엘프 법정이 열릴 준비가 거의 끝났다. 의회에서 보낸 이가 지금 이쪽으로 오는 중이야.”

오리디스가 갇혀 있는 천제현을 차갑게 쏘아봤다.

“재판에 임할 준비는 됐나? 사형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확증이 있는 만큼 극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아.”

‘겁을 주시겠다? 안 통하거든!’

다른 종족이었다면 물론 한 치 앞을 장담 못 했겠지만 상대가 엘프인 이상에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의 평소 일 처리 속도를 고려하면 정말 사형이 선고된다고 쳐도 형 집행까지는 과연 몇 달이 걸릴지 몰랐다. 그 안에도 누명을 벗거나 도망칠 방법을 찾지 못할 만큼 한심한 인간이라면 차라리 당장 자살하는 편이 나았다.

천제현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그래도 이 한 목숨 버림으로써 엘프족 전체를 진창에 처넣을 수 있다면야 억울한 죽음은 아니죠.”

오리디스가 빈정거렸다.

“진창이라니, 무슨 재주로?”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조금만 지나면 내 이름이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할 겁니다. 그때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두가 알게 되겠죠. 천제현이라는 인간 천재가 엘프들의 손에 억울하게 죽었음을.”

천제현은 아예 철면피를 깔기로 작정한 듯했다.

“엘프에겐 엄청난 불명예가 아닐까요? 인간에게야 엘프를 공격할 좋은 구실이 되어주겠지만.”

“너처럼 뻔뻔한 놈은 처음 보는군!”

오리디스가 코웃음을 쳤다.

“역시나 인간은 하나같이 교활하고 간사한 위선자야!”

“뭘 모르는군요,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는 법입니다.”

천제현이 화제를 돌렸다.

“내기 하나 할까요? 일이백 년은 살았을 것 같은데, 아는 것도 많겠죠. 이쪽이 이기면 풀어주는 거로, 어때요?”

오리디스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네가 진다면?”

천제현이 대꾸했다.

“지면 뭐든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내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뭐든지?”

“뭐든지!”

“그럴 능력은 있고?”

“물론 세상에는 능력 밖의 일도 많지만, 당신 머리에서 나오는 거라면 얼추 문제없을 겁니다.”

“하늘의 별을 따오라면 따올 수 있나?”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천제현이 입을 열었다.

“가능해요!”

“미치광이 같으니!”

오리디스가 볼 때 천제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두말없이 돌아서려던 그녀를 천제현이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이기면 여기서 내보내주기로 하되, 당신 소원 하나는 결과랑 관계없이 무조건 들어줄게요, 이 정도면 만족하겠죠!”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오리디스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떴다.

“이봐요, 어디 가요! 농담 아니라니까!”

오리디스의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천제현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멍청하긴, 이게 아무한테나 던지는 조건인 줄 알아? 냉큼 잡아채지는 못할망정,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나 보자고.’

천제현이 좁은 오두막 안에서 겨우 기지개를 켰다. 엘프들의 굼뜬 일 처리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때, 가느다란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정말 하늘의 별을 따다 줄 수 있어요?”

‘누구지? 누가 얘기하는 거야!’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천제현의 시선이 자그마한 물체 하나에 고정됐다. 그의 어깨가 일순 흠칫했다.

‘설마 이건, 말로만 듣던…… 꽃의 엘프?’

손가락보다 아주 조금 큰 무언가가 창가에 서 있었다.

엘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집이 아주 작은데다가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잠자리의 것처럼 얇디얇은 날개의 형태 자체는 나비에 더 가까웠다. 투명하게 빛나는, 몹시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날개였다.

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꽃의 엘프는 엘프족의 한 분파로, 꽃의 요정이라고도 불렸다. 몸집은 작지만 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종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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