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
제424장 완전한 승리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대융국 군대는 궤멸 직전이었다.
첫 폭침으로 인한 사상자가 십만 이상, 이어진 무차별 폭격으로 죽은 수가 다시 십에서 이십만, 전방위적인 총격과 화살 세례, 계속되는 폭격까지 더해져 십만이 넘는 군사가 더 죽어 나갔다.
육십만 명 규모의 초대형 군단. 그중 살아남은 숫자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견융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와 무관하게 승산은커녕 발 디딜 곳조차 제대로 없는 판국이었다.
인간사에 유례가 없는 살상무기, 마력대포. 그 위력은 견융족의 사기와 자존심마저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번 전투는 견융족의 패배였다. 그것도 철저한 패배!
“이만하면 됐군.”
천제현은 더 이상 변수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연결선을 풀고 돌진한다. 포로는 불필요하다, 남김없이 몰살하라!”
천제현의 냉혹한 음성이 마치 사신의 그림자처럼 견융족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물론 천제현이 피를 즐기는 살인광은 아니었다. 그저 불필요한 동정심이 없을 뿐이었다.
대융국 병사들은 남하국 주력부대를 큰 폭으로 압도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살려둬 봐야 남하국에는 좋을 게 없었다.
그보다 육십만 명 규모의 부대가 단번에 몰살당한다면 앞으로 몇 년간은 감히 남쪽을 침략할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살육으로 또 다른 살육을 막겠다는 결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제현도 결국은 인간이 아닌가.
연결선을 제거한 남하국 군함들이 전방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력탄알과 화살이 새까맣게 쏟아져 나와 대융국 패잔병들의 목숨을 거둬들였다.
전장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되고 나면 진령급 고수 열 몇 명쯤이야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육십만 대융국 군단은 전원 사주호에 수장될 운명이었다.
“퇴각한다!”
왕천룡 역시 희망이 없음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빗발치는 화살과 총알 앞에서는 제아무리 왕천룡이라도 황급히 남궁령을 챙겨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병력을 모조리 잃는다 해도 대융국의 뒤에 장응국이 버티고 있는 이상에야 남하국 놈들이 감히 왕역까지 진격해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하면 될 일.
이 모습을 본 천제현이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빼시겠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전방 방위선이건 왕성이건, 아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데는 왕천룡의 공이 지대했다. 천제현이 제일 혐오하는 게 바로 배신자라는 부류였다. 하물며 천제현 본인과 기적상회에 막대한 피해를 준 놈이 아니던가.
“남궁령을 맡길 테니 왕천룡은 제가 잡게 해주십시오!”
천제현, 신풍후, 심빙우가 동시에 군함에서 뛰어내렸다. 천제현이 수면에 떠다니는 나무판자를 밟으며 쏜살같은 속도로 왕천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등 뒤에서 뽑혀 나온 유명검의 매끈한 날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순염참!”
눈부시게 타오르는 검광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뒤쪽에서 검기를 감지한 왕천룡이 재빨리 도약함과 동시에 허공에서 몸을 뒤로 틀어 창을 내질렀다. 창과 검기가 맞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충격파가 호수 표면을 강타했다.
튀어 올랐던 물방울이 후두두 떨어진 직후.
천제현과 왕천룡은 각각 수면에 떠다니는 부유물에 올라서 있었다. 대치 중인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삼여 장.
왕천룡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왕성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어마어마한 실력 향상까지. 천제현은 벌써 혼성 후기였다.
천제현이 검을 들어 왕천룡을 겨눴다.
“세상사 돌고 돈다더니, 왕역에서 이 몸이 쫓겨 다니는 꼴을 구경할 때는 꽤나 신이 나셨겠어? 이제 이자까지 쳐서 갚아줄 순간인 것 같은데!”
“네놈 주제에? 마력이 좀 강해졌다고 감히 내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왕천룡이 창을 슬쩍 쳐드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세찬 물보라가 일었다. 강대한 마력의 방증이었다.
