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
제408장 최후의 항전, 그리고 함락
천제현은 며칠 동안 혼돈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허공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귓가에는 계속 난해하고 심오한 소리들이 맴돌았다. 이 소리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며 강해졌다가 약해지기도 했다. 온몸이 혼돈의 상태에 빠져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바로 이때였다. 끝없는 어둠 속에 위엄이 넘치는 거대한 마신이 나타났다. 이 마신의 몸에는 각기 다른 아홉 개의 눈이 달려 있었다. 이 색들은 세상의 신비로운 힘을 나타냈다. 눈에는 천지의 심오한 이치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얀색은 공간, 은색은 시간, 녹색은 생명, 검정색은 죽음, 보라색은 영혼, 금색은 신식…….
아홉 개의 눈은 저마다 비범하고 초월적인 힘을 상징했다.
구목마신은 원소의 힘 외에도 아홉 가지 막강한 힘을 지닌 마신이었다.
천제현도 구목마신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구목마신이 천제현이며 천제현이 바로 구목마신이기 때문이다. 천제현은 구목마신의 환생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순간 천제현은 구목마신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구목마신의 몸에 눈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은 계속 감겨 있었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힘을 내뿜고 있었다.
“저 눈은…….”
곧 열 번째 눈이 떠질 것 같았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퍼지면서 의식의 심연을 헤매던 천제현을 깨웠다.
‘그저 꿈을 꾼 것일까?’
깨어나 보니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열 번째 눈은 이름 모를 고대신이 봉인한 힘이다. 그 고대신은 천제현에게 함부로 열 번째 눈을 깨우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열 번째 눈을 억지로 깨울 경우 상상하기 힘든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열 번째 눈이 상징하는 힘은 도대체…….’
천제현은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며칠 쉬었지만 몸은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력은 거의 회복되어 이제 침상에서 내려와 걸을 수는 있는 상태가 되었다.
“작은 아가씨,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럽죠?”
“드디어 깨어났구나!”
공서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가에서 천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제현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반색했다가 다시 걱정과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군이 또 졌어. 견융이 왕성을 공격하는 바람에 투항하거나 전사한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아주 난리가 났어!”
“뭐라고요? 또 패했다고요?”
천제현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남하국 군대는 뭘 하는 거죠? 전선이 함락된 건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지만, 왕성이 함락되다니요?”
공서련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해서 나도 모르겠어. 남궁혜 언니가 그러는데 이화후가 배신했대. 그자가 비밀통로로 대융국의 군대를 왕성으로 들여보내는 바람에 왕성이 함락되었대!”
‘또 배신자가 나오다니!’
천제현은 머리가 아파왔다. 왕성까지 함락되었다면 남하국은 끝장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천제현이 반년 동안 고생하며 세운 기적상회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여기가 어디죠?”
천제현은 자신이 있는 곳이 기적상회 본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왕궁이야. 안전을 위하여 언니가 왕성의 운문연구소를 부수고 본부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어. 그리고 기적상회의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으로 피신했지. 염양군과 문성군 휘하의 결사대 십여 만 명이 왕궁을 거점으로 항전하고 있어. 그러나 적이 너무 많아서 아마도…….”
공서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공화련이 방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왔다.
“왕궁도 함락될 것 같아. 후퇴할 계획을 세워야 해. 어서 빨리…….”
공화련은 말을 하다가 깨어난 천제현을 보고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돌아왔니? 정말 딱 맞춰 깨어났구나!”
천제현은 최근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방금 후퇴라고 하셨죠? 그게 무슨 소리죠?”
“천천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더 위험해져!”
공화련이 서둘러 천제현에게 말했다.
“빨리 대전으로 가자!”
왕궁의 대전은 평소의 휘황찬란한 모습이 아니었다. 대전에는 온몸에 갑옷을 두른 병사들로 가득했다. 대전 밖 왕성 절반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온 하늘을 자욱하게 덮었다.
천제현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염양군과 문성군, 고천추, 신풍후, 금전후, 사방후 등은 모두 혈전을 치른 탓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었다.
모두 착잡한 얼굴로 천제현을 바라봤다.
천제현이 힘없이 말했다.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서 다 들었습니다. 왕성이 완전히 함락되고, 이십여 만 명의 군사만 남아서 여기를 간신히 지키고 있다구요? 대융국 군사들이 밀려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제 뭘 해도 소용없어요. 후퇴할 방법은 생각하셨나요?”
염양군은 안타까워서 발을 구르며 가슴을 쳤다.
“왕성이 함락된 건 다 내 잘못이야. 남궁 가문에서 그런 역적 놈이 나오다니!”
“대세가 기울었소. 후회한들 이미 늦었구려!”
문성군 역시 낙담한 얼굴이었다.
“남하국 북방은 틀렸소. 왕성과 창주, 이화후가 다스리는 노주는 적의 손에 넘어갈 것이오. 그러나 남하국 남부 여섯 주는 아직 건재하오. 게다가 험준한 산과 광활한 사주호가 방어막이 되어주니 그곳에서 버티는 수밖에. 이제 남하국의 모든 힘을 모아 남부의 여섯 주를 지켜야 하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송곳니 왕 휘하에는 고수가 가득했다. 군대 규모도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왕성은 함락되어 혼란에 빠졌고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전세를 역전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기적이 일어나서 견융군단을 몰아내준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전방의 전선은 무너지고 왕성은 파괴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왕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남부에 최대한 힘을 집중시키고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대융국의 침입을 막는 게 현명하리라.
