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7
제397장 처절한 희생
호수 표면에 어지럽게 떠다니던 나무토막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그건 나무토막이 아니라 몸길이가 2장도 넘는 악어들이었다.
몸체의 극히 일부만을 물 위로 내놓고 있었던 탓에 언뜻 나무토막으로 보였던 것이다.
“제길, 남문악어예요!”
남문악어는 1급 상위 물 속성 마수로, 물 계열 능력을 쓰는 놈들이었다. 대략 연체 8, 9성 술사들과 비슷한 급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평소의 천제현이었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겠지만, 지금은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데다 마력까지 고갈 직전이었다. 도저히 더는 싸울 힘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최소 백 마리가 넘는 악어 떼는 두 사람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공화련이 숨을 들이켰다.
“어쩌지?”
“어쩌긴요, 도망가야죠!”
두 사람의 추락이 영역본능이 몹시도 강한 마수들을 도발한 건 확실했다. 딱 봐도 그다지 온순한 성격은 못 되는 녀석들이 빠른 속도로 몰려들고 있었다. 악어들의 겉가죽에 새겨진 짙은 남색의 주문이 빛을 발하면서 모종의 마력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곧이어 호수 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강력한 물 속성 마력이 마치 거대한 뱀처럼 천제현의 온몸을 옥죄여왔다. 사냥감을 옭아매 저항능력을 빼앗은 뒤 조각조각 찢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천제현이 맹렬한 검기를 휘둘러 속박을 끊는 동시에 악어 두 마리를 동강 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마수들을 더 자극하기만 했을 뿐,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었다.
“안 되겠어! 물속이 온통 다 마수야!”
공화련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까지 데리고는 못 빠져나가, 난 신경 쓰지 말고 혼자 가!”
공화련은 혼성 5성 정점, 남하국 군대에서는 중, 고급 장수에 해당하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전투형 정령이 없는 그녀는 대부분의 전투무공과 무학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은 몸이었다.
다시 말하면 방어무공인 성광불멸체 말고는 다른 능력이 전무하다는 뜻이었다.
공화련의 전투력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끽해야 방해나 되는 게 고작이었다. 혼자라면 몰라도 천제현이 공화련까지 데리고 여기서 살아나갈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네까짓 짐승 몇 마리가 날 막겠다고?”
마력을 끌어올린 천제현이 있는 힘을 다해 앞쪽으로 움직였다. 한 뼘 한 뼘이 천근만근이었다. 악어 몇 마리를 연이어 해치운 그는 공화련을 챙기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주변 수면의 부글거림이 한층 격렬해졌다. 악어 떼가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큰아가씨, 받아요!”
천제현이 마력기관총을 공화련에게 넘겼다. 서로 마주보고 끌어안은 자세에서 앞쪽의 악어들을 처치하는 일은 천제현의 몫이었다.
“뒤를 엄호해주세요.”
그 순간 뒤쪽에서 악어 한 무리가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총을 쥔 공화련이 방아쇠를 힘껏 당기자 빛의 탄알이 흩뿌려져 나갔다. 수면이 뿌옇게 수증기로 뒤덮이면서 두꺼운 악어가죽에 구멍이 뚫렸다. 고열로 인해 몸통이 아예 관통당한 모습이었다.
‘살았구나! 마력기관총이 있는 한 악어들도 마음대로 접근하지 못할 거야!’
공화련은 드디어 자기가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악어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고온의 마력 탄알과 호숫물이 만나 생겨난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총알이 하나하나 악어들의 몸뚱이에 명중했다.
마력기관총의 우월한 사격속도와 살상력이 제 역할을 십분 발휘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서서히 악어 떼의 포위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총알이 없어, 탄창 얼른!”
“제길, 좀 아껴 쓰시지. 이제 없어요!”
질겁한 공화련이 외쳤다.
“그럼 어떡해!”
천제현이 마력권총을 건네주며 말했다.
“일단 이거라도 써요!”
권총은 사격속도가 너무 느렸다. 이걸로 저 많은 마수를 어떻게 해치운단 말인가. 하지만 따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천제현이 가진 무기는 전부 특수 개조를 거쳤기에, 이 마력권총에서 발사되는 마력 탄알은 현혼술사의 호신마력도 관통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한 발이면 악어의 숨통을 끊어놓기에 충분햇다.
문제는 죽어 나자빠지는 동족의 모습에 흥분한 마수들이 점점 더 악에 받쳐서 덤벼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부터 얼마 남지 않았던 천제현의 마력은 이제 정말 바닥만 남은 상태였다. 이제는 성광불멸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불멸체가 깨지면 그 순간 목숨도 끝장이다.
인간의 연약한 육체쯤은 마수들의 힘에 간단히 으스러질 것이다.
“안 되겠어요, 못 움직이겠어요.”
결국 체내의 마력이 거의 다 고갈되고 말았다. 기슭까지는 최소한 50여장 이상이 남은 상황, 본래 혼성술사에게 그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의 천제현에게는 생과 사를 갈라놓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큰아가씨, 아무래도 못 올라갈 것 같아요.”
천제현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무서워요?”
천제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공화련은 일순 마음이 찡해졌다. 실없는 줄로만 알았더니, 위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자기를 지켜주려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너도 안 무서워하는데 내가 무서울 게 뭐 있어. 기껏해야 같이 죽기밖에 더하려고.”
“큰아가씨, 이거 꽉 쥐고 있으세요.”
