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436화 (432/729)

# 436

제436장 사르도 마을

비비안이 도시 하나를 받을 수 있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프는 배타적이고 특히 인간을 꺼려하기 때문에 인간을 도시에 오래 머물게 허락할리 없다. 인간에게 도시 관리를 허락할리는 더욱 없다. 천제현이 엘프 도시에 머문다면 많은 제약을 받을 것이다.

혼돈의 숲은 남하국과는 다르다. 강한 힘이 없다면 가진 게 많아도 지킬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천제현은 숲에서 동맹을 찾는데 조급해하지 않았다. 질서도 없고 혼란스러우며 폭력이 난무하는 이곳에는 이해득실만 있지 도리 따위는 없었다.

“귀빈 여러분.”

토끼족 족장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두려움과 공경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마을의 샘물을 되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가 도울 일이 있는지요?”

토끼족은 마수령의 일종이지만 하급 종족에 속했다.

마수령족은 대륙에서 가장 복잡한 종족 중 하나였다.

인간은 고대 인종 가까운 친척뻘에 해당하는 드워프족과 야만족, 거인족 등이 있다. 엘프는 숲의 엘프, 얼음의 엘프, 불의 엘프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마수령족처럼 수백 가지 독립된 분파로 나뉘는 종족은 없었다. 마수령족은 정말 불가사의했다.

마수령족의 특징은 급이 높을수록 난폭하고 낮을수록 온순하다는 점이다.

토끼족은 실력이 약해서 싸움을 싫어한다. 토끼족은 고급 종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독립된 토끼족 마을은 많지 않았다. 다른 종족의 사냥꾼이나 강력한 마수의 눈에 걸리면 이들은 바로 멸족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토끼족은 별다른 능력이 없고 문명화되지도 않아서 마력진의 원리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니 약을 조제하는 일들을 알리 만무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샘은 토끼족의 생존 밑천이었다. 마수의 손에서 생명의 샘을 되찾아준 천제현 일행은 토끼족에게 엄청난 은인인 셈이었다.

다만 토끼족은 천제현 일행이 다른 의도를 품고 도와준 것일까 봐 걱정했다. 이들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마을을 지키기 힘들 것이다. 그런 까닭에 토끼족들은 혹시 모를 화를 피하고자 진즉에 마을 밖으로 몸을 피했다.

“우리는 그저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재료를 구하려고 혼돈의 숲에 오게 되었지요. 그러나 어디로 가야 재료를 구할 수 있는지 잘 모르니 도와주십시오.”

아직 실력이 부족하니 몸을 낮추는 게 좋았다.

이번에 혼돈의 숲에 온 목적은 하나였다. 마력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기적상회에 적합한 재료 공급처를 찾아 고급 재료를 공수하는 것이다. 당분간은 혼돈의 숲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싸움에 개입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도시를 쟁탈하여 세력을 키워? 지금의 실력으로는 건드렸다가는 기적상회가 무너질지도 몰라! 급하게 굴면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지. 우선 광전사 부대를 양성한 후에 다시 생각하자!’

“여기서 100리쯤 떨어진 곳에 임시로 세운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는 주변 부족들은 모두 그곳에서 물물교환을 하지요.”

토끼족 족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마을은 작지만 숲의 특산품이 꽤 있습니다. 나리가 찾는 물건이 없다고 해도 정보를 수집하기 편리하실 겁니다.”

‘임시로 세운 마을이라고?’

천제현은 사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혼돈의 숲에 사는 소규모 종족은 물론이고 중견 세력까지 모두 어쩔 수 없이 숲의 법칙을 따라야 했다.

숲의 법칙은 간단하다. 어두컴컴한 숲에는 사냥꾼들이 널려 있다. 이들은 서로의 사냥감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반드시 자신의 세력을 숨겨야 한다.

