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451화 (451/729)

# 451

제451장 생명의 나무 부족

“엘프는 전부 당신들처럼 무례하고 제멋대로인가요?”

마을 입구에서 이 난장판을 벌였으니 주민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도울 힘이 없는 공서련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입으로나마 불만을 토하는 것뿐이었다.

“억지 추측으로 멀쩡한 사람 모함이나 하고, 선하고 수준 있는 종족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식인마나 오크와 다를 것도 없잖아!”

엘프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륙에서 가장 고귀하고 우아하며, 아름답고 교양 넘친다 자부하던 그들이 한순간에 식인마, 오크와 같은 급으로 떨어진 것이다. 엘프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공서련이 큰소리로 외쳤다.

“죽일 테면 죽여요, 어차피 저항할 힘도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당신들을 잘못 봤다는 것만은 여기서 똑똑히 말해두겠어요!”

아직 어린 인간족.

게다가 천진하고 어여쁜 소녀.

엘프는 외모로 상대를 판단하는 종족이었다. 내면이 아름다워야만 겉모습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엘프들의 아름다움은 순수한 영혼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공서련의 첫인상을 좋게 본 것도 당연했다. 겨우 몇 마디 말 때문에 저 소녀를 해친다면 정말 오크나 마수령과 똑같아지는 게 아닌가.

“맞는 말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비비안이었다.

“엘프가 다른 종족들에게 우호적이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야! 엘프가 언제부터 자초지종도 알아보지도 않고 사람 먼저 죽이는 족속이었지?”

대장로의 표정이 복잡했다. 잠시 후, 그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엘프 군단이 활을 내려놨다. 유니콘을 탄 대장로가 대열 앞쪽으로 나왔다.

“이 아리땁고도 용감한 아가씨의 말이 옳다. 엘프는 정의를 숭상하는 선량한 종족이다. 그레이하트, 네가 경솔했구나.”

그레이하트는 어떻게든 비비안이 받을 처벌을 줄여주려는 생각뿐이었다. 젊디젊은 공주의 인생이 이런 사소한 일로 망가지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인간은 하나같이 위선적이라고 배웠다. 이 일의 책임 역시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을 것이다.

대장로가 손가락으로 천제현을 가리켰다.

“자네가 비비안 공주님과 함께 우리 마을까지 동행해 줘야겠네. 일족에서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걸세!”

공서련이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누굴 호랑이굴로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엘프가 무슨 권리로 인간을 심판하는데!”

“엘프 일족에는 엄격한 규칙과 법률이 존재하네!”

엘프 대장로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관계에 따라 공정하게 옳고 그름을 따질 걸세. 억울한 사람은 절대 생기지 않아.”

“작은 아가씨는 이만 들어가 보세요.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차피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는 게 천제현의 생각이었다. 엘프는 방대한 일족이었다. 수만 년 후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조차 그들은 영향력이 상당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천제현은 엘프들이 얼마나 고지식하게 원칙에 집착하는지 잘 아는 만큼 그들을 다룰 방법 역시 알았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그로 인해 올드만 마을이 받을지도 모를 피해였다.

머리를 굴리던 천제현이 곧이어 당당한 투로 말했다.

“장로님, 기꺼이 엘프 법정에서 제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단, 법정에서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원칙상 저를 죄인 취급할 수 없는 게 아닌가요?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프족이라면 물론 저의 합법적인 권익을 보장해주시겠죠?”

엘프 장로가 일순 흠칫했다.

“물론 그래야겠지.”

“그럼 제 재산권을 침해 한 것에 대해 엘프족에 적절한 보상조치를 요구하겠습니다!”

그레이하트가 발끈했다.

“웃기는 소리!”

“이 마을을 건설하는 데는 상당한 수고가 들었습니다. 제가 끌려가고 나면 마을은 혼란에 빠지겠죠. 무고한 생명들이 피를 흘릴 것이고 제 재산에도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겁니다.”

천제현의 차분하고 조리 있는 말이 이어졌다.

“이건 온전히 엘프족의 불찰로 인한 결과입니다. 서로 적대관계도 아닌데 남의 삶의 터전을 짓밟아서는 안 되죠. 최소한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엘프족이 마을의 안전을 보장해주셔야겠습니다.”

엘프 대장로는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저속한 무뢰배들뿐인 혼돈의 숲에서는 지금껏 누구 하나 엘프들의 법치 관념을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저 인간족은 차근차근 법적 원칙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엘프족의 엄격한 법치의식을 존중해주는 상대를 드디어 만났다는 기분이었다.

“좋네, 아무 상관없는 이 마을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되지.”

엘프 대장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너희 천 명은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마을의 치안 유지를 위해 이곳에 남는다!”

유니콘을 보유한 천 명 규모의 엘프 군단이 올드만 마을에 남겨졌다.

마을이 붕괴하지만 않는다면 그간 쏟아 부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걱정은 없으리라.

천제현이 공서련에게 당부했다.

“비상시기예요, 마을을 부탁할게요. 큰아가씨한테 서둘러 넘어와서 제 역할을 대신해달라고 전하세요!”

“알았어!”

엘프들이 생각만큼 막무가내로 나오지는 않는 모습에 공서련도 어느 정도는 마음이 놓인 참이었다.

