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450화 (450/729)

# 450

제450장 엘프족 구출단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며 바스러져 내리는 숲속.

큰귀괴물들은 약초와 광석을 잔뜩 짊어지고 싱글벙글 올드만 마을로 향하는 길이었다.

숲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큰귀괴물은 오크 같은 녹색 피부에 자그마한 키를 하고 있었다. 힘없고 우둔한 이 초식 생명체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민감한 청각이었다.

큰귀괴물은 천성이 겁이 많은 탓에 숲에서 쥐족이나 토끼족 같은 하급 마수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항상 다른 종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보니 그들을 피해 다니는 게 본능으로 굳어졌고, 결국 큰귀괴물은 돈 될 만한 물건을 슬쩍하거나 밭에서 약초를 서리하는 등 좀도둑질로 연명하는 신세가 됐다.

그런 큰귀괴물이 최근 들어서는 부쩍 신이 나 있었다. 오늘이 벌써 올드만 마을에 네 번째로 가는 날이었다.

공정과 안전이 보장되는 올드만 마을에서라면 아무리 힘없는 생명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할 걱정이 없었다. 덕분에 그간 고이 모셔뒀던 물건들을 과감히 들고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걸 뭐로 바꾸면 좋을까? 통조림? 무기?”

큰귀괴물들이 옥신각신 떠들며 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그들의 민감한 청각에 뭔가 소리가 포착됐다. 소리의 출처를 찾아 시선을 옮긴 큰귀괴물들은 일순 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굳어 버렸다. 다음 순간 그들이 한 일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올드만 마을 협곡이 눈처럼 새하얀 유니콘으로 가득했다. 우아한 유니콘들의 진용이 마을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마수들은 마치 백옥을 깎아 만든 예술품 같았다. 잘 발달된 근육질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 아름다움, 역시 온갖 예술작품과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단골로 등장하는 신수다운 모습이었다.

유니콘은 영성(靈性)을 지닌 고위 마수로, 뿔 색깔을 보고 개체의 능력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평범한 흰색 뿔은 2급 마수, 은색 뿔은 3급 마수에 해당했다. 그런가 하면 수정처럼 투명한 금색 뿔은 4급, 즉 유니콘왕의 상징이었다.

지금 올드만 마을을 에워싼 건 온몸이 새하얀 유니콘 삼천 마리였다.

가히 유니콘 군단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숫자였다. 유니콘의 등에는 활을 든 엘프들이 앉아서 올드만 마을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중에 큰귀괴물의 행방 따위에 관심을 보이는 엘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엘프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땅의 엘프, 고블린, 빅풋들이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고, 식인마나 고위 마수령처럼 강력한 생명체들 역시 간이 바짝 쪼그라들었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니콘 군단의 어마어마한 규모 탓이었다.

잘해야 그 자리에서 당장 꽁무니를 내빼지 않는 게 고작, 숲의 어떤 생명체도 감히 엘프족의 행렬에 훼방을 놓을 생각은 못 했다.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숲 외곽에 이렇게 많은 엘프가 나타나다니.

혼돈의 숲을 대표하는 세력 중 하나인 엘프족은 외부와의 교류를 달가워하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토착세력을 공격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할아버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열넷에서 열다섯쯤으로 보이는 엘프 소년이었다. 녹색 나무 재질의 갑옷에 가느다란 장창을 든 소년은 무리 내 연장자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달라고 조르는 중이었다.

“비비안 공주님이 여기 잡혀 있다는 게 확인됐어요! 당장 쳐들어가서 납치된 공주님을 모시고 나오자고요!”

할아버님이라는 불린 엘프는 겉만 봐서는 그다지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다. 눈썹과 머리카락이 은백색일 뿐, 얼굴에는 주름이랄 것도 거의 없었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유니콘에 타고 있는데도 그 차분하고도 묵직한 아우라는 수많은 엘프들 중 단연 돋보였다.

