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
제400장 무진연옥
마림의 새카만 검신에서 불길이 치솟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마력 파동이 광풍을 일으켰다. 초원이 마치 파도치는 바다처럼 일렁였다.
‘제길! 어디 해보자는 거지!’
공중으로 훌쩍 떠오른 천제현이 강력한 파동을 뿜어냈다. 마림은 천제현이 저항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던 참이었다.
“어디 언제까지 그 힘을 쓸 수 있을지 보자꾸나, 명염!”
검은색 장검을 휩싼 화염이 세차게 타올랐다. 화염과 마림의 정령이 가진 힘이 합쳐지는 순간, 전신이 흑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악귀가 탄생했다. 악귀가 번개 같은 속도로 천제현을 향해 돌진해왔다.
“천제현!”
공화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진령급 고수의 정령 공격은 혼성술사가 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제현이 두 손으로 인을 맺더니 감았던 눈을 번쩍하고 떴다. 그의 눈 안에는 이미 일곱 개의 동공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제현의 몸에 덧씌워진 압도적 힘이 순식간에 거대한 구안마신으로 화했다.
흑색 화염 악귀는 구안마신의 위엄에 눌려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나왔구나! 바로 그 힘!’
마림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약한 인간의 육신에 어떻게 저토록 강대한 힘이 담겨 있단 말인가? 저 힘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이때 천제현의 앞쪽으로 뿜어져 나온 모종의 마력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진동을 일으켰다.
퍼엉!
흑색 화염 악귀는 격렬한 진동에 휩쓸려 가루가 되고 말았다.
마림이 보기에도 소름이 돋을 만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천제현의 정령은 수많은 속성을 자유자재로 전환해가며 사용하는 듯했다. 지난번 요새에서는 영혼 속성의 힘으로 혼성 9성 정점 고수 다섯 명의 영혼을 순식간에 거둬들이지 않았던가.
거기에 공간 능력도 있는 것 같았다. 순간이동이나 조금 전의 진동 등, 전부 공간을 근원에서부터 조종하는 능력이었다.
공간을 다루는 힘은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자질이다.
그런 자질을 지닌 인물은 대제국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놈에게 공간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다니!’
마림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자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림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생명력이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을 텐데. 계속하다가는 죽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투항해서 대융국에 충성을 맹세하거든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마림의 말이 옳았다.
주 정령의 힘을 완전히 개방하길 이미 두 차례, 천제현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불멸체를 2단계까지 수련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몸은 체질 자체가 허약했다. 거기에 마력까지 부족한지라 애초부터 정령이 육체에 주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림의 일격을 막아내면서 온몸의 모세혈관이 파괴된 탓에 모공에서 계속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땀처럼, 핏물이 금세 천제현의 전신을 흠뻑 적셨다.
단 한 번, 남은 공격은 한 번뿐이었다.
천제현은 이미 한계였다. 최악의 상황을 감내한다 해도 가능한 공격기회는 많아야 한 번이었다. 이번 공격으로 마림을 처치한다면 공화련은 무사히 왕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면 둘 다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다.
물론 공격이 성공하는 것과 천제현이 살아남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운에 맡기는 수밖에!’
구안마신이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눈 여덟 개를 모두 감았다. 지금 마신이 뜬 눈은 천제현의 엷은 황금색 동공과 연결되어 있었다. 순간 천제현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힘이 폭발했다.
‘저 공격은 대체?’
마림은 분명 원소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뭔가 거대한 힘이 그의 주위를 온통 집어삼킨 듯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그 힘을 막아낼 방법이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마력과 모든 실체를 꿰뚫고 몰려오는, 그렇기에 어떤 방어수단이든 순식간에 무력화시켜 버리는 힘이었다.
쿠르릉!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마림이 속한 세계 전체가 와르르 붕괴했다.
정신 영역에 작용하는 모종의 힘이 마림의 지각을 일순에 앗아갔다. 그는 지금 침묵과 어둠뿐인 공간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정신계열 공격인가?’
마림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정신력에 속하는 힘인 듯한데, 안에 시전자의 의식이 녹아 있었다.
사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식(神識)의 힘이었다. 천제현의 신식은 이미 심등 경지였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다른 유형의 힘을 감당해내기는 무리였기에 제일 안전한 수단인 신식 공격을 택한 것이다. 동시에 이는 마림에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기도 했다.
신식 공격은 바꿔 말하면 정신공격이었다.
정신공격은 형태가 없을 뿐더러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상대의 신식 자체가 강하거나 정신계열의 정령 또는 무공을 보유한 게 아닌 이상에야 어떤 식으로도 방어는 불가능했다.
견융족은 마수령.
마수령들 사이에서는 심오한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진 바 없었다. 마림의 정령 역시 척 보기에도 정신계열은 아니었다.
그의 신식이 어느 경지인지 알지는 못하나 아마 기껏해야 심안 정도일 것이다. 마력 방면에서는 마림을 당해낼 수 없더라도 신식만큼은 천제현이 마림보다 한 수 위였다. 자신의 강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것, 그 또한 천제현이 신식공격을 택한 이유였다.
“무진연옥(无殄煉獄)!”
