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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398화 (394/729)

# 398

제398장 예상치 못한 질문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에서 미끄러진 물방울이 눈부시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거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계곡 안쪽으로 사라졌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내려온 탓에 우윳빛 살결이 더욱 돋보였다.

“꺅!”

화들짝 놀란 공화련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힘이 들어간 오른쪽 다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져왔다. 아무래도 상처가 벌어진 듯했다. 공화련은 결국 털썩 무너져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거대한 산봉우리 두 개가 갑작스럽게 가슴을 짓누르는 통에 천제현은 혼이 다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곧이어 부드럽고도 향긋한 입술이 정확하게 천제현의 입가에 내려앉았다.

지켜보던 새끼 여우가 얼른 앞발로 두 눈을 가렸다.

왕방울만 해진 공화련의 눈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천제현의 표정.

‘맙소사, 내 순결이!’

천제현은 여태껏 전혀 몰랐다.

‘큰아가씨가 이토록 정열적인 여인이었다니. 목숨을 구해 준 답례가 입맞춤과 포옹일 줄이야. 몸으로 갚겠다는 생각인 건가? 큰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아무 호응도 없어서야 어디 사내라고 할 수 있을까!’

공화련을 힘줘 끌어안은 천제현이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공화련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어쩐지 반항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속으로는 남몰래 흥분과 기대감에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큰아가씨, 너무 치사한 거 아닌가요. 기운 빠진 틈을 노려서 첫 입맞춤을 강탈해가시다니!”

천제현이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공화련을 응시했다. 색마에게 순결을 빼앗긴 소녀 저리 가라 할 표정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온 공화련은 천제현의 반응에 뒷목 잡고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분명 네가…….”

“큰아가씨, 상식적으로 따져보자고요. 전 지금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 할 지경이고, 껴안고 입까지 맞춘 건 아가씨였잖아요. 오리발도 모자라 저한테 떠넘기시는 거예요?”

“난 아니야! !”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였다. 제아무리 침착한 공화련이라도 지금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소리하지 마!”

천제현이 자신은 몹시 떳떳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됐고요, 잡아뗀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잖아요. 아가씨 성격이 좀 괴팍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에야 그냥 팔자려니 하고 제 여자로 받아줄게요!”

“차라리 말을 안 섞고 말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공화련이 아픈 다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휘청하며 균형을 잃었다.

공화련의 부상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천제현이 농담을 멈추고 바닥에 있던 유명검을 집어 들었다. 허공에 가볍게 검을 긋자 푸른색 빛이 날아와 칼날에 내려앉았다. 기령이 돌아온 것이었다. 독응수는 진즉에 모두 처리된 뒤였다.

유명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천제현이 재빨리 달려가 공화련을 부축했다.

“상처 좀 볼게요!”

“싫어!”

천제현은 공화련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공화련을 바닥에 앉혔다. 말로는 싫다던 공화련도 막상 몸으로는 반항하지 않았다.

바지를 찢자 눈처럼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허벅지 중간에 암홍빛 상처가 보였다. 공화련이 마력으로 혈관을 차단했기에 과다 출혈은 피할 수 있었다.

“역시 독화살이었어요!”

천제현이 상처부위를 가볍게 눌러보며 말했다.

“독이 뼛속까지 침투했어요. 남하국 의학 수준으로는 다리를 잘라내야 했을 겁니다.”

공화련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그렇게까지 심각하단 말야?’

천제현이 씩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국왕을 암살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독이니까. 독이 더 퍼지지만 않게 하면 돼요. 후유증 없이 치료할 방법이 있어요.”

공화련에게 상태를 설명하는 사이, 천제현이 직접 만든 2급 해독유형 단약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곧 액체 상태로 녹아내린 약이 그의 입에서 공화련의 상처 위로 옮겨졌다. 이어서 주변 부위를 살살 문지르자 약이 금세 상처 안으로 스며들었다.

공화련은 통증이 확연히 줄어들고 있음을 느꼈다. 치료에 몰두하는 천제현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빛도 아까보다는 누그러졌다.

붕대 감기까지 마친 천제현이 공화련의 의견 따위는 묻지도 않은 채 번쩍 그녀를 둘러업었다.

아연실색한 공화련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이 다리로는 못 걸어요.”

공화련을 업은 천제현이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견융족들이 또 추격해올 거예요. 다시 잡히면 그땐 정말 죽어요.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해요.”

공화련도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사고를 제외하면 그 어떤 사내와도 몸을 이렇게까지 가깝게 맞대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공화련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생떼나 부리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몇 초 망설이던 공화련은 결국 양팔을 뻗어 천제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눈 딱 감고 그냥 천제현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평소였다면 공화련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느껴볼 운 좋은 기회였지만, 천제현은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안 아픈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판국에 흑심이란 게 생길 리가 없었다.

공화련은 조용히 천제현의 등에 몸을 기댄 채였고, 천제현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천제현의 위태로운 맥박이 공화련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숨소리마저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놀라운 정신력으로 버텨내고 있을 뿐 실은 이미 한계이리라.

공화련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지경까지 온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골려 먹기까지, 전부 천제현의 배려였을 것이다.

“천제현, 궁금한 게 있어…….”