“조심해야 돼!”

천제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고지식한 작자들이 무서울 게 뭐 있어서?’

하물며 천제현은 애초에 잘못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엘프들이 그의 덕택에 횡재한 상황이 아닌가.

“멀쩡하게 돌아올게요!”

“안심해!”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비비안이 말했다.

“회장의 결백은 내가 증명하겠어!”

유니콘에 올라탄 천제현은 엘프들을 따라 올드만 마을을 떠났다.

이때부터는 길고 긴 여정이 이어졌다. 공간능력을 이용했을 때는 몰랐던 비비안도 이번에는 새삼 그 거리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생명의 나무 부족에 도착하기까지는 유니콘의 날쌘 속도로도 몇날며칠이 걸렸다. 그곳은 나무 엘프의 발상지로, 그 역사가 혼돈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생명수는 높이만 해도 천 길, 가지는 주변 수십 리까지 그늘을 드리울 만큼 우거져 있었다. 감히 신(神)에 비견할 만한 이 신비한 수목에서 나무 엘프의 선조가 태어났다. 비록 고대 생명수는 혼돈의 세계가 붕괴하던 때 함께 소멸하고 없지만, 대신 엘프족을 세상에 남겼다.

엘프는 대륙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종족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족의 유구한 역사는 오히려 엘프들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됐다. 그들의 생활은 온갖 번잡한 의식과 예법에, 머릿속은 케케묵고 고루한 관념에 갇혀 있었다.

긴 수명과 낮은 번식률, 거기에 풍부한 감성. 엘프들은 전쟁을 혐오하는 대신 음악, 회화, 조각, 시가 등 예술에 집착하며 삶의 질을 추구했다. 조용한 수도자와도 같은 이들은 외래문화나 다른 종족과의 접촉을 극히 꺼렸다.

엘프들이 마수령에게 밀려나고 인간의 시대가 온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작 엘프 자신은 이러한 흐름을 인지하지 못했다. 엘프는 여전히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세력이었고 어느 지방에서나 엘프족 마을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엘프야말로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고 우아하며, 아름답고 고상한 종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엘프들 중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났거나 지위가 높은 개체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일족의 발상지인 생명의 나무 부족으로 보내졌다. 달빛샘에 몸을 적시며 성장하는 동안 그들은 일족의 유구한 지식과 율법을 전수받았다.

물론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었다.

나무 엘프들의 발상지가 지금처럼 안전할 수 있는 건 선조 대대로 내려온 진법의 보호를 받는 덕이었다. 이곳에는 따로 정규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주변 부족들이 전부 엘프의 친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는 엘프와 공생의 역사가 아주 긴 종족도 있었는데, 그들이 있는 이상 생명의 나무 부족에 군대가 주둔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생명의 나무 부족으로 향하는 길에 천제현 역시 그 특별한 종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언뜻 오래된 나무처럼 보이는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깊은 잠에 빠져 보냈다. 가끔 한둘 깨어 있는 개체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인간처럼 걸어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엔트족이었다.

엘프만큼이나 신비로운 고대 종족.

엔트족은 생명의 나무가 죽은 뒤 그 뿌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어떻게 보면 엘프와는 같은 근원을 공유하는 셈이다. 엔트들은 대부분 만 년까지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은 노년의 엔트들에게 지혜를 선물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인간의 지혜는 대대손손 이어진다. 인간 현자는 수많은 앞 세대 현자들이 내어준 어깨를 밟고 올라 탄생하며, 모든 지식과 지혜의 결정은 빠른 속도로 후대에 전달된다. 그러나 만 년 동안 쌓인 엔트족의 지혜는 인간과 달리 자신에게서 끝날 뿐이었다.

“비비안 공주가 돌아왔다!”

유니콘 대열의 등장에 엘프 마을이 시끌시끌해졌다. 어디선가 원숭이처럼 날래게 달려 나온 꼬마 엘프들이 주변 나뭇가지를 온통 차지하고 앉아 순진한 눈망울을 빛냈다.

탈출 사건의 여파가 확대 재생산을 반복한 결과 현재 비비안은 ‘막돼먹은 엘프의 전형적인 예’ 신분이었다.

지금 몰려든 꼬마 엘프들도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매일 같이 놀던 비비안 공주가 배짱 좋게도 마을을 탈출하다니,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어라, 저 사람은 누구지?”

“어쩐지 낯이 익은걸?”

“어엇, 저거 천제현 아니야?”

엘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유니콘을 타고 대열을 따라오고 있는 저 인간족은 영화에서 봤던 검술사, 용감하고 정의로운 천제현이 분명했다.

“진짜 천제현이에요?”

“내가 천제현을 직접 만나다니!”

“엘프어 할 줄 알아요?”

속사정을 모르는 꼬마 엘프들은 그저 천제현과 인사 한마디 나누겠다고 야단법석이었다. 몇몇은 아예 천제현의 유니콘에 올라타기까지 했다.

천제현이 유려한 엘프어로 답했다.

“그래, 안녕!”

“우와!”

엘프족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프어 진짜 잘하네요, 인간들은 우리 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천제현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꼬마 추종자들을 잔뜩 만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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