“그 강시들 없이도 날 이길 수 있다 착각하는 건가? 죽어라!”
양손으로 창을 거머쥔 왕천룡이 천제현을 향해 쇄도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호숫물이 어느새 네다섯 마리 수룡으로 화해 천제현을 덮쳐왔다.
“염마변!”
뒤로 물러서던 천제현의 몸이 순간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덩치의 악마로 변신했다. 체내에서 발산된 강력한 마력의 화염이 달려들던 수룡들을 흔적도 없이 증발시켰다.
곧이어 거대한 불꽃의 검이 왕천룡을 과녁으로 내리꽂혔다.
검이 목표물에 닿기도 전에 주위 수면이 극랭의 검기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예전에는 긴 시간 유명화를 축적해야만 시전 가능했던 염마변을 이제는 즉시 발동할 수 있게 됐다. 천제현이 그만큼 많이 성장했다는 뜻이었다.
왕천룡이 타고난 능력은 기껏해야 천성하와 엇비슷했다. 당시 천제현보다 마력으로 한참 위였던 천성하도 무릎 꿇린 염마변을 왕천룡이 황급하게 막아보려 한들 쉬울 리가 없었다.
“교룡호체!”
왕천룡의 주위로 물안개가 자욱하게 일더니 수많은 황금빛 교룡이 빠른 속도로 그를 휘감고 돌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뒤엉킨 교룡의 형체가 금빛 방어막을 이뤄 왕천룡을 에워쌌다.
천제현의 검이 내리꽂히는 기세에 호숫물이 갈라지면서 뭉텅이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왕천룡의 몸에는 상처 하나가 나지 않았다.
“내 방어막은 절대 뚫지 못한다!”
왕천룡이 포효와 함께 내지른 창에 염마의 몸체가 완전히 꿰뚫렸다.
“빌어먹을 놈, 죽어라!”
염마의 몸체가 막강한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본 공화련이 입을 틀어막았다. 혼성 9성 정점은 실로 범접 못 할 경지였다.
‘천제현의 염마변을 강제로 해제하다니?’
염마변은 기령이 가진 힘을 모조리 끌어내 시전자의 몸과 융합시키는 기술이었다. 시전하는 동안에는 어마어마한 능력의 향상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염마변이 해제될 경우 천제현과 유명검은 일정 기간 평상시만 한 힘조차 발휘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한다.
그러나 왕천룡의 득의양양한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산이 흩어졌던 유명화가 소멸하기는커녕 모종의 힘에 이끌려 천제현에게 모여드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거대하던 염마가 7척가량으로 줄어든 모습으로 다시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팔뚝부터 무기에 이르기까지, 천제현은 유명화에 빈틈없이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흩어질 줄 모르는 화염이 마치 갑주처럼 그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지금의 천제현은 흡사 청백색 수정으로 조각된 생명체를 연상케 했다.
왕천룡의 동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건…….”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한 생명체의 몸에서 천제현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롭게 만든 초식, 염마변 제2태세다!”
신마구변을 바탕으로 창제된 염마변은 천제현과 기령 유명을 한 몸으로 합쳐 힘을 대폭 증강하는 비술이었다. 이후 마력이 한층 상승한 천제현은 자신이 기존에 만들었던 이 비술을 개량해 염마변 제2태세를 창조해냈다.
제1태세의 특징은 거대화에 따른 파괴력과 공격범위의 대폭 확대였다.
제2태세에서는 몸집이 줄어들면서 공격력과 파괴력은 일정량 하락하지만, 대신 순발력, 기동성, 방어력이 상승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같잖구나! 잔재주는 아무리 부려봐야 소용없다!”
왕천룡의 창이 천제현을 노리고 뻗어 나갔다.
“죽어라!”
언뜻 천제현의 신형이 휘릭 움직이는가 싶었다.
