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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423화 (419/729)

# 423

제423장 전장의 악마

폭풍이라도 닥친 듯 사주호에 성난 파도가 몰아쳤다. 미리 대비하지 않았더라면 남하국도 무탈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먼 곳까지도 충격이 전해지는데 과연 폭발의 정중앙에 있던 대융국 군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천제현이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좋아, 좋아, 닻을 올려라. 일렬 진형을 유지하면서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저 앞쪽에서 물에 빠진 생쥐들이 기다린다. 포위하라!”

천제현의 명령에 남하국 함대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함 수백 척이 긴 띠 모양의 포위망을 이룬 채로 대융국 군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한나절이나 지났을까, 호수 표면을 빽빽하게 채운 잔해들이 포착됐다.

부러진 돛대, 박살 난 갑판, 찢겨나간 깃발.

수면은 온통 견융족 마수령의 시체였다. 살아남은 견융족 전사들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겠다고 부유물 주위에 한데 뭉쳐 있었다.

“어이, 들립니까?”

천제현이 공화련에게서 커다란 확성기를 넘겨받았다. 확성기를 통해 호수 전체로 퍼져나간 목소리는 당연히 견융족의 귀에도 들렸다.

“중주 구조대 대장 천제현입니다. 큰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천 리 길을 달려왔는데, 생각보다 훨씬 처참하군요. 마음 졸일 거 없습니다, 지금 바로 고통을 끝내드릴 테니까요. 노포와 활을 준비하라!”

대융국 병사들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망할 놈, 이리 비열한 수단까지 동원할 줄이야! 네놈 짓일 줄 알았다!”

왕천룡은 뒤집혀 반파된 군함 위에 몹시도 처량한 몰골로 서 있었다. 주변으로 견융족 병사 수백이 모여 있었다.

“송곳니 왕과 장응제국을 제대로 잘못 건드렸다. 넌 이제 끝이야, 똑같이 당할 날만 기다려라!”

천제현이 주변을 슥 살폈다.

왕천룡과 남궁령, 두 반역자는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운 하나는 기똥차게 타고난 모양이었다.

둘 다 남하국 지리에 익숙하니 송곳니 왕이 군대를 맡기기엔 최적임자였을 것이다. 그들 말고도 진령급 견융족 고수 하나가 눈에 띄었지만 한 명쯤이야 가볍게 무시해도 무방했다. 군단 전체가 이 꼴이 난 판국에 무슨 기력이 남아서 반항을 하겠는가.

하지만 송곳니 왕은 보이지 않았다. 동방건의 예측대로였다.

송곳니 왕은 공격로를 둘로 분산시켰다. 물길로 병력을 실어 나르는 동시에 산맥을 넘어 본성 기습을 시도한 것이다.

계획 자체는 나무랄 데 없었다.

보잘것없는 남하국 병력으로 사주호의 함대를 막아낸다면 본성을 지킬 여력은 절대 없을 것이요, 본성을 지켜낸다면 육십 만에 달하는 함대는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중주성 함락은 기정사실,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사라는 게 어디 그리 쉽던가.

천제현이 슬쩍 손 한 번 썼다고 육십만 대군이 모조리 물에 빠지고 말았으니, 초장부터 이래서야 어떻게 싸움이 된단 말인가.

확성기를 든 천제현이 이어서 소리쳤다.

“난민 여러분, 좀 출렁거릴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기겁한 대융국 병사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리고 천제현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맞부딪치는 순간 구름을 뚫고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척에 달하는 기적 비행선이었다. 그리핀 기사 부대가 비행선을 호위하며 옆에서 함께 날고 있었다. 기적 비행선의 등장과 동시에 만신창이가 된 대융국 함대의 머리 위로 중형 폭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연이은 굉음이 또다시 사주호를 뒤흔들었다.

수중에서 폭발한 폭탄은 인체의 오장육부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을 압력을 분출했다. 무차별 맹폭에 희생된 대융국 병사의 규모는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제길!”

“추락시켜!”

독응수 기병부대가 출격했다. 함대가 고전할 것을 우려한 송곳니 왕이 붙여준 부대였다. 그러나 독응수 부대가 미처 기적 비행선에 접근하기도 전, 마력기관총을 든 그리핀 기사들이 먼저 마중을 나왔다.

찰나의 순간.

수많은 빛의 탄알이 독응수 기병을 향해 날아갔다.

독응수 기병 따위가 그 맹렬한 화력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왕천룡이 분노로 치를 떨었다. 노기충천하기는 견융족장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에 다음 명령이 내려졌다.

“돌격, 무슨 수를 써서든 놈들의 전함을 빼앗아라!”

역시 용맹한 마수령 민족다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견융족에게는 저항의 의지가 남아 있었다. 남하국 군함을 목표로 병사들이 속속 물속을 헤엄쳐 달려들었다.

“여기까지는 입맛 돋우기였답니다!”

확성기 음량을 최대치로 높인 천제현이 외쳤다.

“이어서, 정찬을 대접하겠습니다!”

고폭발화살 백여 발이 호수를 향해 발사됐다. 고온의 화염에 뒤덮인 수면에서 불의 용과 물의 용이 한데 뒤얽혀 춤을 췄다. 강력한 충격파에 마수령들의 내장이 속속 터져나갔다. 한 차례 공격이 휩쓸고 간 수면은 물고기가 가득한 수조에서 폭탄이 터진 듯한 모습이었다.

“발사기 가동!”

기적상회 직원이 장방형 상자 여러 개의 뚜껑을 열었다.

