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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258화 (441/729)

# 258

제258장 기적연구소와 운문의 합병

염무기가 자리를 뜬 직후 이번에는 경호가 재료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 역시 기적상회가 찾고 있던 물건이었다.

천제현으로서는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억만금을 풀어도 못 구할 것 같던 재료가 운씨 가문 연회에 한번 들렀다고 줄줄이 굴러 들어오다니.

‘설마 내가 뭘 찾고 있는지 간파하고 미리 시장에서 구해뒀다가 선물 조로 내놓는 건가? 훗날 보답할 기회를 찾도록 만들려고?’

물론 한편으로 이는 기적상회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힘이 생기면 사람은 저절로 모여들게 되어 있는 법.

상인들을 상대하는 일은 공화련에게 맞긴 채 천제현은 운천학을 찾아 나섰다.

“축하드립니다. 운씨 가문이 훌륭한 후계자를 얻었군요! 운요는 아마 조부보다 더 높은 경지까지 다다를 겁니다!”

운천학은 승천하는 입꼬리를 감당 못 할 지경이었다.

마땅한 후계 없이 가문의 쇠퇴를 지켜보던 그가 이 상황에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침 잘 왔소. 추진하던 계획 하나가 얼마 전 장로회를 통과했는데, 선생 의견도 들어보고 싶구려.”

운천학은 뭔가 큰 결심을 한 기색이었다.

“운요에게 임시 가주 직책을 주고 보좌역으로 노련한 장로 몇을 붙여줄까 한다오. 난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소.”

상당히 의미 있는 발언이었다.

운천학에게서 가주 자리를 넘겨받을 운요는 천제현을 비롯한 기적상회 주변인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게다가 남궁혜와 함께 기린무도관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반은 기적상회 고위층 인사인 셈.

운요가 가문을 장악하게 되면 기적상회와의 협력 관계도 한층 끈끈해질 것이다.

천제현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정정하신데 은퇴라니요?”

지긋한 나이였지만 운천학의 눈은 여전히 총기로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는 후대에 내어줘야 할 자리가 아니겠소. 내가 아직 살날이 남았을 때 가르칠 건 가르쳐둬야지. 덕분에 나도 번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소?”

“의미 있는 일이라면…….”

“운문과 기적연구소 말이오. 가능하면 둘을 합쳐 대규모 연구 기관을 만들고 싶소.”

그야말로 놀랄 노 자였다.

운천학의 과단성이란.

운문은 그들 가문의 뿌리이자 가장 중요한 재정원이 아닌가.

운씨 가문이 남하국에서 쌓아 올린 명성의 9할은 운문 덕택이었다. 부적, 약제, 무학 등 방면에서 운문이 낸 창조적 성과는 운씨 가문에 막대한 부를 선사했다.

기적연구소와의 합병은 운문을 통째로 반 잘라 기적상회에 바치는 일이나 매한가지였다.

기적상회의 영향력과 확장속도, 게다가 최고수준의 인재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점을 고려하면 운문이라는 이름은 곧 세상에서 잊히고 그 자리에는 기적연구소만 남게 될 게 뻔했다.

운씨 가문으로서는 비극적인 일.

반대로 기적상회에는 엄청난 기회였다.

기적상회가 아무리 빠르게 발전 중이라고는 하나 종국에는 반년이 채 안 된 신흥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자원과 인재는 하루아침에 모이는 게 아니다.

백 년 역사의 운문이 기적연구소와 한 몸이 된다면 기적상회는 순식간에 남하국 최고 수준의 연구력과 기반을 얻게 된다.

“좋습니다. 하지만 두 이름을 같이 쓰기에는 너무 번거로워요.”

잠시 고민하던 천제현이 말했다.

“오늘부로 기적상회 연구소의 이름은 ‘운문’입니다!”

이번에는 운천학이 놀랄 차례였다.

기적상회의 정체성을 지운 건 운씨 가문에 주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천제현은 그 선물을 받는 대신 운씨 가문의 체면을 세워준 셈이다.

사실 연구소를 어떻게 부르든 천제현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름 따위야 아무려면 어떤가.

하지만 그 ‘이름 따위’가 한 가문에는 엄청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운천학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운문이 정식으로 탄생한 것이오!”

천제현과 운천학이 나눈 대화는 짧았으나 그 내용은 중주 전체를 뒤흔들 만한 것이었다.

이로써 운문은 운씨 가문에서 떨어져 나와 일종의 공동연구소로서 기적상회를 위해 일하게 됐다.

운문 본원, 학자, 설비, 백 년간 쌓아온 자료 역시 전부 기적상회에 공유됐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세력의 탄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기적상회와 운씨 가문이 그 세력의 지분 절반씩을 가지고 있을 뿐.

운천학은 자신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믿었다. 기적상회만 운문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얻는 게 아니다. 운문 역시 기적상회를 등에 업고 중주를 넘어, 그리고 남하국을 넘어 대륙 전역으로 뻗어 나갈 것이다.

기적연맹의 기본적인 윤곽이 갖춰졌다.

마력 요리 사업을 맡은 기적요식상회.

방송과 통신을 맡은 기적방송상회.

부적과 약제 등 전통 제조업을 책임질 남운상회.

기적상회 휘하 사병이 되어줄 황천용병단.

초일류 연구단체를 탄생시켜줄 운문과의 합병.

연수원 역할을 할 기린무도관.

특히 기린무도관은 참신한 인재 공급과 동시에 기존 기적상회 소속 인원에 대한 교육을 통해 상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끌어갈 것이다.