그리고 수면에는 물결만을 남긴 채 천제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굉음이 허공을 찢는 동시에 창이 지나간 호수 표면에 거대한 너울이 일었다. 하지만 장창은 천제현의 옷깃 끄트머리조차 스치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속도, 이미 음속을 초월했으리라.
왕천룡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와 비교해도 손색은커녕 오히려 더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했다.
‘고작 혼성 7성인 저놈이 어떻게 이런 속도를 낸단 말인가!’
쐐액!
뒤쪽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왕천룡이 황급히 창을 휘둘러 반격을 가하자 천제현은 곧바로 물러났다. 본격적인 육박전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왕천룡의 주력 무공은 방어계열, 원래부터 이동속도가 그리 기민하지 못했다. 그러니 날쌔게 움직이는 천제현에게 왕천룡의 공격이 먹힐 리 없었던 것이다.
천제현은 이미 왕천룡의 무공이 가진 약점을 간파했다. 왕천룡의 방어무공은 위력 자체는 뛰어났다. 진령 경지 고수가 아니고서야 뚫을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설사 천제현이라도, 적어도 혼성 7, 8성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 무공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체력 소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왕천룡이 쓰는 건 공격과 동시에 방어가 가능한, 강력하기로는 감히 범접 못 할 경지의 무공이었다.
그러나 그 방어력을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양의 마력이 들었다. 굳이 공격을 퍼붓지 않아도 시간을 끌며 마력이 다 떨어지기만 기다렸다가 일격에 격파하면 그만인 것이다.
왕천룡이 장창을 휘두르며 분노의 맹공을 가했다.
그러나 천제현은 속도 면에서 그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게다가 신식까지 한 수 위였기에 움직임을 미리 읽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왕천룡은 천제현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점점 시간이 흘러갔다.
천제현은 체력 소모가 거의 없었지만 왕천룡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왕천룡의 방어무공은 성광불멸체와는 달랐다. 성광불멸체는 피격 상황이 아닌 경우 마력 소모가 전혀 없다시피 하지만 왕천룡의 무공은 시전자의 마력을 시시각각 갉아먹었다.
애초에 장시간 대치용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더는 끌 수 없다!’
전세가 왕천룡에게 지나치게 불리했다. 이대로 계속 끌다가는 천제현에게 당하지 않더라도 남하왕의 부대에 포위될 판국이었다.
“네놈 모가지는 다시 가지러 오마!”
이를 갈며 소리친 왕천룡이 이쯤에서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세상사가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왕천룡이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돌연 물속에서 수많은 암홍색 바늘이 발사됐다. 바늘은 호신마력을 관통해 그의 몸에 빽빽하게 박혔다.
왕천룡이 비명을 질렀다.
강력하던 방어무공에도 구멍이 생겼다.
‘기회다!’
두 다리로 수면을 박차고 오른 천제현이 염마변 제2태세의 놀라운 속도를 바탕으로 유명노염참을 시전했다.
무시무시하게 빨라진 공격속도, 예리한 빛의 줄기 모양의 검광이 왕천룡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왕천룡이 눈을 부릅떴다. 공중으로 붕 떠오른 느낌이었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았다.
시야가 아래를 향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찬란한 검광에 머리가 날아간 몸뚱이였다.
‘내가 죽은 건가? 빌어먹을……!’
그게 바로 왕천룡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생각이었다.
천제현은 고작 혼성 7성의 마력으로 혼성 9성 정점의 상대를 해치웠다. 한편, 신풍후와 심빙우의 협공으로 남궁령 역시 깨끗하게 처리됐다.
두 배반자는 응징을 받았고 육십만 대융군은 전멸했다.
두 차례의 패전으로 남하국은 군사 백만을 잃고 왕성을 빼앗겼다. 왕역은 적의 손에 넘어갔고 대장군과 국왕마저 목숨을 잃었으나.
그 모든 치욕에 비로소 종지부가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