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0
제420장 결전의 시작
“난 반드시 임무를 완성할 거야!”
비비안은 허리를 쭉 펴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선언하듯 말했다.
공화련은 비비안이 이미 자신의 역할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천제현은 비비안을 기적상회의 첫 번째 공간 기술자로 삼을 계획이었다.
공서련도 복제 정령 덕분에 공간 능력을 지닐 수 있지만,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간 연구에 직접 참여하진 못하고 보조적인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공화련은 자원 지원을 맡아 가능한 빨리 완벽한 공간창고를 만들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비비안이 흥분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었다.
일족의 분노와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역만리 남하국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비비안은 오랜 시간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침내 목적지를 찾은 여행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천제현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기로 맹세했다. 엘프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지만, 자손대대로 유익한 일을 하는 거라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공간창고가 만들어지면 일족들이 깜짝 놀라겠지!’
그녀는 엘프 마을에 공간창고를 지을 계획이었다. 공간창고의 장점을 직접 체감하게 하면 그 누가 헛소리를 하겠는가. 엘프에게 공간창고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것이거늘.
엘프들은 외부 세상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삶의 질을 높이고 싶은 열망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앞으로 엘프들은 외부와의 접촉 없이 공간창고와 통신설비를 통해 원하는 재료와 물자들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공간창고에 마석을 넣고 전송하기만 하면 값을 지불할 수 있으니까. 이 얼마나 편리하고 놀라운 일인가.
엘프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화로운 삶을 해치지 않으면서 일족의 수많은 특산품을 팔 수 있고, 게다가 외부 세계의 풍부한 자원까지 이용할 수 있다니. 엘프는 이를 통해 더 부유해지고 강해질 것이며, 생활은 더욱 다채로워지리라.
그 아무리 고지식한 엘프라도 이 좋은 일을 거절하진 못할 것이다.
비비안의 노력으로 엘프가 공간 기술을 사용하는 첫 번째 종족이 된다면, 그녀는 엘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우게 될 것이다. 뭐든 앞서 나가는 사람이 최대 수익자가 되는 법이니까. 다른 종족들이 이 기술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녀의 일족은 한 발 앞서 부강해질 것이다.
비비안은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부왕이 친히 온다 해도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천제현을 바라보는 비비안의 눈빛은 신을 보는 것 같았다.
“네가 공간까지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넌 못하는 일이 뭐지?”
“제가 대단한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이 마력진은 공간을 창조하는 게 아니에요. 공간을 빌렸을 뿐이죠.”
천제현은 헤헤 웃었다. 엘프의 존경을 받는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지금 그에게 급한 일은 공간 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공간을 창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3급 마력진으로는 부족해요. 지금처럼 공간을 빌리는 것만 가능할 뿐이죠.”
“빌린다고? 그게 무슨 개념이지?”
“공간 개념은 심오한 거예요.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배울 수는 없죠. 일단은 시간이 있으니까 간단하게라도 설명해 줄게요.”
천제현은 땅 위에 그려진 공간 마력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뜻 보면 이 마력진으로 저장 공간을 창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아공간을 잡아와 이용할 뿐이죠. 그 아공간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고요.”
천제현은 세 사람에게 기초 공간 개념을 설명해 주었다.
이 세상은 거대한 기포와 같다. 혼돈의 시대가 붕괴한 후, 그 거대한 기포는 수없이 많은 작은 기포로 갈라졌고, 그 작은 기포들은 또 서로 분리되어 수많은 차원을 만들었다.
각각의 독립된 기포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초미세 기포들이 붙어 있다.
그 초미세 기포들 중 극히 일부는 발달하여 성숙한 공간구조를 이루는데, 그런 공간이 발견되면 비경으로 개조되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미세 기포는 그 크기가 너무나 작은 관계로 완전한 공간을 이루지 못하고 생명을 수용할 수 없는 아공간이 되고 만다.
공간창고는 바로 그 아공간을 이용한 기술이었다.
즉, 마력진을 통해 아공간을 포착, 고정하고 아공간과 연결되는 통로를 열어 저장 공간으로 사용하는 기술인 것이다.
“그렇구나.”
세 사람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천제현에게는 아주 기초적인 공간 지식에 불과했지만, 세 사람에게는 너무나 선구적인 지식이었다. 그녀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접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공간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력진을 폐쇄해도 그 안에 저장한 물건은 사라지지 않아요. 필요할 때 언제든 다시 마력진을 열어서 사용할 수 있는 거죠!”
공화련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엄청난 기술이야!”
공화련은 방금 비비안이 연 아공간을 보면서, 그것을 유지하는 과정에 엄청난 마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력기둥 네 개가 순식간에 반 이상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마력 자원 가격은 꽤 저렴한 편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사용하기는 힘들 듯했다.
마력이 고갈되어 공간창고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큰일 아닌가. 또한, 습격을 받거나 고장이라도 난다면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은 전부 못 찾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원리를 이해한 다음에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 공간 기술의 개발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 용도는 무궁무진하리라.