마림의 머릿속에서 섬뜩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주변 풍경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대지 깊숙이 파묻힌 용암 세계였다. 발밑은 온통 꿀렁꿀렁 끓어오르는 용암, 시뻘겋게 달궈진 쇠기둥들이 용암을 뚫고 드높이 치솟아 있었다.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뚱이를 한 악마가 온몸에서 용암을 뚝뚝 흘리며 등장했다. 인두처럼 벌건 쇠사슬을 든 놈이 흉악한 얼굴로 마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촤앗!
소머리 악마의 손아귀에서 뻗어 나온 쇠사슬이 마림의 몸을 휘감았다. 쇠사슬을 타고 솟구치는 화염에 마림은 뭐라 형용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마저 화염에 온통 그슬리는 듯했다.
“꺼져!”
마림의 격렬한 몸부림에 쇠사슬이 산산이 조각나 끊어져 나갔다. 흑색 칼날이 공중을 가르자 소머리 악마가 비명과 함께 불꽃으로 화해 소멸했다.
“이까짓 잔재주로 날 죽이겠다고?”
마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암 속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형상들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건 전부 인간의 몸에 소머리가 달린 악마들이었다. 용암 속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악마들은 하나같이 불타는 쇠사슬을 감아 들고 있었다.
마림은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때 그의 몸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이 공간에 존재하는 마림이 둘로 늘었다. 서로를 마주 응시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독립된 개체. 그런데 기이하게도 두 명의 마림을 지배하는 의식만은 여전히 하나였다.
소머리 악마가 불붙은 쇠사슬을 휘두르며 공격해왔다.
흑색 검으로 쇠사슬을 끊은 마림은 파죽지세로 악마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또 다른 마림이 쇠사슬에 가격 당하자 그 고통이 원래 마림의 육체와 정신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공간에 존재하는 마림의 육체는 둘, 각각 온전한 감각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여전히 하나였기 때문에 두 몸뚱이 사이에는 본체와 분신의 구분이 없었다. 마치 동일한 의식에 지배받는 오른손과 왼손처럼. 마림이 아무리 왼손을 잘 지켜봐야 오른손이 다치면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가 지금 이곳에 적용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이 무슨 사악한 술법이란 말인가!’
마림은 두 개의 육체를 동시에 조종해가며 악마들을 처치해야만 했다.
세 번째 악마 무리가 또 나타났다. 마림을 절망하게 한 것은 소머리 악마의 숫자도, 마림의 육체도 점점 더 늘어난다는 사실이었다. 3차전에 등장한 소머리 악마는 열여덟이었고 마림은 어느새 세 명이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의식은 하나의 육체만을 제어할 수 있다.
몸뚱이 셋이 한 의식에 연결되다 보니 제어가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동작이 엇나가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세 명 중 하나만 쇠사슬에 맞아도 끔찍한 고통이 덮쳐오는 탓에 마림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셋이 한꺼번에 공격당한다면 마림의 의식은 세 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셈이었다.
쿠웅!
마림은 간신히 세 번째 악마 무리를 모두 처치했다.
하지만 곧이어 네 번째 무리가 등장했다. 소머리 악마는 서른여섯 마리, 마림은 네 명이었다. 신체 제어능력을 거의 잃다시피 한 마림은 악마들의 공격을 그저 고스란히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무리…….
마림의 육체 역시 계속 늘어갔고, 이제 그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 없었다.
촤앗!
모든 육신에 가차 없는 채찍질이 가해졌다.
수십 갈래의 고통이 동시에 밀려오는 통에 마림은 졸도하기 직전이었으나, 정신력으로 창조된 이 공간에서는 마음대로 기절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마림의 육체는 여전히 분열 중이었다. 물론 소머리 악마의 수 역시 계속 늘고 있었다.
백 번째 무리!
천 번째 무리!
만 번째 무리!
마림의 몸은 이제 수천수만 개는 되어 보였다. 몸뚱이 하나하나가 인두처럼 달아오른 쇠기둥에 묶여 소머리 악마들의 손에 잔혹하게 고문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통증이라도 수만 배가 겹치면 거대한 위협이 되는 법.
하물며 수천수만의 마림이 당하는 건 그 고초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극형이었다. 그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고통의 급류로 모여 마림의 정신과 영혼을 후려쳤다.
마림의 정신은 유리처럼 산산이 조각나기 직전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공격수법이었다.
무한한 고통의 무한한 복제.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문을 최대한까지 키워 일거에 막대한 충격을 가하는 기술. 거대한 해일로 진흙 제방을 때리는 형국이니 결과가 어떨지야 뻔했다.
어쩌면 마림은 대단한 의지력을 가진 전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어떤 전사든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게다가 그 고통이 만 배로 불어난다면? 제아무리 지상 최강의 의지력을 가진 전사라도 그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서는 정신세계가 무너져 죽고 말 것이다. 요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미치광이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그것이 바로 무진연옥, 천제현의 막강한 신식 공격이었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고통의 격류에 정신의 제방은 속절없이 허물어져만 갔다. 그런데 마림의 의식이 완전한 붕괴를 목전에 두고 있던 그때, 지옥이 따로 없던 용암의 세계가 돌연 거품처럼 바스러졌다.
구안마신의 힘이 사라졌다.
창백한 천제현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제길, 거의 다 됐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