문제는 어떻게 힘을 집중시키느냐이다.
왕궁 밖의 전투는 점점 격렬해졌다.
염양군이 의견을 내놨다.
“왕궁에 동방 가문 전용 비밀통로가 있소. 동방호연 왕자께서 비밀통로를 열 권한과 방법을 가지고 계시오. 대학자와 진국군, 제후들은 남은 왕궁기사와 정예병을 이끌고 왕성을 빠져나가시오. 남부의 여섯 주 중에서 중주의 위치가 가장 좋소. 중주를 남하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삼아 남하국의 명맥을 지켜야 하오!”
동방호연이 역시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즉시 걸어 나왔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융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두고 보겠습니까?”
염양군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말고 가시오. 나와 문성군이 정예병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대융국과 싸우겠소. 놈들이 추격하지 못하게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끌 것이오!”
이 말에는 결사 항전하겠다는 염양군과 문성군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어째서 함락된 성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십니까?”
고천추가 즉시 만류했다.
“살아남아서 후일을 도모해야지요!”
염양군이 결연히 말했다.
“왕성이 함락된 것은 내 책임이오. 남궁 가문의 선조들과 남하국의 수많은 영령들을 뵐 낯이 없소. 죄를 씻을 방법은 결사항전밖에 없소. 난 남궁 가문의 적계들을 이끌고 이곳을 지키기로 마음먹었소. 남궁 가문의 방계와 스무 살 미만은 데리고 가시오. 앞으로 남궁혜에게 이들을 맡기겠소. 오늘부터 남궁혜가 남궁 가문의 새로운 계승자이다. 가문의 후예를 잘 보살피고 불사조가 불속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힘써주게!”
이화후의 배신으로 죄책감을 느낀 염양군은 왕성에 남아 시간을 벌어주겠다고 결심했다. 이는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문성군은 남으려고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더욱이 진령급 강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말이다.
“남하국의 정보 체계는 내 관할이오. 난 견융초원의 변화와 대융국 군대의 기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여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소. 상관 가문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오.”
문성군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상관 가문의 수장이 되어 수십 년 동안 권력투쟁에만 몰두하느라 선조의 가르침과 책임을 망각했소. 다 이 몸이 부덕하고 못나서 그랬소. 상관 가문의 기반은 모두 왕성에 있는데 왕성이 함락되었으니 어찌 무사할 수 있겠소?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 우리 가문의 죄를 씻겠소!”
천제현은 이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
무안군은 염양군과 문성군이 기존에 대적했던 가문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했다. 당시에 천제현은 무안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 뜻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두 귀족에게는 평범한 가문의 사람들에게 없는 명예와 존엄이 있었다.
남하국에서 군의 작위를 지닌 이 두 사람은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천제현!”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사방후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필을 들고 그를 쳐다봤다.
“솔직히 난 지금까지 네놈을 원수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원한을 갚을 기회가 없구나. 남하국의 사내라면 너도 네 책임을 다하거라. 책임을 회피한다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와르르!
왕궁 외부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시오!”
문성군도 외쳤다.
“가시오!”
천제현이 두 사람에게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이번 국난은 두 분만의 수치가 아니라 저 천제현의 수치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반드시 견융초원을 평정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염양군이 껄껄 웃었다.
“그 말이면 충분하오. 대융국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았군!”
“전하께서 어지러운 상황에 그대를 진국군으로 봉하셨소. 그대에게 나라의 명운을 맡기신 것이오. 남하국은 지금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소.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주시오.”
문성군이 천제현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상관 가문과 진 원한은 없던 걸로 합시다. 상관 가문의 후예들을 잘 보살펴주시오!”
“가시오!”
“더 지체했다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고천추가 동방호연에게 말했다.
“어서 비밀통로를 여십시오!”
삼대 가문의 청년들과 방계, 그리핀기사단, 주요 학자 등 2만 명이 넘는 인원이 왕궁의 국고로 가서 옮길 수 있는 물건들을 꺼냈다. 옮길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불태웠다. 마지막으로 동방호연이 무리를 이끌고 왕궁 비밀통로를 통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왕궁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염양군과 문성군은 불바다가 된 남하국 왕성과 물 샐 틈 없이 밀려드는 견융 군대를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도시가 며칠 사이에 폐허가 되었다. 수십 년 동안 힘을 길러온 남하국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남하왕이 죽었다. 전방부대의 동방전도 죽었다. 그 다음은 염양군과 문성군이었다.
“이보시오 염양군, 이렇게 죽게 되다니 정말 내키지 않는구려!”
“그러게 말이오. 정말 내키지 않아. 허나 우리는 늙었소. 앞날은 청년들에게 맡깁시다!”
“이번 생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그래도 화려하게 퇴장해야지!”
“갑시다!”
두 진령급 강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삼대 가문의 고수들과 최후의 군사들을 이끌고 대융국 군대에게 마지막 공격을 퍼부었다. 그 참혹한 전투는 반나절이나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