‘공주가 납치를 당해? 세상에 그런 짓이 가능한 자가 과연 있기나 할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 못 할 엘프 대장로가 아니었다. 엘프는 호전적인 종족이 아니었다. 불필요한 살육은 피하는 게 답이었다. 한낱 변두리의 작은 마을이 아닌가. 자초지종이야 공주를 넘겨받은 뒤 천천히 알아봐도 됐다.

“그레이하트, 경솔하게 나서지 마라. 공주님 성격을 건드렸다가는 두 번째 탈주극이 일어날 걸 모르느냐?”

비비안의 성격이라면 엘프 대장로가 아주 잘 알았다. 살살 어르고 달래도 통할까 말까 하거늘, 저 반항기 넘치는 공주에게 강압적인 수단이 웬 말인가.

대장로가 주위 엘프 몇몇에게 말했다.

“마을에 가서 전하거라. 무고한 이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거든 당장 비비안 공주를 내보내라고. 엘프는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문명종족이다. 평화적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라면 폭력은 지양한다. 비비안 공주님 역시 죄 없는 이들의 희생은 바라지 않으시겠지.”

대장로의 말을 전할 엘프가 즉시 마을로 향했다.

엘프 소년 그레이하트는 매우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숲 귀퉁이에 붙은 하찮은 마을에 불과하잖아요. 강하고 고귀한 우리 엘프들이 천한 종족까지 생각해 줘야 해요?”

“만물이 존재하는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느니라. 천하다고 함부로 죽여서는 안 돼.”

인간이나 마수령을 개미처럼 하찮은 존재로 보는 건 대장로도 예외가 아닌 듯했다. 대장로의 거만한 말투가 이어졌다.

“비천하고 추잡한 종족들이 있기에 엘프의 고귀함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일족의 고상한 전통을 존중하거라. 그게 우리와 다른 대륙 종족 간의 가장 큰 차이이니라.”

그레이하트가 뭔가 반박하려는 찰나.

“그만.”

대장로가 말을 끊었다.

“도둑맞은 아비숑의 선약과 비비안 공주의 탈출 사건에 대해서만 알아보면 그만이다. 상관없는 문제까지 끌어들일 생각일랑 말아.”

이때 비비안이 천제현, 공서련과 함께 걸어 나왔다.

“맙소사!”

멀찌감치 유니콘 위의 장로를 본 순간, 비비안의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생명의 나무 부족 대장로잖아!”

생명의 나무 부족이라면 비비안이 도망치기 직전까지 머물던 곳이었다.

엘프 왕국의 중심지는커녕 제대로 된 도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 그러나 생명의 나무 마을은 이 세상 첫 엘프가 태어난 땅, 즉 나무 엘프 일족의 발상지였다.

비록 크고 번화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전통에 따라 엘프들은 누구나 발상지에서 일정 기간 머무르며 일족의 지식과 율법을 익혀야 했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성년이 되었을 때 각지로 보내져 직무를 맡을 수 있었다.

엘프들에게 있어 생명의 나무 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은 의미가 아주 컸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엘프왕의 딸 비비안이 부족 장로의 선약까지 훔쳐 그곳을 탈출했으니, 사건의 여파가 얼마나 크고 심각했을지는 짐작할 만했다.

비비안을 본 그레이하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난 두 달 동안 엘프족 전체가 공주님을 찾아 헤맸어요. 비열한 인간족의 꾐에 넘어가신 거군요. 천한 인간들을 엄하게 다스리면 공주님이 받을 벌은 가벼워질 거예요!”

“무슨 헛소리야! 선약을 훔친 것도 나고 거기서 빠져나온 것도 나거든? 전부 나 혼자서 한 일이라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상관없어!”

비비안은 전혀 겁먹거나 뉘우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난 이제 기적상회 소속이야. 따라갈 생각 없으니까 가서 아버지랑 의회 늙다리들한테 전해. 내 손에 일족의 운명을 바꿀 기술이 들어올 거라고, 훗날 다들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라고 말이야!”