근거지가 노출되면 몹시 위험하다. 다른 사냥꾼들의 습격뿐만 아니라 거대한 세력의 주의를 끌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흡수되거나 멸족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그저 그런 중소 규모의 부족이 숲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숲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자신의 세력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외부와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임시로 마을을 세우는 것이다.

각 부족은 필요한 물자가 생기면 위장을 하고 이 마을에 와서 교환하고 즉시 떠난다. 다른 세력의 주의를 끌거나 미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절대 필요 이상 머물지 않는다.

“정보를 캐야 하니 바로 떠나자.”

“잠시 기다리십시오.”

토끼족 족장은 천제현이 일행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손뼉을 쳤다. 풍만한 몸매의 토끼족 미녀들이 걸어 나왔다. 소녀들은 모두 깨끗이 씻고 단장한 차림이었다. 소녀들은 촉촉한 눈으로 천제현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마을에서 가장 어여쁜 소녀 열 명입니다. 모두 처녀의 몸이지요. 이 아이들을 나리께 바치겠습니다. 몸종으로 쓰십시오. 토끼족은 온순하고 열정적이니 나리를 잘 모실 겁니다.”

‘뭐야 이게. 농담이겠지!’

천제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토끼족은 인간족이 아니라서 다소 이상한 모습이긴 하나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깜찍하고 몸매도 좋다. 성격도 자상하고 온순하기 때문에 시종으로 삼기에는 최고이다. 인간 세상에서 토끼족 미녀는 비싼 값에 팔린다. 처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천제현은 칼날 같은 눈빛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빙우조차 싸늘한 눈빛이었고 비비안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소녀들을 덥석 받겠는가.

천제현이 점잖게 거절했다.

“제가 미색이나 탐하는 경박한 인간으로 보이십니까? 족장님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토끼족 족장이 말했다.

“나리를 모시는 건 이 아이들의 영광입니다. 물리지 마십시오.”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토끼족 소녀들은 모두 갈망의 눈빛을 보냈다.

소녀들은 혼돈의 숲에서 매일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다. 강자의 눈에 들어 시녀가 되면 출세하는 셈이다. 게다가 인간은 토끼족의 심미관에 부합한다. 흉측하게 생긴 호랑이족이나 곰족보다는 훨씬 나았다.

토끼족도 이를 빌미로 천제현을 감시할 수 있다. 천제현이 돌아가서 토끼족 마을의 위치를 누설하면 소녀들이 이 사실을 알려 마을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혼돈의 숲 같은 곳에서는 늘 조심해야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임시로 열리는 마을은 매우 위험합니다. 소녀들을 데리고 갈 수 없어요!”

공서련이 갑자기 앞으로 나왔다.

“일단 소녀들을 여기에 두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데리고 갈게요. 그렇게 해요!”

토끼족 족장은 천제현 일행이 한사코 거절하자 다소 실망했다.

‘눈앞의 이익을 거절하다니 정말 고상한 것일까 아니면 더 큰 요구를 하려는 것일까?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군!’

토끼족 족장은 공서련과 비비안, 심빙우를 몇 초 동안 쳐다봤다. 족장은 이렇게 뛰어난 미녀들이 곁에 있으니 정말 토끼족 소녀들이 불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라 위안했다.

***

천제현 일행은 토끼족 마을을 떠났다.

공서련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미녀 시종 열 명을 놓치게 돼서 실망한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세요? 저는 자유연애주의자예요. 저런 거래는 결단코 싫다고요!”

“그 말을 어떻게 믿겠어!”

공서련이 눈을 흘겼다. 그녀는 희미한 불빛에 쌓여 있는 토끼족 마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토끼족들이 참 안 됐어. 힘이 약한데도 이런 위험한 환경 속에 살아야 하잖아. 조만간 발각되거나 없어지겠지. 그런데 참 이상해. 혼돈의 숲에는 자원이 넘치는데 왜 서로 싸울까?”

“혼돈의 숲은 쭉 이래왔어.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게 되지.”

