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
제413장 중대한 결정
황혼 무렵, 비취빛 숲 위로 따뜻한 노을이 비춰졌다. 수명이 긴 엘프들은 늘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고, 수련에 힘을 쏟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꽃과 나무를 가꾸거나 조각이나 음악 등 예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때, 한 나이 든 엘프가 책 두 권을 들고 공주의 나무집 부근을 지나다가 순찰병에게 물었다.
“비비안 공주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거지? 늘 돌아다니기 좋아하시는 분인데!”
“몇 분전에 나오셨다가 다시 나무집 안으로 들어가셨어요.”
“재미있는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으니 화가 단단히 났겠지. 그래도 늘 그랬듯이 이틀 지나면 괜찮아 질 거야. 지금 괜히 건드렸다가는 큰일이라네.”
“저희도 알아요!”
나이 든 엘프는 나무집을 한 번 올려다 본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를 떠났다.
사실 비비안은 이미 부족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마을에서 사라진 뒤였다. 비비안은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자신의 공간 능력을 발휘해 마을에서 벗어났다. 단시간에 멀고도 먼 숲과 산봉우리들을 넘고, 여러 위험한 곳을 지나 북으로 향하던 그녀는 결국 남하국 남주의 변경 지역에 도착했다.
“저 앞이 바로 인간의 나라인가?”
날은 이미 저물었다. 비비안은 산꼭대기에서 발끝을 세워 저 멀리 전방을 바라보았다. 남하국이 남방 변방에 세운 초소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자, 공주는 내심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도 부족 어른들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생명으로, 외모나 성품이 제각각이라 했다. 영화 속 공서련 공주처럼 천하에 아름다운 여인도 있지만, 적월교주처럼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못생긴 자도 있다. 영화 속 천제현처럼 정직하고 공명정대한 용사가 있는가 하면, 교활하고 간사하며 악독하기까지 한 나쁜 놈들도 있다.
이렇게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 동시에 나타나는 종족은 없었다. 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인간은 복잡한 종족으로 여겨졌고, 또 그래서 그들이 만든 영화가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다.
인간 중에도 좋은 사람이 많다고는 하지만, 엘프들은 보통 인간 대부분이 탐욕스럽고 간사하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엘프는 인간들에 대해서 그리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 역시 엘프가 인간과 단절되어 왕래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비안 공주 역시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인간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아주 흉악무도하고 간이 큰 인간 악당들이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인간 귀족들은 욕정을 채우기 위해 엘프 부족을 공격하고 엘프 부족의 미소녀들을 납치한다고도 했다.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천제현만 아니라면 비비안은 인간과 접촉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하국은 약하고 힘없는 소국에 불과하며, 그중 최고 강자인 남하국 삼군이 힘을 합쳐도 그녀와 겨룰 실력이 안 된다는 사실을 공주는 몰랐다. 대륙에서도 아주 희귀한 공간 능력을 가진 그녀다. 대륙에서 그녀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공주는 계속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선 낭떠러지 근처에 이끼가 가득 낀 돌 위에 앉았다. 공주는 품속에서 자음기를 꺼내 조심스럽게 조절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기서도 신호가 잡히는지 모르겠네, 에라, 모르겠다, 한번 해보지 뭐!”
“츠츠츠!”
“츠츠츠츠!”
자음기에서 이상한 잡음들만 계속 들려왔다.
공주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거리가 너무 먼 것일까?’
공주가 답답해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자음기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가볍고 즐거운 음악이 자음기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와아아, 진짜 들리네!”
공주는 팔짝 뛸 정도로 기뻤다. 다른 방송국 채널로 돌리자 여러 방송국의 소리가 잡혔다.
“천제현은 진짜 대륙 제일의 기재구나. 이런 위대한 물건을 발명하다니, 정말 대단해!”
비비안은 기뻐서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주는 기적 방송국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내용을 찾기 시작했다.
기적 방송국 신호는 중주에서 나오기 때문에 방송 내용은 대부분 중주의 소식이나 정보를 전달했다. 인간 세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비비안에게는 시시한 내용도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인간은 큰 영화관을 지어서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영화를 보는구나! 우리 부족도 이런 영화관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그 녀석들이 내 상영기를 뺏어가지 않을 텐데!”
비비안 공주는 다시 자음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천제현이 통신 시설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 대단하다, 대단해! 천제현이 또 통신기 같은 걸 발견한 거야? 몇만 리 떨어진 곳에서도 언제든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역시 이 비비안 공주님이 숭배할 만한 인물이군. 엘프 부족에게 이런 물건이 있으면, 엘프 의회 간의 연락도 그렇게 번거롭지 않을 텐데!”
비비안 공주는 호기심 많은 탐구자 같았다. 그녀는 칠흑같이 어두운 외딴 산봉우리에 홀로 앉아 인간 세계에서 전해지는 모든 소식을 긁어모으는 데 열중했다. 숲에서 벗어난 적 없었던 공주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고, 비비안 공주의 세계관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오늘처럼 이 세계를 명확하게 관찰하기는 처음이었다.
하늘이 점점 밝아왔다.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데…….’