발사기의 주둥이는 놀랍게도 벌집 구조였다. 기적상회 직원이 발사 버튼을 작동하자 폭탄이 한 뭉텅이씩 하늘을 향해 치솟더니 수면을 새까맣게 수놓으며 낙하했다. 곧 연속적인 폭발이 그 뒤를 이었다.

무시무시한 광경, 이걸 전쟁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보다는 일방적인 도살이 아닌가.

세 차례의 맹공격은 대융국이 대처할 새도 없이 연속적으로 이뤄졌다. 수많은 견융족 전사가 목숨을 잃었고 생존자 중에도 몸뚱이가 멀쩡한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굴의 대융국 전사들은 앞을 향해 죽기 살기로 물살을 헤치고 있었다. 마력을 방패로 충격파를 고스란히 받아내 가며 헤엄치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배를 빼앗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견융족의 실력은 남하국 군대와 비교 불가였다.

이들 중에는 정상급 혼성술사도 심심치 않게 섞여 있었다. 궁지에 몰린 야수는 위험한 법, 방심할 수 없었다.

함대와 견융족 전사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사격!”

남하국 사격수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화살과 빛의 탄알이 물속까지 파고들어 마수령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견융족이 맹렬한 집중포화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견융족의 시체만 급속도로 늘어가면서 호수 전체가 그들의 피로 물들었다.

바로 이때였다.

“크워엉!”

물속에서 견융족 고수 하나가 튀어나왔다.

군대를 따라온 진령급 족장이었다. 공중으로 솟구쳐오른 족장이 양손에 쥔 긴 칼을 내리쳤다. 번쩍하고 날아간 검광이 호수를 양쪽으로 가르며 백여장 이상을 쏘아져 나가 군함에 명중했다.

콰앙!

강력한 충격에 일렬로 늘어섰던 함대 대열이 흐트러지는 한편. 군함 한 척이 검기에 맞아 세 동강이 났다.

모두가 경악했다.

길이만 해도 십여 장, 어지간한 고층 건물보다 큰 부피의 배가, 그것도 어느 선박보다 더 견고하게 만들어진 군함이, 한 방에 동강 난 것이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위력이었다. 역시 견융족 고수는 달랐다.

“돌격! 견융의 용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견융족 족장이 악에 받쳐 포효했다.

“놈들과 끝장을 보자!”

견융족 사상자 수는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마수령은 벼랑 끝에 몰릴수록 핏속에 흐르는 야만성이 끓어오르는 종족이었다.

견융족 고수들이 기를 쓰고 마력을 끌어내 물 위로 솟구쳤다. 수면에 떠다니는 파편을 디디며 남하국 군함을 향해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물결 위를 걷는 물거미 떼를 연상케 했다.

상처 입은 마수는 역시나 위험했다. 견융족은 이미 남하국 군대와의 공멸을 각오한 상황. 육십만 견융족 전사 중 물고기 밥이 된 게 절반 이상이었지만, 나머지 숫자가 전력을 다한다면 그 역시 결코 만만히 볼 전력이 아니었다.

“큰아가씨, 마력대포 가동해요!”

일찌감치 대기하던 공화련이 사령함에 설치된 마력대포를 가동했다. 진귀한 3급 금속으로 제작된 마력대포의 매끈한 은빛 몸체에는 주문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섬세한 구조는 대포를 언뜻 예술품처럼 보이게 했다.

“빙우 누님, 포탄요!”

심빙우가 팔뚝보다 굵은 포탄을 휙 넘겨줬다.

천제현이 포탄을 장전하자 마력대포 표면의 무늬가 일순 번쩍 빛을 발했다. 포의 내부에 강력한 마력이 뭉치는가 싶더니 포문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쏘아져 나갔다.

육안으로 진령급 고수의 속도를 따라잡기란 몹시 어려운 일.

마력대포는 위력적인 무기였지만 천제현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일단 한 번 실패해서 상대방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나면 다시 기회를 얻기란 몇 배로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니 첫발에 명중시켜야 했다.

‘심등이여, 타올라라!’

신식을 이용해 목표물을 포착한 천제현이 즉각 마력대포를 발사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포탄이 튕겨 나왔다. 작열하는 백색 섬광이 음속의 수배에 달하는 속도로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 진령급 고수에게 명중했다.

엄청난 속도, 빨라도 너무 빨랐다.

견융족 족장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백색 섬광이 지나간 뒤, 족장의 몸뚱이 절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진령 경지의 고수가 괴상한 무기 한 방에 끝장나다니!’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처리방식이었다.

견융족만이 아니라 남하국 병사들도 눈앞의 광경에 넋이 나갔다. 남하국 같은 소국에서는 나라 전체를 통틀어도 진령급 고수 몇 명을 찾기가 힘들었다.

병사들의 눈에 그들은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천제현이 고작 보름도 안 걸려 만들어낸 무기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심빙우가 포탄 하나를 더 건넸다.

견융족에게 시간을 줄 필요는 없었다. 마력 포탄을 장전한 천제현이 곧장 포문을 수면으로 돌렸다. 발사진법을 발동하자 포신이 불을 뿜는 동시에 두 번째 마력파가 발사됐다.

콰앙!

수십만 도에 달하는 고온에 호숫물 상당량이 증발했다. 무시무시한 마력파가 일으킨 두 번째 폭발로 견융족 전사 수백이 목숨을 잃었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용맹한 전사라도 제정신을 잡고 있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견융족 용사들의 눈에 천제현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였다.

무서운 전장의 악마, 잔혹한 살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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