공화련이 천제현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고는 물었다.

“나랑 서련이 중에 누가 더 좋아?”

공화련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는 감각까지는 좋았는데, 질문 내용은 천제현을 독한 사레에 들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공화련답지 않은 질문에 당황한 천제현이 우물쭈물했다.

“뭐 그런 걸 물어봐요? 둘이 유형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비교하라고?”

“그럼 다시 물을게. 만약, 아주 만약에 말이야, 나랑 서련이 중에 한 사람을 아내로 맞을 수 있다면 누굴 고를 거야?”

천제현은 확실히 느꼈다. 질문과 동시에 공화련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음을.

‘왜 이런 걸 물어보지? 뭔가를 돌려서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도 없을 게 아닌가.

“둘 다 데리고 살면 안 되나? 으앗, 왜 꼬집어요!”

공화련이 뾰족하게 날 선 투로 말했다.

“한 명만 골라!”

‘질문을 해도 이런 난감한 질문을 하다니!’

주변 인물들 중 천제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공서련이었다. 아무리 공화련이라도 그 점에서만큼은 공서련에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면전에서 공서련을 선택하는 건 공화련에게 상처 주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자는 복잡한 동물이었다. 내적 갈등이야 있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분명 자기를 택하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화련을 택하면 공서련에게는 미안해서 어찌한단 말인가?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공화련도 좋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느 쪽도 선뜻 고르기 어려운 문제였다.

공화련이 피식 웃으며 비아냥댔다.

“그 대답이 그렇게 어려워? 하여간 사내들이란, 밥그릇 들고 먹으면서도 밥솥 넘보는 족속들이지!”

“억울해요! 아직 먹기도 전인데! 기껏해야 슬쩍 훔쳐본 격이지 솥에 손은 대지도 않았다고요!”

“너…….”

“됐어요, 됐어, 일부러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 알아요.”

천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면 큰아가씨로 할게요!”

공화련의 몸이 일순 흠칫 굳었다. 대답에 만족한 것 같기도, 불만인 것 같기도 했다. 다리로 천제현을 한 번 툭 찬 공화련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왜? 우리 서련이가 어디가 어때서!”

“부부는 일도 분담해야 하는데 작은 아가씨 머리로 어떻게 상회를 꾸려나가겠어요? 그러니까 큰아가씨가 적임자라는 거예요! 부인을 하나만 고르라고 했지 첩 들이지 말라고는 안 했죠? 작은 아가씨는 어차피 명분 같은 건 크게 신경도 안 쓰잖아요, 제 말이 맞…….”

“뻔뻔한 자식! 어디 죽도록 걷어차여 봐라!”

“네네, 알았어요, 그럼 작은 아가씨로 할게요. 이렇게 성질 더러운 부인은 저도 싫다고요! 으앗, 왜 또 걷어차요! 그럼 둘 다 안 할게요! 윽, 또 차면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데요!”

이쯤 되자 공화련도 슬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반응이 너무 격했던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만일,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인데, 나랑 서련이가 둘 다 너 좋은 일 시켜줘도 다른 여자를 또 찾을 거야?”

“무슨 뜻이에요? 머리가 나빠서 못 알아듣겠는데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남궁혜, 풍채향, 운요…… 빙우 언니까지, 다들 어디 내놔도 안 빠지는 여자들이잖아. 안 건드린다고 장담할 수 있어?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안 믿겠지만!”

“솔직히 전 진짜 별생각 없어요.”

천제현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하지만 큰아가씨 태도를 보니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그럼 차라리 일찌감치 박애주의자 선언을 해두는 게 낫겠네요. 만약을 위해서라도!”

“이 바람둥이, 죽어 버려!”

이번 기회에 천제현이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평소 그렇게나 지적이고 이성적이던 공화련도 막상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니 남궁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공화련이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걷는 내내 하도 걷어차인 탓에 천제현은 엉덩이가 퉁퉁 부어오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공화련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옥신각신 걷는 동안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다.

밤중의 초원은 낮보다 훨씬 위험했다. 몸이 온전치 못한 두 사람은 안전을 위해 자그마한 숲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단약 몇 개를 입에 털어 넣은 천제현은 부상부터 살폈다. 예상대로 상태가 심각했다. 한계 이상으로 힘을 사용한 탓에 경맥이 손상을 입었고 무리한 전투로 원기까지 상한 판국이었다. 이 시대에 온 이래 최고로 심한 부상이었다. 회복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가장 큰 문제는 즉각 치료하지 않을 경우 영구적인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공화련이 뜨끈하게 데운 통조림을 들고 와 천제현 앞에 내밀었다.

“먹어!”

2급 마수고기로 만든 통조림. 쇠약해진 혼성술사에게 즉각적인 체력회복 효과를 부여하는 음식이었다.

공화련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끼 여우는?”

“오면서 남긴 흔적을 지우고 있어요.”

두세 입 만에 통조림을 싹 다 비우고 나자 치료용 단약의 효과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지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견융족은 늑대족 마수령들의 무리에요. 늑대족은 추적에 능하기로 유명하죠. 새끼 여우가 줄곧 우리 흔적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습격 받아도 벌써 몇 번은 받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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