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
제445장 도륙
그 미묘한 균형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평화가 깨지기 전까지는 안전하고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게 정설이었다.
이익이 있는데 좇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제 주변 작은 마을뿐만 아니라 중소 세력들까지 사람을 보내 올드만 시장을 찾았다.
그렇게 올드만 마을은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드워프들은 몹시 기뻐했다. 시장이 개장한 후 높은 수익 분배율로 기적상회의 상품들을 판매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판매자들과의 거래에서도 수수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나간다면 드워프족은 혼돈의 숲에서 손에 꼽히는 부유한 종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드워프족 족장이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천제현을 찾아왔다.
“시장이 큰 인기를 얻고는 있지만, 아무도 우리와 동맹을 맺어 함께 올드만 마을을 지키려 하지 않소. 이대로 간다면 마을이 발전함에 따라 재난이 생길 가능성도 커질 것이오.”
힘과 부가 불균형할 때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올드만 마을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마을에 축적되는 부와 자원도 점점 많아질 것이고, 그게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눈독을 들이는 세력이 생길 게 분명하다.
“초조해하실 것 없어요. 정상적인 과정이니까.”
천제현은 모든 상황을 제 손금 보듯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올드만 마을은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입니다. 공동관리제 또한 이 숲에선 새로운 개념이고요.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단 지켜보려고 하지요. 게다가 마을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사람들이 우리 실력에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한 거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력을 보여줄 기회입니다.”
혼돈의 숲에서 올드만 마을의 관리체계는 확실히 선진적인 것이었다.
여러 세력이 공동으로 마을을 관리하며 이윤 또한 공동으로 배분한다. 마을에 더 많은 병력을 제공하면 더 많은 세금과 수익을 받는다. 중대형 세력들이 이 관리 방식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리 없었다. 그들이 병력 일부를 마을로 보내 치안을 맡아주면 약탈자들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드워프들은 광산에 대한 지배권을 약화를 우려하진 않았다. 협력자들과 공유하는 것은 시장뿐이었으니까. 드워프들은 지금까지와 동일하게 3층에서 채굴하고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주변 공간에 파동이 일었다.
“천제현, 문제가 생겼어!”
“무슨 일이에요?”
“우리가 정보를 하나 입수했어!”
비비안이 황급히 말했다.
“서쪽에 대규모로 무리 지어 활동하는 곤충령들이 있는데, 놈들이 지금 우리 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 같아. 카노인의 동료들이 아닐까 싶어!”
“숫자는 얼마나 되죠?”
“정확하진 않은데 최소한 몇 만은 될 것 같아!”
‘드디어 올 게 온 것인가?’
천제현은 올드만 마을을 개방할 때부터 곧 모종 세력의 도전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전투를 통해 일단 이름을 알리면 향후 수많은 세력들이 허리를 굽히고 들어오리라.
“곤충령들은 지하굴을 파는 데 능하니 대비를 해야겠군요.”
천제현은 서신을 쓴 후 공간창고에 넣어 공화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반나절 후에 다시 공간창고를 열어보니 서신은 사라져 있고 대신 천 개도 넘는 지뢰가 들어 있었다.
공화련의 뜻을 이해한 천제현은 즉시 비비안을 불러와 지뢰를 설치하게 했다. 지뢰들은 곧 마을 주변 땅속에 묻혔다. 그 위에는 나무뿌리들이 단단히 얽혀 있어 지상에서 걸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지하로 이동한다면 지뢰가 터지면서 묵사발이 되리라.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곤충령 군단이 올드만 마을을 공격할 거라는 소식이 퍼지면서 활기찼던 마을에 적막이 흘렀다.
모든 마을이 몸을 사리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가능한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올드만 마을의 실력을 확인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 전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주변 소규모 세력들뿐만이 아니었다. 혼돈의 숲 밖의 비교적 큰 세력들도 이번 전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공화련은 공간창고로 대량의 마력무기를 보냈다. 혼돈의 숲에는 이미 기적상회의 통신망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천제현은 통신기를 통해 남궁혜에게 연락했고, 곧 그녀가 보낸 3천 광전사 보병들이 올드만 광산에 도착했다.
그들을 본 천제현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마력무기에 광전사 보병, 거기에 드워프들의 지원까지 있다. 걱정할 일이 뭐 있겠는가?
***
거미후작 알베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있었다.
아우인 거미백작 카노인이 비열한 드워프들한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거미여왕, 엘리카시스의 자손이었다. 엘리카시스는 혼돈의 숲에서 가장 오래 산 곤충령 중 하나로, 그녀의 자손들은 숲 전체에 퍼져 있었다.
카노인과 알베스는 비록 세력 범위는 달랐지만,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로서 특히 사이가 좋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드워프들이 감히 내 동생을 죽이다니, 이건 엘리카시스 여왕에 대한 도발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을 처단해라! 그들의 피를 남김없이 마시고 그들 모두를 섬멸해라!’
