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
제411장 비비안 공주
세 개의 교지 중 두 개는 기적상회의 일원에게 작위를 하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천제현은 군 작위에 다시 제후의 작위를 하사받은 실권을 장악한 최고의 제후가 되었다. 이는 남하국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천제현 이외에 공화련도 제후에 올라 사방후가 관할하던 남주군단을 맡게 되었다. 공화련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남하국에서 최초의 여성 제후가 되었다.
이번 결정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삼대 가문은 왕성과 함께 몰락했다. 나머지 세도가도 도망치거나 견융족에 투항했으니 누가 이 일에 토를 달겠는가.
남하국의 제후 중에 새로 책봉된 운몽후 공화련을 제외하고도 청목후와 금전후, 신풍후는 모두 천제현의 측근이었다. 대학자 고천추를 필두로 한 학자들도 천제현의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왕성인 중주는 천제현의 근거지였다.
이런 까닭에 제후들부터 백성들까지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냈다. 천제현이 중용된 것은 남하국에 아주 좋은 일이었다.
동방건은 교지를 반포한 후 천제현을 만나러 운문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운문에서 소식이 왔다. 요 며칠 과로한 나머지 천제현의 상처가 재발하여 업무를 내려놓고 쉬어야 한다는 소식이었다. 기적상회와 남하국은 모두 크게 당황했다.
무안군이 어렵사리 왕위를 수락했는데 이제 천제현에게 문제가 생기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중주의 백성들에게 천제현은 무안군만큼 중요했다. 천제현만 있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천제현이 쓰러졌으니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했다.
‘이를 어쩌면 좋나?’
‘약을 구해야 한다!’
공화련은 기적상회를 총동원하여 선약을 구하려 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기적상회에서 천제현을 치료하기 위해 선약을 사들인다는 소식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
10여일 전 아직 왕성이 함락되지 않은 시기.
엘프 아비숑이 용응수를 타고 남하국 왕성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아비숑은 중주와 청주, 남주를 거쳐 끝없이 펼쳐진 원시림에 도착했다.
원시림은 수만 리가 넘게 산과 숲으로 덮여 있고 한 번도 문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황량한 곳이었다.
아비숑이 흉수의 영공으로 돌진했다. 주위에서 경고와 적의가 담긴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보란 듯이 지나갔다. 그러나 흉수들은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흉수들은 지능이 낮지만 강자를 잘 알아봤다.
실력이 가늠조차 안 되는 아비숑은 차치하고 그가 타고 있는 용응수는 실력이 막강한 3급 마수였다. 용응수는 두 날개를 펼치면 4장이 넘고 온몸이 붉은 비늘로 덮여 있지만, 매의 머리에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다. 용응수가 내뿜는 사나운 기운에 흉수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겹겹이 쌓인 산을 넘어서자 다시 문명의 흔적이 보였다. 아비숑이 비취빛 숲의 상공에 도착했다. 그곳은 숲이기는 하나 다른 숲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아름다운 빛깔의 숲에는 왕성한 생명력이 서려 있었다. 이곳의 모든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닌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장장 백 리가 넘는 숲에는 아름드리 거목이 가득했다. 나무는 인간 세상의 마천루 같았다. 나무 구멍은 창으로 개조되었고 정교한 나무집들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아비숑 장로야.”
“아비숑 장로가 돌아왔다!”
용응수가 숲을 저공비행하며 엘프들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엘프들은 용응수 위에 탄 인물을 보자 바로 안심하여 수중의 활을 내려놓고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엘프들은 숲과 하나가 되어 살기 때문에 일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웠다. 아비숑이 상공에서 몸을 날렸다. 그는 가벼운 나뭇잎처럼 무성한 나뭇가지를 지나 덩굴을 타고 양탄자가 깔린 것처럼 부드러운 잔디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아비숑 장로,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래, 최근 별일은 없었나? 북부의 식인마는 아직 잠잠한가? 남부의 리저드는 어떻지? 난폭한 산령거인은 깨어나지 않았나?”
“걱정 마십시오. 평소와 같습니다.”
나무에서 엘프들이 하나씩 나비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튀어나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엘프는 인간과 다르다. 특히 외모와 체형에서 차이가 크다. 사람은 뚱뚱하기도 하고 비쩍 마르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니기도 하고 악귀처럼 추하기도 하다.
그러나 엘프들은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못생기지도 않았다. 엘프 여자가 인간 세상에 온다면 절세미인에 속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엘프는 대륙에서 미남미녀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종족 중 하나였다.
아비숑은 특별한 신분 때문에 부족 내에서 인기가 높았다. 엘프는 폐쇄적인 종족이라 대다수의 엘프들은 속세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엘프는 외부세계와 단절된 생활을 하였다.
아비숑은 각지를 돌며 부족을 위해 주변 나라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한 번 나갈 때마다 1~2년을 돌아다니며 부족을 위해 여러 국가의 흥미로운 사건이나 풍습, 인심을 전해주었다. 그리하여 엘프 어린이들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아비숑이 매우 친근하게 인사했다.
“모두 잘 있었니?”
“와, 아비숑 아저씨!”
이때 은방울 같이 경쾌하고 듣기 좋은 음성이 울렸다.
“돌아왔군요.”
그 음성은 아비숑에게 악마의 목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비비안 공주님 아니세요. 일 년 동안 못 뵌 사이에 더 예뻐지셨군요.”