천제현이 유명검의 검집을 불쑥 공화련의 손에 쥐어줬다. 뭐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공화련이 입을 떼기도 전에 천제현의 질문이 이어졌다.
“사실 줄곧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당황한 공화련이 되물었다.
“뭐가?”
천제현은 자못 진지한 표정이었다.
“예전에 서련 아가씨가 그랬어요. 큰아가씨가 원하는 사내는 위대한 영웅이나 세상을 구한 대현자라고. 그럼 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상황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당연히 있죠. 알려주세요, 죽더라도 알고 죽어야겠으니까!”
“알았어, 알았어. 너, 너 정도면 합격이지! 곧 죽을 목숨이니 부질없긴 해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천제현이 돌연 유명검을 들어 공화련이 쥐고 있는 검집에 세차게 꽂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을 전부 쏟아 부은 동작이었다. 폭발적인 마력에 거센 물보라가 일어나는 동시에 엄청난 추진력이 공화련의 몸을 밀어냈다.
“안 돼!”
유명검에 밀려 공중으로 떠올랐던 공화련은 절묘하게 호수 기슭으로 떨어졌다. 공화련은 힘을 몽땅 소진한 천제현이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악어들이 최후의 일격을 위해 그의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천제현! 천제현!”
“전 애초에 이 세계에 속한 몸도 아니었으니 이만큼 놀아봤으면 만족해야죠!”
천제현이 오른손을 들어 승리의 손동작을 만들어 보였다.
“두 아가씨는 행복하셔야 돼요!”
천제현의 모습이 물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수많은 악어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눈에 보이는 건 온통 어지러운 물보라뿐, 이미 당했으리라.
“싫어! 얼른 나와!”
공화련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죽다 살았다는 안도감은커녕 한없는 가책과 고통이 그녀를 덮쳐왔다.
악어 떼가 천제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려던 그때, 호수 중앙에 갑작스러운 파문이 일었다. 빠른 속도로 확산하는 물결과 함께 숨 막히는 위압감이 수면 전체를 집어삼켰다. 악어들은 뭔가 두려운 존재가 나타났음을 감지했다. 강대한 혼돈의 마수가 출현한다면 이와 같을까, 용이 내뿜는 것보다도 위협적인 기운이었다.
순간 물속에서 새하얀 형체가 솟아올랐다. 두세 사람을 합친 정도의 키에 전신이 티끌 한 점 섞이지 않은 백색이었다. 털가죽은 매끄러운 비단, 또는 투명하게 빛나는 백옥을 연상시켰고 두 눈은 최상급 비취와 같은 청록색이었다.
그 새하얀 형상의 정체는 꼬리가 두 개 달린 여우요괴였다.
여우의 기운을 감지한 악어들이 기겁을 해서는 내빼기 시작했다. 이때 여우요괴의 청록색 눈동자가 번쩍 빛나는가 싶더니 사방으로 무형의 정신파동이 발산됐다.
그러자 악어 수백 마리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몇 초간 꼼짝 않던 악어들의 눈에 곧이어 기이한 녹색 빛이 번뜩였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에 복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악어들은 서로에게 달려들어 동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공화련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백 마리 악어 떼가 서로 죽고 죽이고 있었다. 호수 표면이 순식간에 시뻘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 사이 백색 여우요괴는 호수 바닥에서 천제현을 건져 훌쩍 기슭으로 뛰어올랐다. 요란하게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 여우가 자그마하게 줄어들더니 위풍당당한 여우요괴에서 깜찍한 새끼 여우로 변했다.
에취.
작아진 새끼 여우가 재채기를 했다. 새끼 여우의 두 눈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변신능력이 각성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주인은 꼼짝없이 황천행이었을 것이다.
“잘했어, 여우야!”
허겁지겁 천제현 위에 올라앉은 공화련이 연거푸 그의 뺨을 때렸다.
“괜찮아? 눈 떠! 눈 떠보라고!”
천제현은 눈꺼풀이 납덩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손이 얼굴을 찰싹찰싹 치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큰아가씨? 죽지는 않았구나!’
천제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본 공화련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썽덩어리가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상체를 숙인 공화련이 천제현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무책임한 자식,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 서련이 얼굴은 어떻게 보라고? 날 평생 죄책감에 빠뜨리려 했겠다, 죽을 때까지 미워할 거야! 당장 일어나!”
공화련은 몹시 복잡한 심경이었다.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프기도, 화가 나면서도 가슴이 찡한 것도 같았다. ‘자기는 원래 영웅 놀이가 취미라고 쳐, 그럼 남은 사람은? 서련이는 어떨지 생각이나 해봤어?’
어떤 상황에서든 천제현은 죽어서는 안 됐다, 절대로. 기적상회도, 동생도, 공화련 자신 역시 천제현이 필요하니까.
“……알았으니까 그만 흔들어요. 마수한테 찢겨 죽는 게 아니라 아가씨 때문에 골이 흔들려서 죽겠어요.”
힘없이 한마디를 뱉은 천제현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공화련을 본 순간,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크, 크, 큰…….”
“크긴 뭐가 커? 머리라도 다친 거야?”
공화련이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천제현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얼마 못 가 흠칫 놀란 그녀는 두 뺨을 새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공화련은 늘씬한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자세로 천제현 위에 올라타 있었다. 실로 애매한 모양새, 상체를 숙인 탓에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는 한 자가 채 되지 않았다. 이 자세에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공화련의 가슴에 탐스럽게 치솟은 두 개의 산봉우리가 한껏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아래로 처진 옷깃 사이로 안쪽의 야릇한 경치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