비비안이 익숙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작은 부족이나 세력은 살아남기 힘들어. 그보다 더 강한 세력에게 포착되면 아무 이유 없이 공격을 당하게 돼.”

공서련이 천제현에게 말했다.

“야, 이렇게 혼란한 곳을 아예 통일시키는 게 어때? 저렇게 약한 종족도 살게 해줘야지!”

‘참내, 말본새 보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냐고!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용의 영주는 어떻게 해치워?’

천제현이 현재 만들 수 있는 무기로는 용 영주의 비늘 한 조각도 건드릴 수 없다. 게다가 엘프왕과 타이탄, 마수왕, 해양종족왕 등 강자가 널려 있다.

그러나 지기 싫어하는 천제현은 곧바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서련 아가씨 분부니 최선을 다해 보지요!”

공서련은 기분이 좋아서 달콤하게 웃었다.

‘천제현이 이렇게 대답했으니 분명 문제없겠지. 이 세상에서 천제현이 못하는 일은 없잖아!’

비비안은 공서련과 천제현의 관계를 몹시 부러워했다. 천제현은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천제현 일행이 길을 나설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밤에 숲을 돌아다니는 것은 금기이다. 대다수의 마수가 야밤에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제현은 실력도 좋고 담력도 셌다. 그는 혼돈의 숲 변두리에는 자신을 위협할 존재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미로 같은 숲에 깔린 반딧불과 태양덩굴, 광훈초, 야광버섯 등이 빛을 뿜었다. 그다지 밝지는 않았지만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빛을 내는 생물들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요괴는 아름다운 빛과 환영으로 사냥감을 미혹시켜 덫으로 유인한다.

숲의 밤은 원래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다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벌레가 음산하게 울고 어딘지 모를 곳에서 때때로 마수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다섯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도중에 몇 차례 습격을 당했지만 별다른 위험 없이 넘기고 아침 무렵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침노을이 불꽃처럼 숲에 번졌다. 옅은 황금색 햇살이 사르도 마을을 비췄다. 사르도 마을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작은 협곡 안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토끼족 족장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 근처를 지나도 마을이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마을은 은밀히 숨겨져 있는데다 초록색 덩굴로 뒤덮여 숲의 일부처럼 보였다.

사르도는 마수령 말로 ‘숲 속의 집’이라는 뜻이다. 마을에는 마수령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곳에는 경비병도 촌장도 없었다. 법이 개똥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곳이다. 오직 힘만이 모든 것을 대변했다.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놀랍게도 마을은 작았지만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었다. 인구가 몇 천에 불과했지만 주막, 잡화점, 각종 점포 등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자리를 잡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이곳의 약방 주인은 대주국에서 도망친 죄인이다.

그자는 제약기술에 정통하여 독약으로 원수인 귀족 일가 300명을 죽였다. 그 후 대주국에서 혼돈의 숲으로 도망쳐 눈에 띄지 않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몇 안 되는 인간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곳에는 제약사가 몹시 드물어서 마을의 중요한 인물이 병에 걸리면 다 그에게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고작 몇 년 동안 이 작자는 미모가 빼어난 여제자를 여럿 모집했다.

제자들은 약초에 관한 간단한 지식만 배웠다. 이들은 낮에는 조수였지만 밤에는 욕구를 푸는 노리개였다. 찾아온 환자 중에 제자를 눈독 들이는 자가 있으면 치료비 외에 특별 봉사료를 받고 마음껏 즐기게 해주었다. 어떤 때는 이렇게 번 돈이 정상적인 수입보다 훨씬 많았다.

여제자들은 보수 한 푼 받지 못하고 매일 유린당하며 학대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들은 주인과 현재의 삶에 만족했다.

지위가 있는 주인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어떻게 배불리 먹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노예는 벌레나 다를 바 없이 하찮은 목숨이었다.

독주와 담배, 환각제, 노예, 폭력, 욕정…… 이 작은 마을은 혼돈의 숲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숲의 현실을 여실히 대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