천제현이 말했다.
“이 기술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아직 해결할 문제들이 많아요.”
공서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엔 완벽한 것 같은데? 왜 당장 사용하지 않는 거야?”
“무엇보다도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이 시급해요!”
천제현이 설명했다.
“첫째,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아공간이 존재하는데 전부 크기가 달라요. 이 마력진으로 소환하면 변수가 너무 많을 거예요. 이번에 연 건 이 공간, 다음번에 여는 건 저 공간 이런 식으로요. 제대로 공간을 식별해내지 못한다면 이 기술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렇구나. 그럼 두 번째 문제는 뭐야?”
“두 번째 문제는 기술이 보급된 후에 나타날 거예요. 바로 불법 공간 소환 문제죠. 우리의 공간창고를 다른 사람이 도용해서 연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물론 기술적으로도, 확률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미리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어요.”
천제현은 공간 기술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전력을 다해 기술의 완성도를 높일 생각이었다. 공간 기술은 지금까지 그가 개발한 기술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다른 기술들은 대부분 초급기술이었으므로 다른 기술로 대체가 가능했지만, 공간 기술만은 대체 불가능한 최첨단 기술이다.
원래 천제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이 공간 기술을 직접 개발할 계획이었다.
공간 기술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진령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데 아지 혼성 술사에 불과한 천제현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엘프는 기적상회의 전략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가.
초보적인 공간 기술을 비비안에게 전수해 줌으로써 향후 엘프와의 관계 구축에 포석을 깔아두는 것도 좋은 전략이었다.
비비안은 마력이 강한데다 공간에 대한 재능도 있고 무엇보다 엘프 공주였다. 성격 또한 순진하므로 기적상회의 전략적 목표는 물론, 여러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였다.
천제현은 비비안을 보며 말했다.
“뛰어난 공간 기술자가 되고 싶으면 반드시 아공간을 찾는 법부터 배워야 해요. 그 다음에 아공간을 표시하고 개조하는 거죠. 오늘부터 기초 공간학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 줄게요. 기적상회의 첫 번째 공간창고도 공주님 것이 될 거예요!”
비비안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대륙의 첫 번째 공간 기술자! 그게 나라니!’
비비안은 기쁨과 흥분을 주체 못해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정하자. 진정해야 돼. 지금 난 기적상회의 주요 인사라고. 천제현도 이렇게 중요한 기술을 철 없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하진 않을 거야!’
천제현은 억지로 행복감을 억누르고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직고 있는 어린 엘프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계속 기초 공간학 지식에 대해 설명할게요. 무리하지 말고 배울 수 있는 데까지만 배우세요. 이해가 잘 안 되면 큰아가씨한테 물어 보고요. 큰아가씨의 정령은 아주 특별해서 학습능력이 공주님의 백배는 되거든요. 공주님이 못 알아듣는 말도 큰아가씨라면 이해할 거예요.”
그런데 천제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리핀 기사 한 명이 허둥지둥 뛰어들어왔다.
“진국군 마마와 운몽후 마마를 뵙습니다! 긴급 상황입니다! 폐하께서 두 분을 부르십니다!”
공화련은 갑작스러운 일에 살짝 당황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리핀 기사는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융국 함대가 움직이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결전이 시작되려는 듯합니다!”
“때 한 번 잘 잡네!”
천제현은 답답한 듯 고개를 젓고는 비비안에게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며칠간 좀 바쁠 것 같네요. 수업도 미뤄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젠장! 젠장! 젠장! 망할 마수령 놈들! 왜 하필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 문제를 일으키느냔 말이야! 열 받아 죽겠네. 모조리 쓸어 버릴 거야!’
공화련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엘프 공주를 보며 살짝 걱정이 되어 한 마디 했다.
“남하국은 대융국과 곧 전쟁을 하게 될 거예요. 이 전쟁은 아주 위험한 전쟁이 될 거고요. 중주성 전체가 전쟁터가 되겠죠. 공주님은 외부인이니 이 전투에 말려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며칠 피해 있다가 일단락되거든 다시 오시는 게 어때요?”
“그건 말도 안 되지! 난 이미 기적상회 사람인데!”
지금 비비안이 가장 걱정하는 건 마수령과의 전투로 인해 기적상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공화련이 다시 한 번 권하려고 입을 여는 걸 본 그녀는 잽싸게 말을 끊었다.
“그만해. 이번에는 나도 모두와 함께 마수령을 칠 거야. 사실 오래전부터 마수령 놈들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볼 때마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
비비안은 강경하게 전투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천제현으로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느냐고? 웃기는 소리!
천제현이 설마 엘프는 싸움조차 할 줄 모르는 선한 존재라고만 생각했겠는가.
엘프의 본성은 때 묻지 않고 선량했으나, 그 선량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동족에게만 통용되는 얘기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 수많은 종족들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아 영광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만 봐도 그들이 시골뜨기처럼 순진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수많은 종족들이 엘프에게 원한을 사 멸망하곤 했다. 적으로서의 엘프는 자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잔인한 종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