아비숑이 고개를 들자 가늘고 예쁜 종아리가 보였다. 옥을 조각한 예술 작품처럼 하얗고 긴 종아리는 나무에 걸린 그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언제 왔는지 아비숑의 능력으로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이 너무 익숙했다.
그 소녀는 매우 아리따운 엘프로 열두세 살 먹은 사람처럼 보였다. 소녀는 나뭇잎으로 엮은 치마를 걸치고 암녹색 머리에는 섬세하면서도 예쁜 화관을 쓰고 있었다. 숲의 신선처럼 아름답고 깜찍한 외모였다.
이 엘프 소녀는 엘프 중에서도 빼어난 미녀였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세요!”
비비안 공주가 흔들리는 그네에서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왔다. 비비안이 손에 든 과일을 깨물자 과즙이 사방에 튀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아비숑을 쳐다보며 우물우물 말했다.
“제 선물은 어디 있어요?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아비숑이 급히 땀을 훔쳤다.
“비비안 공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잊을 리 없죠. 이번에는 분명히 좋아하실 겁니다.”
“거짓말 하시면 안 돼요!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저번에 어떤 대형 전국의 국보이자 고대 천족이 남긴 보물이라고 주신 선물은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이번에는 인간족의 소국을 지나다가 매우 재미나는 물건을 발견했어요. 값나가는 건 아니지만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공주의 비취 같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거렸다. 그녀는 값나가는 물건이 아닌 재미있는 게 필요했다. 아비숑이 상영기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이건 거울이잖아요!”
“이건 상영기라고 해요. 음성과 화면을 저장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매우 독특하고 재미있어요. 제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 드리죠……. 이것 말고도 많이 있어요. 자음기, 마력등, 통조림 음식 등, 분명 마음에 드는 게 있을 겁니다.”
비비안 공주는 흥미를 느꼈다.
“그럼 가져가서 해볼게요.”
공주가 한 손으로 상영기를 들고 나머지 물건은 저장반지 주머니에 넣었다. 아비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공주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째려봤다.
“별로 신기하지 않거나 재미없으면 아저씨 정원에 가서 화초들을 전부 뽑아 버릴 거예요!”
아비숑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화초들은 그의 보물이었다.
공주는 아비숑에게 대꾸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몸을 흔들어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비숑은 입을 열었지만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남하국에서 가져온 신기한 물건들이 말광량이 공주 마음에 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아비숑도 따라가지 못할 매우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몇 호흡 만에 공주는 자신의 나무집으로 돌아갔다.
“어서 와서 봐!”
“공주님이 또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오셨네.”
공주가 나무집으로 돌아오자 엘프들이 몰려들었다.
그 엘프들은 대부분 공주보다 많이 어렸다. 몇몇 엘프는 인간으로 치면 네다섯 살밖에 안 되는 아이처럼 보였다. 엘프들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 언니, 이게 뭐예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인데!”
공주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엘프들 사이에 섰다. 아이들을 거느리는 골목대장 같은 모습이었다.
“이 물건은 인간 세계에서 가지고 온 거야. 나도 처음 보는 것이니 너희는 당연히 본 적이 없겠지.”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서두르지 마. 내가 천천히 연구해 볼게!”
“이건 뭐지? 좋은 냄새가 나는데.”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엘프가 통조림을 만지작거렸다.
“먹는 건가?”
“먹보, 먹는 것밖에 모르지!”
공주가 설명했다.
“아비숑 아저씨가 이건 인간들이 먹는 통조림이라는 음식이라고 했어. 맛이 아주 좋대. 많이 가져왔으니 나눠 가지자.”
공주는 매우 호탕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모두 그녀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얼마 후 공주는 아비숑이 가져온 통조림 몇 백 개를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었다.
탁!
공주가 통조림 하나를 열자 강렬한 향이 퍼졌다. 공주는 통조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인간도 마수고기를 능숙하게 요리할 수 있단 말이야?’
그녀는 대륙에서는 오직 엘프만이 마수고기를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음음, 맛있어. 너무 맛있어!”
엘프 아이들 모두 통조림을 맛나게 먹었다. 엘프도 마수고기를 요리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평소에 채소를 주로 먹어서 고기 요리는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엘프들은 기적상회의 마력 요리기술에 인간족의 조미료를 배합한 음식을 입맛을 다셔가며 맛있게 먹었다.
“정말 그렇게 맛있어?”
공주가 불곰고기 통조림을 열었다. 육질이 부드러워 입에 감기고 쫄깃쫄깃했다.
‘이거 정말 매우 독특한 요리군.’
공주는 국물까지 남김없이 들이키다가 갑자기 후회했다.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으면 다른 엘프들에게 나눠주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체면 때문에 다시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주님, 이 상영기는 어떻게 작동시키는 거예요?”
“내가 해볼게!”
비비안은 아비숑이 가르쳐준 대로 상영기를 작동시켰다. 수십 개의 반짝이는 눈이 동시에 상영기로 향했다. 유리거울처럼 완전 반사되는 표면에 갑자기 빛이 나면서 화면이 나타났다.
“와!”
겁 많은 엘프들이 놀라서 도망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거울 안에 다른 세상이 보이지?”
“세상에,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차원의 거울인가? 그건 혼돈시대의 신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