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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427화 (423/729)

# 427

제427장 어이없는 최후

송곳니왕은 철추를 들어올려 엄청난 양의 번개를 소환했다. 흡사 앞도 안 보이게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번갯불이 사방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쏘아져 나갔다. 상대의 능력이 특별한 건 사실이지만, 공간조작을 위해서는 공간을 찢는 게 먼저였다.

어지러운 번개로 가득 찬 주변에서 육안으로 송곳니 왕의 위치를 식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비안이 공간을 찢고 순간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송곳니 왕 바로 옆에 공간의 균열이 열리는 순간, 번개가 뭉텅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통에 순간이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주변을 마력으로 꽉 채워 내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시도인가?’

허나 송곳니왕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뇌신의 육체!”

사방으로 흩어졌던 번개가 돌연 한곳으로 모여들더니 송곳니 왕과 합쳐졌다. 2장이 넘는 거인으로 변한 그는 야수의 얼굴에 인간의 몸을 하고, 등에는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었다. 단단하게 뭉친 번개 마력으로 만들어진 육신,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골치 아프게 됐다!’

누구나 알다시피 공간 속성은 여타 속성을 압도하는 최강의 위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힘이 강력할수록 따르는 제약 역시 많아지는 법.

비비안의 공간조작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거리. 거리가 멀수록 조작의 정확도는 떨어진다. 예를 들어 비비안이 공간 베기를 이용해 수 장 밖에 있는 상대를 베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거리가 수십 장으로 늘면 난이도가 올라간다. 다시 거리를 수백 장으로 늘릴 경우에는 정확도가 매우 떨어진다. 공간조작 시 상대방의 위치는 신식을 이용해서 포착하기 때문에 거리가 멀어지면 거기까지 미치는 신식도 약해져 위치를 확정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공간의 안정성. 공간의 안정성 역시 공격의 정확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공간은 안정적인 상태지만, 공간 중에 막대한 마력이 떠다니는 경우에는 마력 파동의 영향으로 안정성이 깨진다. 이러한 마력 간섭을 극복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공격하기 어렵다.

송곳니 왕이 주변을 향해 고강도 마력을 방출하는 건 공간의 안정성을 깨뜨려 비비안의 공간조작을 차단하는 동시에 마력파 간섭으로 비비안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공간조작에 대해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아는 놈이었을 줄이야, 설마 이전에도 공간정령을 상대해 봤단 말인가?’

비비안이 멸시의 시선을 거둬들였다. 이번 상대는 노련한 전사였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도망치려면야 공간 재능을 이용하면 간단하겠지만, 천제현이 준 첫 임무를 망쳐 버리면 기적상회에 돌아갈 낯이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천제현에게 전수받은 무공을 써보는 수밖에!’

공간 속성에 알맞은 무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비비안은 공간을 자를 수 있는 정령 자체의 성질에만 의존해 싸워왔고, 그 결과 전투방식은 늘상 단조롭기만 했다. 순간이동이든 공간베기든 어차피 기초는 모두 공간을 자르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송곳니 왕이 번개로 주위를 온통 봉쇄한 상황, 순간이동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강력한 마력 파동 탓에 공간베기도 먹히지 않는 건 물론이었다. 언뜻 보기에 비비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토록 강대한 힘을 당해내기에 비비안의 방어능력은 너무나 보잘것없었으니까.

송곳니 왕이 도망치더라도 비비안으로서는 막을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송곳니 왕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되레 거대한 번개송곳을 겨눈 채로 비비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도 잘 아는 듯했다. 순간이동이 가능한 엘프의 손에서 도망쳐봐야 얼마 못 가 다시 붙잡히리라는 것을.

하물며 지휘관의 몸으로 어찌 병사들을 두고 혼자 꽁무니를 빼겠는가. 상대는 공간을 다루는 능력을 갖췄다 뿐이지 방어능력 자체는 형편없었다. 마력이야 어떻든 바짝 접근하기만 하면 일격에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비안이라고 그런 송곳니 왕의 속셈을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었다.

‘흥, 더러운 마수령 주제에 감히 내 목숨을 노려?’

허공둔을 수련한 지 이제 겨우 며칠이 지났지만 비비안은 기본적인 요령 상당수를 이미 익힌 뒤였다. 타고난 재능이라기보다는 진령급 고수라는 요인의 덕이 더 컸다. 게다가 오랜 기간 공간무공에 목말랐던 상황에서 드디어 정령의 속성에 맞는 무공을 접했다는 상황 역시 도움이 됐다.

송곳니 왕은 비비안과의 거리를 좁혀가면서도 주변을 번개로 빈틈없이 채웠다. 번개가 뿜어내는 강렬한 마력으로 주변 공간에 간섭을 일으킴으로써 비비안의 순간이동 능력을 무력화한 것이다.

“죽어라!”

송곳 모양으로 뭉친 번개가 비비안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비비안의 몸이 순간 일렁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번개송곳이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이제 번개의 섬광은 비비안의 등 뒤쪽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죽은 건가?’

송곳니 왕의 표정이 상기됐다.

‘이렇게 강력한 마력에 당했는데, 안 죽고 배겨날 리가!’

