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
제399장 마림의 추격
공화련은 새끼 여우의 내력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던 참이었다.
“보통 녀석이 아닌 것 같아. 막강한 힘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 오늘 변신한 걸 봤는데 풍기는 기운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어. 고대의 혼돈요수 중에 아주 비슷한 존재가 있었거든.”
“혼돈요수라고요?”
공화련의 능력이라면 천제현도 잘 알았다. 천서 정령이 품은 방대한 지식과 기억은 외부 자극에 의해 바로바로 각성됐다. 천제현도 모르는 새끼 여우의 정체를 공화련은 이미 알아낸 것일까?
요수와 마수, 언뜻 비슷하게 들리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요수는 대부분 지능이 매우 높을뿐더러 독특한 술법을 쓸 줄 알았다. 같은 특징에 부합하는 새끼 여우 역시 요수일 가능성이 컸다.
천제현이 물었다.
“얼마나 아는 거죠?”
“자세히는 몰라. 정령의 기억 중에 거기에 대한 부분은 워낙 적어서.”
한참 동안 혼자서 뭔가를 낮게 읊조리던 공화련이 말을 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태고의 혼돈이 갓 탄생했던 시절에 신, 그리고 악마와 공존하던 요수족이 있었다고 해.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우두머리는 변신술에 능했는데 그 존재의 본체가 바로 구미호였대!”
“구미호요?”
천제현은 중주 시련탑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설마 새끼 여우가 그 혼돈요괴의 후예?’
요괴족의 후예라면 새끼 여우가 쓰는 온갖 기묘한 술법들도 설명이 됐다.
공화련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확답은 못 줘. 새끼 여우가 평범한 녀석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만.”
천제현이 생각에 잠겼다.
새끼 여우의 본체인 구미호와 자신의 정령인 구안마신,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으며, 정말로 새끼 여우와의 만남은 과연 우연이었던 것일까?
천제현이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새끼 여우의 진짜 정체가 뭐든지 간에 아직은 힘없는 어린 개체일 뿐이었다. 기나긴 세월을 사는 혼돈요수가 새끼에서 성체로 자라는 데 걸리는 시간은 천 년이 될 수도, 만 년이 될 수도 있었다. 인간의 유한한 수명으로 어떻게 혼돈요수를 끝까지 키워내겠는가.
방법이 있다면 아마도 천제현이 불로장생의 몸이 되는 게 유일할 것이다.
적막한 밤, 주변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스산한 한기와 위기감이 한데 뒤섞여 마치 거대한 무형의 손아귀처럼 두 사람을 덮쳐왔다. 견융족 추격병도 추격병이었지만, 공화련을 더 잠 못 들게 만드는 건 혹시 밤 사냥을 나왔을지 모를 마수들이었다. 이때 공화련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있었다.
“새끼 여우가 근처에서 보초 서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뭔가 다가오면 녀석이 먼저 눈치챌 테니 마음 놓고 좀 쉬어요.”
실은 온몸이 기진맥진이었다. 천제현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 눈을 감은 그녀는 곧 선잠에 빠져들었다.
천제현은 운기조식으로 상처를 돌보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한계치를 넘어 폭발시킨 힘으로 인해 신체에는 무리가 갔지만, 그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잠재력이 깨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번 부상을 무사히 넘긴다면 분명 마력이 대폭 증강될 것이다. 진혼급을 넘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동쪽 하늘이 아스라한 빛으로 물들 때 즈음 천제현도 운기조식을 마쳤다. 갖고 있던 성단을 복용한 덕에 완치까지는 아니어도 부상이 많이 치유됐다. 마력 일부가 회복되면서 기본적인 전투력은 생겼으니 이제 적어도 초원의 마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공화련은 그의 어깨에 기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천제현이 살며시 공화련을 흔들었다.
“큰아가씨, 큰아가씨, 날 밝겠어요, 일어나요!”
공화련은 온몸을 천제현에게 맡기고 두 손으로는 그의 팔을 꼭 붙잡은 채였다. 얼굴이 온통 먼지투성이가 됐어도 그녀 특유의 분위기는 오히려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역시 절대 미모의 소유자, 공화련다웠다.
“앗!”
화들짝 놀라 깨어난 공화련은 다소 민망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잠깐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천제현에게 기대고 있는 동안 느껴지던 편안한 기운에 그만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공화련은 어려서부터 똑 부러지고 독립적인 아이였다. 조심성이 많아서 동생을 제외하고는 누구한테도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자도 이렇게까지 깊이 잠들지는 못하건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 녀석을 신뢰하다 못해 의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공화련으로서는 당황스러운 감정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얼른 출발해요.”
공화련의 복잡한 심경을 알 리 없는 천제현이 바닥에 앉아 움직일 줄 모르는 공화련을 보며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큰아가씨, 뭐 하고 있어요? 가자니까요!”
“다친 사람한테 이 다리로 어떻게 걸으라는 거야?”
공화련이 당당함을 넘어 투정 섞인 투로 말했다.
“업어주지도 않고!”
“잠든 사이에 마력으로 뼛속에 파고든 독소를 제거했어요. 잘 아물고 있으니까 그 다리는 이제 걱정 없다고요. 걷는 것도 물론이고!”
천제현이 퉁명스레 말했다.
“엉덩이 걷어찰 생각일랑 이제 접어두시죠!”
공화련은 그제야 허벅지에 감긴 새 붕대를 발견했다. 후벼 파는 듯한 통증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양쪽 뺨이 확 달아올랐다.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화련이 속으로 천제현에게 한바탕 악담을 퍼부었다.