알베스는 남은 두 명의 백작 아우들을 부르는 한편, 숲 바깥쪽에 사는 거미 일족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모인 인원수는 6만 명으로 드워프들의 10배가 넘었다.
게다가 실력이 출중한 곤충령 귀족이 싸움을 이끌 예정이니 고작 몇천에 불과한 드워프들은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 신세나 다름이 없었다.
거미족 대군은 위풍당당하게 올드만 마을이 있는 협곡을 향해 전진했다.
“앞쪽이 바로 드워프들의 광산입니다. 바로 칠까요?”
이제 올드만 마을까지의 거리는 40리밖에 남지 않았다. 거미군단의 행군속도대로라면 단숨에 마을까지 쳐들어갈 수 있었다.
“드워프들의 광산은 아주 견고하다. 병사 3만 명은 지하굴을 파서 안으로 침입하고, 나머지 3만 명은 나와 함께 광산 바깥쪽에서 공격한다. 즉시 움직여라!”
알베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거미족들은 즉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거미족은 신체 구조적 특성 때문에 주로 흙 속성 무공을 수련한다. 그런 그들에게 땅을 파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고, 지하굴을 통해 빠르게 이동하는 것도 누워서 떡 먹기였다.
“진격해라!”
병사 중 반이 땅속으로 들어가자 알베스는 정찰할 생각도 없이 바로 진군 명령을 내렸다. 겨우 드워프 5천 명 아닌가. 정찰할 가치도 없다. 그대로 돌격해서 밟아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알베스가 명령을 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거미군단 전방에 한 소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뭇잎으로 된 옷을 입고 머리엔 화관을 썼으며 맨발인 소녀였다. 작고 아름다운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거미군단 앞에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엘프? 갑자기 웬 엘프지?’
그녀와 마주친 알베스는 순간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넌 누구냐?”
비비안은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 않고 시커먼 거미군단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언뜻 보기엔 느려 보였지만, 실은 매우 빨라서 순식간에 거미군단 코앞까지 다가왔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거미군단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대체 저 엘프는 어디서 나타난 자란 말인가.
“죽여라!”
알베스는 그녀에게 대답을 듣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어쨌든 길을 막고 있으니 죽여 버릴 수밖에.
그녀의 작은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고도 남을 만큼의 독화살들이 빽빽하게 날아갔다. 그런데도 비비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어떤 방어 태세도 취하지 않은 채 아까와 마찬가지로 거미군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저 엘프,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아름다운 엘프 소녀가 화살받이가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때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화살이 전부 그녀의 몸을 뚫고 지나간 것이다. 관통된 게 아니었다. 그 어떤 저항도, 피해도 없이 모든 화살이 그녀의 몸을 통과해 뒤쪽 바위에 박혀 있었다.
‘전부 비켜간 건가?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설마 환술? 그것도 아니라면, 유령인가?’
그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저 여자는 멀쩡히 살아 있는 존재가 분명했으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이번엔 알베스가 직접 창을 들어 던졌다. 그 창은 엄청난 마력을 싣고 날아갔으나 방금 전의 화살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처도 주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쾅!
창이 번개처럼 바위에 내리 꽂히자 바위가 삽시간에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네년은 정체가 뭐냐!”
얼굴이 납빛으로 질린 알베스가 소리 질렀다. 다른 거미족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비비안이 벌써 5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 올린 그녀는 알베스를 바라보며 손날로 공기를 갈랐다.
순간 알베스는 공간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공간공격이다!’
그 아무리 강한 방어력이 있더라도 공간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격자가 공간 안에 있는 사물이 만들어내는 저항을 이겨내고 공격을 마칠 수만 있다면 그 공격은 모든 방어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공간공격이 이뤄지면 그 어떤 저항도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알베스는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이동하며 피하려 했지만, 그의 눈앞에서 공간이 갈라지는 듯하더니 그의 왼쪽 어깨가 잘려나갔다.
“젠장!”
“저놈을 해치워라!”
거미족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각양각색의 공격이 폭풍우처럼 그녀에게 날아왔다. 그러나 비비안은 그들의 공격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적들의 공격은 전부 그녀의 몸을 통과했으니까.
그녀는 유령처럼 거미군단 한가운데로 뚫고 들어갔고, 그 결과 그녀를 겨냥한 화살들은 그대로 거미군단 병사들의 몸에 꽂혔다. 눈 깜짝할 새에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공간공격이 이뤄졌다.
“으아악!”
거미백작 한 명이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허리가 둘로 잘려 나간 것이다.
알베스는 분노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저 여자를 잡으려 들지 마라!”
거미군단은 공포의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공간 재능을 지닌 저 엘프는 그들 중 누구라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의 공격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단 말인가.
알베스는 그 모든 게 납득이 되지 않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는 정령을 소환해 주변을 마력으로 덮었다. 공간 안의 마력이나 질량의 밀도가 높아지면 공간 공격 시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한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막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