그레이하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뇌를 당해도 단단히 당하셨구나! 아니고서야 저런 황당한 말이 나올 리가 없다!’

교활하고 위선적인 인간은 순진한 엘프를 속여먹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하다하다 일족의 보물 비비안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다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상회인지 뭔지 소속을 자처하며 인간들과 어울려 다니는 건 엘프족에 대한 모독이자 일족의 율법을 완전히 무시한 행동이었다.

아니, 이건 율법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이미 일족에 대한 배반행위에 가까웠다.

엘프 대장로의 낯빛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사태가 일파만파 계속 확대되면 비비안은 최소 백 년 유폐형을 받게 될 것이다. 호락호락한 연금과는 다른 진짜 유폐. 제아무리 비비안이라도 엘프족의 감옥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으리라.

긴 세월을 사는 엘프들이라고 해도 유폐는 극히 잔혹한 형벌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천제현이 나섰다.

“엘프 여러분께서 잘못 아신 듯한데, 비비안 공주님이 약을 가지고 나온 건 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라면 이미…….”

“닥쳐라! 간사한 인간족!”

그레이하트가 창을 지면에 박아넣자 천제현의 주변으로 덩굴이 빽빽하게 자라나더니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레이하트가 화살처럼 천제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겉모습은 열셋에서 열넷이나 됐을 법한 소년이지만, 사실 비비안보다 엘프 나이로 한 살이 적을 뿐인 그레이하트는 인간으로 따지면 육십 살이 넘었다. 비록 정신적 성숙이 느린 엘프족이었으나 이 정도 나이면 전투력은 이미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레이하트는 부족 대장로의 손자, 그의 마력은 벌써 진령 1성급이었다.

이 광경을 본 비비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레이하트가 싸우는 방식을 훤히 꿰뚫고 있는데다가 막강한 마력과 공간 재능까지 합치면 비비안이 그레이하트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미처 움직이기도 전, 엘프 대장로의 부적이 날아와 비비안의 정령을 봉인해 버렸다.

‘안 돼! 공간능력을 쓸 수 없게 됐어!’

그레이하트의 장창이 천제현을 향해 쇄도했다.

일순 천제현의 표정이 변했다.

‘빌어먹을, 고지식하고 우둔한 엘프 놈들 같으니.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날 죽이려 들어? 인생을 두 번이나 산 놈이 이렇게 쉽게 죽어줄 것 같으냐!’

신마검 정령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아올랐다.

만물을 압도하는 파괴력에 몸을 옭아맸던 덩굴이 가루가 되어 버렸다. 곧장 염마변 제2 태세를 발동한 천제현이 신마검의 무시무시한 위용을 실어 그레이하트를 공격했다.

혼성 8성과 진령 1성.

원래대로라면 가망이 없었을 싸움이었다.

염마변에 따르는 마력 상승 효과는 고작 1성. 그러나 천제현에게는 신마검 정령이 있었다. 정령의 힘을 등에 업은 천제현은 9성 정점의 강자를 가볍게 벨 수 있는 것은 물론, 진령 1성 술사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콰앙!

거대한 힘이 충돌했다.

양쪽이 동시에 뒤로 날아갔다. 천제현이 근소한 차이로 열세인 듯했지만, 이때 그레이하트의 나무 장창은 이미 타오르는 유명화에 휩싸여 있었다.

“이 무슨 사악한 힘인가!”

그레이하트가 남몰래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비안 공주님, 고귀한 신분과 혈통으로 어째서 가식적이고 비열하기로 소문난 하층 종족과 어울리시는 건가요? 게다가 이자는 사악한 무공까지 쓰는 악당이 아닙니까? 공주님의 신분을 이용해 일족에 해를 끼치려는 속셈이 분명해요!”

누명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천제현은 차라리 이름을 천억울로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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