‘이 목석같은 멍청이가! 너 좋으라고 업어달라는 거였지, 그런데 그걸 거절해? 혈압 올라서 진짜!’
앞장서서 걷는 새끼 여우를 따라 두 사람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기면서 공화련도도 마음의 빗장을 푼 듯했다. 둘은 퍽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공화련이 어떤 사람인지 더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이 진중하고도 현명한 미녀 상인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면이 숨겨져 있었다. 어떤 때는 박력 넘치고, 어떤 때는 천진난만하고, 또 어떤 때는 감성적인, 알다가도 모를 존재였다.
어제 하룻밤을 쉬기로 한 건 옳은 판단이었다. 두 사람 다 한결 기력을 찾은 덕에 이동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몇 시간 만에 왕성까지의 거리가 오백 리 이내로 줄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비교적 안전한 왕성 세력범위 안이었다. 독응수를 탄 추격병들도 더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천제현이 시선을 앞쪽 저 멀리 던졌다.
“근처에 왕성 순찰대나 정찰초소가 있을 거예요. 사람을 만나 말이든 마수차든 빌리면 남은 길은 편해지겠죠.”
공화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길 기대해야지!”
긴 시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데는 상당한 마력과 체력이 소모됐다. 지금은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할 때였다. 말 한 필만 있으면 더는 바랄 게 없으리라.
그런데 두 사람이 한숨 돌리려던 그때, 새끼 여우가 경고음을 냈다.
“끽끽!”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 거대한 푸른색 매 한 마리가 등장했다. 세로 2장, 가로 5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몸집이었다. 남정석으로 조각해 만든 듯한 깃털 주위로 번쩍거리는 번갯불이 튀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강력한 마수였다.
“조심해요!”
천제현이 옆에 있던 공화련에게로 몸을 날렸다.
순간 번개가 땅을 할퀴면서 시커멓게 탄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 무시무시한 힘에 두 사람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건 최소 혼성 9성 정점에 해당하는 등급의 뇌응수였다.
새끼 여우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새까맣던 눈망울이 순식간에 요사스러운 녹색으로 변하더니 자그마하던 몸집도 놀라운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새끼 여우는 어느새 2장가량에 달하는 여우요괴로 변한 뒤였다.
변신이 끝나자 동공의 섬뜩한 녹색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이때 공중의 뇌응수가 돌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매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녹색의 빛이 빠른 속도로 주위를 향해 확산하더니 곧 눈동자 전체를 뒤덮었다.
“끼에엑!”
흥분 상태였던 뇌응수가 날카로운 울부짖음과 함께 갑자기 잠잠해졌다. 정신이 완전히 새끼 여우에게 잠식당한 탓이었다. 그러나 뇌응수는 막강한 생물이었다. 제아무리 새끼 여우라도 정신 장악에 성공한 게 고작, 놈의 행동까지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뇌응수는 공중에 박제 당한 듯한 모양새가 됐다.
“흥미롭군, 흥미로워. 적어도 혼성 9성 정점은 될 마력을 가진 녀석을 속박하다니, 대단한 신수를 부리는구나!”
공화련의 눈에 뇌응수의 등을 밟고 선 마수령이 들어왔다. 건장한 체격에 투박한 흑색 검을 든 모습이었다. 지옥에서 왔을 법한 강력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명염검 마림. 진령급 견융족 고수.
그의 등장은 흡사 지옥에서 온 사자의 그것처럼 보는 이에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두려움을 선사했다.
마림은 칼을 빼 드는 대신 재미있다는 눈으로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운을 감추는 재주가 제법이더군. 하룻밤을 꼬박 찾아야 했어. 새벽에 보인 약간의 빈틈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리 나라도 흔적을 포착하긴 어려웠을 거야. 그래서 내가 허비한 시간은 무엇으로 갚아줄 생각이지?”
‘결국은 벗어날 수 없었단 말인가?’
왕성을 코앞에 둔 시점에 진령급 고수가 추격해올 줄이야. 천제현과 공화련이 무슨 수로 진령급 고수에게 대항을 한단 말인가. 새끼 여우도 뇌응수를 상대하느라 두 사람을 도울 겨를이 없었다.
“마력을 폐하고 얌전히 따라오너라.”
마림은 느긋했다.
“그 편이 괴롭지 않을 거다.”
머릿속으로 눈앞의 상황을 한 번 정리한 천제현이 말했다.
“갈 테니 여자는 놓아줘.”
“안 돼!”
공화련이 허겁지겁 외쳤다.
“천제현,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천제현도 물론 견융족 놈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두 사람에게 너무 불리하기에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만 넘기려는 것뿐이었다. 목숨만 보전하면 탈출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다.
“전쟁 포로에게는 협상 자격이 없다!”
“내 손에 아직 패가 남아 있다면?”
“패? 하하하! 네놈 몸 안의 힘을 말하는 건가? 강력한 건 사실이다만, 정말 그걸 다시 쓸 수 있다고?”
마림이 코를 킁킁거렸다.
“피 냄새만 맡아봐도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겠구나, 만신창이야. 그 힘을 다시 썼다간 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내가 죽으면 네 임무도 실패로 끝나겠지.”
마림이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포로 주제에 자살을 무기로 나를 협박하는 건가? 잘 들어라, 네놈 목숨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아. 나야 시체만 가져가도 그만이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었군, 계집부터 처치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