비비안 공주는 조심스럽게 자음기를 주머니에 넣은 후, 낭떠러지에서 몸을 훌쩍 날려 순식간에 공중에서 사라졌다. 색다른 경험을 한 그 날 밤 이후, 비비안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밤 엄청난 힘을 쏟아 몰래 남하국 변경까지 가서 남하국의 소식을 듣는 취미가 생겼다.
엘프는 여러 가지로 개방적이었지만, 오직 외부 세계와의 접촉만큼은 금했다. 그중에서도 인간과의 접촉은 금기였다. 비비안의 이런 모습이 발각이라도 되면, 그 뒷감당은 장난이 아닐 것이다.
이건 엘프 최고 금령이다. 엘프 의회까지 흔들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비비안은 그렇게 많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신비한 세계의 유혹을 막을 수 없었을 뿐이다.
밤에 또 다시 남하국 근방까지 간 비비안 공주는 이제 좋아하는 내용을 들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적상회 창시자 천제현의 성장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 나왔고, 그중에서 ‘천맹’ 구성원에 대한 관점과 평가가 쭉 이어졌다. ‘천맹’은 남하국에서 천제현을 숭배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기에, 자연스레 공주의 관심을 끌었다.
“천제현이 이렇게 전설적인 인물이라니!”
공주는 천제현이 예전에 중주성 천씨 가문의 버림받은 자로, 부모는 모두 죽고 노예로 전락한 그가 우연히 공서련과 만나 결국 세상을 떠돌며 여러 경험을 쌓아 이런 사업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 이야기가 영화 속 이야기보다 더 전설 같아!”
공주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천제현이 나중에 어떤 업적들을 이루었는지 들으면서 공주는 더욱 탄복해 마지않았다. 나무 엘프 중에서도 가장 반항적인 공주는, 고집스럽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며 강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천제현의 성격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그는 화려한 재능도 갖고 있지 않은가.
“대단하다, 대단해! 과연 영화와 자음기를 발명할 만한 인물이야!”
며칠 동안 관심을 기울이면서, 공주는 천제현과 기적상회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기적상회의 고위급 인물이 누구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등 속속들이 꿰게 되었다. 그녀는 이미 기적상회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렇게 즐겁고 긴장된 시간은 빠르게 흐르게 마련이다. 태양이 또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주는 아쉬워하며 자음기를 챙겨 부족으로 돌아가 내일을 기약하려 했다.
이때.
기적상회의 작은 광고 하나가 공주의 주의를 끌었다.
“평범한 직업에 지치셨나요? 열정이 없는 삶에 따분한가요? 단조롭고 반복되는 삶이 막막하기만 한가요? 기적상회 문객집단 초문이 인재를 초빙합니다. 신분, 지위, 마력 수준, 나이, 출신 중 어느 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뛰어난 재주 하나, 그것만 있다면 기적상회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함께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위대한 기적 왕조를 만들어 갑시다.”
그 순간, 비비안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엘프는 수명이 최소 500~600년은 될 정도로 길다. 마력이 강하면 천 년도 살 수 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만큼, 엘프는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비비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륙에서 뛰어나기로 손꼽히는 지혜로운 종족이 어째서 산속 깊이 들어가 은거하고 있을까? 만약 엘프가 천제현처럼 자신의 지식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면 더 나은 선택이 아닌가? 만약 대륙에 나가 재능을 펼치며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대한 공적을 세운다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지 않겠나!’
비비안은 한숨이 나왔다.
너무 아쉬웠다. 엘프의 계율은 아주 엄격했다. 장로들은 엘프가 세속적인 싸움에 동참하며 이익을 좇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비비안은 그 고지식한 어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장로들이 알게 된다면, 그녀는 8년이고 10년이고 연금에 처해질 것이다.
비비안은 자음기를 끄고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부족으로 돌아갔다.
처음으로, 엘프 대대로 전해져 온 굳건한 철칙에 의문이 생겼다.
다음 날, 비비안이 계속해서 내용을 듣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방송국에서 나오는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두 북방 지역의 전시 상황에 대한 보도였다. 남하국 북방에 마수령이 침입해 왕국 수도마저 함락됐다는 내용이었다.
‘흉악한 마수령이! 참으로 끔찍하구나!’
혼돈의 숲에도 많은 마수령이 살고 있다. 마수령은 강도의 대명사로, 좋은 놈은 찾아볼 수 없다. 남하국마저 마수령에게 괴롭힘을 받다니, 공주는 천제현이 남하국에서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이후 며칠 동안 공주는 계속 방송국을 통해 전시 상황을 주시했다.
그날 밤 기적상회 방송국에서는 긴급 방송이 나왔다.
“기적상회 총회장 천제현님이 전선에서 마수령 강자와 싸우던 중 중상을 입었습니다. 현재 선천적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2급 선약 하나가 필요합니다!”
‘뭐라고? 천제현이 중상을 입어?’
비비안은 조급해 졌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그녀는 나무집으로 돌아가 밤새 생각했다. 천제현은 지금 매우 위급한 상황이고, 도움이 필요하다. 비비안 공주라면 충분히 도울 수 있다. 만약 약을 가지고 만나러 간다면, 분명 그는 감격할 테고, 비비안 공주는 이번 기회에 천제현을 알게 된다.
다만 이렇게 할 경우 매우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비비안 공주는 엘프의 본분을 열심히 지키는 그런 공주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그녀는 바로 행동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