그러나 바로 이때 송곳니 왕을 경악하게 한 광경이 있었으니, 비비안의 몸에는 번개에 맞은 듯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송곳니 왕의 공격이 원래부터 비비안이 아닌 허공을 찌르기라도 했던 것처럼.

비비안이 점차 송곳니 왕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위험하다!’

강렬한 위기감이 송곳니 왕을 엄습했다.

비비안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겠지!’

그녀가 들어 올린 백옥 같은 손 안에 왜곡된 공간의 칼날이 맺혔다. 다음 순간, 칼이 송곳니 왕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공간베기.

공간 차원에서 목표물을 베는 기술. 물체의 강도와 상관없이 아무리 단단한 대상이라도 단번에 갈라 버릴 수 있는 기술이었다.

푸확!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송곳니 왕은 허리를 경계로 완전히 두 동강이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융국의 송곳니 왕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이렇게 숨이 끊어졌다.

‘진짜 쓸만하잖아! 이게 바로 허공둔의 위력?’

허공둔, 허공으로 몸을 숨긴다. 이름 그대로인 무공이었다.

허공둔을 시전하는 동안 비비안은 전신이 공간마력에 뒤덮였다. 상대방의 눈에는 여전히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만, 사실 진짜 육신은 공간마력막 뒤로 격리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이때의 비비안은 정상적인 공간구조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 상태에서는 얼음, 화염, 바람, 번개를 막론하고 어떤 공격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상대방의 공격이 공간 차원에서 비비안을 비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직접 몸에 닿지 않으니 당연히 피해를 입힐 수도 없는 일. 반대로 비비안은 공간의 단검을 이용해 공간 너머의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허공둔의 본질은 일종의 신묘한 공간신법이었다.

이 무공을 능숙하게 익혀 공간의 단검과 함께 사용하면 적은 그녀를 공격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녀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동급 고수들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 버리고도 남을만한.

물론 허공둔이 완전히 천하무적인 건 아니다. 일반적인 공격은 무효가 되지만 정신, 영혼, 공간, 시간 등의 특수한 형태의 공격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다가 또다른 단점 한 가지, 그것은 허공둔의 성공 여부는 상대의 역량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면 천 번을 덤빈들 만 번을 덤빈들 비비안의 털끝 하나도 상하게 할 수 없다. 공격횟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걸 비켜 나가게 하는 데 더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번의 공격일지언정 그 파괴력이 공간장벽을 깨부술 수 있을 정도라면 비비안의 무공은 강제로 해제되고 만다.

비비안은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한 초심자이다. 지금 상태에서 자신과 마력이 비슷한 상대를 만난다면 허공둔이 중간에 해제될 게 확실했다.

하지만 몹시 안타깝게도 송곳니 왕은 비비안보다 마력이 한 수 아래였고, 그러니 공간무공을 깰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훗날 무공을 대성 단계까지 익힌다면 그때는 같은 경지 내에서는 어떠한 일반 공격도 그녀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방 마력이 그녀보다 3성이 높든 5성이 높든, 같은 경지 안이기만 하다면 모든 일반 공격은 무효화 될 테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공간무공의 무서운 점이었다.

“임무 완료!”

***

비비안이 송곳니 왕의 시체를 가지고 중주로 돌아왔다.

돌연 사라졌던 송곳니 왕이 30초도 안 되어 두 동강이 난 시체로 돌아온 모습에 대융국 군사들은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견융초원이 하나로 결집해 대융국을 이루려면 송곳니 왕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지고지상의 송곳니 왕이 사라진다면 그 즉시 온갖 견융 부족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난장판으로 변할 나라가 바로 대융국이었다.

그런데 송곳니 왕이 죽었다.그건 견융초원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퇴각하라, 퇴각하라!”

족장들은 더 이상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중주성에서 병력을 허비하느니 초원으로 돌아가 세력을 키우는 데 동원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송곳니 왕의 죽음과 동시에 대융국은 붕괴했다. 부족 동맹이 산산이 깨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게 과연 쉬울까.

“공간결박!”

견융족장이 한 걸음을 내디디기가 무섭게 주변 공간이 우지끈 일그러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이 그를 결박하려는 것 같았다. 이 역시 허공둔에 포함된 보조 비술이었다.

“제길!”

빠져나가려 애써봐도 이미 늦은 뒤였다.

공간을 찢고 바로 옆에 나타난 비비안이 공간참을 시전해 옴짝달싹 못 하던 그를 두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첫 족장이 죽자마자 비비안은 곧장 다시 모습을 감췄다.

‘빠르다!’

나머지 두 족장이 드디어 남하국에 공간을 조종하는 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족장은 마력을 분출해 주변 공간에 간섭파를 만드는 동시에 일정한 방향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공간결박에 걸려 습격당하는 걸 피하기 위함이었다.

비비안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교활한 놈들!’

모습을 드러내기 곤란한 처지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쫓아가서 붙잡아 들였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놈들이 이미 잔뜩 경계하기 시작한 이상 일격에 처치하기는 어려웠다. 비비안은 두 족장을 그대로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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