공화련이 끌어 모은 중주의 중소 세력 수십은 이미 생산 공장, 상단, 선단, 운송, 재료공급 등 방면에서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일종의 자급자족형 체게가 형성된 것이다.

기적상회는 여기까지 무서운 기세로 올라왔다. 이제 몇 가지 장애물만 더 넘어서면 앞길은 탄탄대로이리라.

운천학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렸다.

집안을 이끌어온 세월도 장장 50년.

백발의 가주가 내린 마지막 결정이자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운씨 가문은 이제 기적상회와 운명 공동체가 됐다. 기적상회가 흥하면 운씨 가문도 흥할 것이요, 기적상회가 망하면 운씨 가문 역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것이다.

생의 막바지를 바라보는 노인에게조차 이런 패기와 야망이 있거늘.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세가조차 이토록 과감히 승부수를 던지거늘.

이 상황에서 겨우 수십 년 된 소형 세력들이 더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하늘이 무너져도 받쳐 들어줄 거인이 버티고 있는데.

기적상회와 함께하기로 한 결심은 역시나 옳았다. 기적상회가 몸집을 키워갈수록 그들의 주머니는 더 두둑해질 것이다.

공화련은 내심 흡족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천학 어르신이 천제현을 이 정도까지 신뢰할 줄이야!’

이로써 천씨, 낙씨, 양씨 가문은 더더욱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리라.

운천학의 발표와 함께 연회가 한층 무르익어가고 있던 그때.

담장 너머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성주 어르신 납시오!”

다들 당황한 얼굴이었다.

천제현과 성주가 어떤 관계인지 누구 하나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성주가 하필 이때 운씨 가문에는 왜?’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주는 중주성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억지로라도 반가운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뭣들 하고 있는 게야?”

심기 불편해 보이는 운씨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과는 달리 운천학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얼른 나가 성주를 맞이하지 않고?”

성주 휘하의 정예 호위병 십여 명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신 갑옷에 시퍼렇게 날이 선 병기까지 든 그들은 곧이어 두 줄로 칼같이 대열을 맞춰 늘어섰다.

그 살기등등한 풍경에 연회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심상치 않은 등장.

속셈이 뭔지는 곧 알게 될 일이었다.

관복에 옥관을 쓴 성주 풍운룡의 주위로는 호위병 몇몇과 벼슬아치들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운천학 가주!”

만면에 웃음을 띤 풍운룡이 자못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자전공자가 큰 성취를 이루었다던데, 이 경사스러운 날에 어찌 나만 쏙 빼놓을 수가 있소이까? 성주 된 몸으로 선물이라도 전달하는 게 도리이거늘!”

듣던 이들 모두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운씨 가문과 성주가 무슨 긴밀한 관계라도 되는 줄 알 일이었다.

성주에게 예를 표한 운천학이 정중하게 답했다.

“그럴 만큼 대단한 일은 못 되는지라.”

“겸손이 지나치시구려!”

성주 풍운룡이 한쪽을 향해 손짓을 해 보였다.

“여봐라, 선물을 가지고 오거라!”

곧 호위병 둘이 커다란 상자를 옮겨왔다.

저택 안에 정적이 흘렀다. 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소인 천제현, 성주 어른을 뵙습니다!”

이때 자리를 박차고 나온 천제현이 몹시 과장된 동작으로 예를 표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아드님도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해 다시 중주성을 빛내 주시길 바라겠사옵니다!”

풉!

결국 어디선가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일부러 성주의 심기를 살살 긁고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능구렁이 같은 풍운룡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풍운룡이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말했다.

“고맙소, 천제현 회장. 우리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은 내가 순간 흥분한 탓이었으니 부디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줬으면 하오.”

천제현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원래 재수가 없어서 집밖에만 나가도 똥개한테 잘 물리고 그럽니다. 워낙 자주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냥 웃고 넘기는 경지가 됐지 뭡니까? 저야 그저 성주께서 잘 봐주십사 하는 마음뿐이지요.”

풍운룡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성주를 똥개에 갖다 대?’

이 정도까지 노골적인 풍자를 누군들 못 알아들을까. 여기서 모르는 척 넘겨봐야 더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성주가 폭발 직전임을 눈치챈 운천학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됐소이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는지 풍운룡의 음성이 급속히 냉랭해져 있었다.

“오늘 운씨 가문에 온 건 긴급임무가 내려왔기 때문이오!”

좌중이 일순 술렁였다.

말을 마친 성주가 검은색 영패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다들 알겠소?”

단검 모양으로 생긴 영패에 ‘武’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재질 자체는 평범했지만 풍기는 위엄이 결코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군령(君令)!”

운천학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풍운룡이 말했다.

“무안군(武安君)의 군령을 앞에 두고도 예를 다하지 않는단 말이오!”

퍼뜩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허둥지둥 대오를 갖추더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운천학과 염무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제현도 공화련의 손에 이끌려 한쪽에 서 있었다. 공화련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군령이 뭐길래 저래요?”

“소리 낮춰!”

공화련이 속삭였다.

“군령이란 ‘군(君)’ 작위를 가진 자의 영패를 말해. 남하국의 작위 체계는 왕, 군, 후 이렇게 딱 세 단계야. ‘후(候)’로는 남하팔후가, ‘군’으로는 왕성 삼대봉군(三大封君)이 있어. 최고 단계인 ‘왕’은 오직 한 명, 바로 남하국 국왕이고!”

‘삼대봉군? 남하팔후보다 높은 지위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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