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
제396장 목숨을 건 후퇴
십여 분 전.
천제현과 고천추, 공화련, 그리고 얼마 안 남은 십여 명의 그리핀 기사들은 왕성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전선요새에서 참패했으나 왕성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으니 희망이 있었다.
이때, 천제현의 소매 안에 있던 새끼 여우가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허둥지둥 대며 천제현에게 손짓을 했다.
“귀찮게 됐군요. 견융족 놈들이 추격대 수천 명을 붙였습니다. 그중 몇은 이미 바짝 따라붙었고요.”
천제현은 일행에게 말했다.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대로 가다간 다 잡힐 것 같습니다. 일단 흩어져서 운을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왕성에 소식을 알려야 하니까요.”
고천추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방법은 그것뿐인 것 같았다.
“저는 부상이 심하니 혼자 가겠습니다. 부디 모두 무사하십시오!”
고천추는 부상이 심해 천제현을 따라간다 해도 살아남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의 주의를 끌어 일행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게 더 나을 수 있었다.
“흩어지세요!”
일행은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각자 왕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천제현은 공화련과 함께 그리핀 한 마리에 타 있었다. 공화련은 무공 실력이 높지 않은 편이고, 천제현은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어찌어찌 힘을 모아 도망가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끼 여우가 불안하고 다급한 소리를 냈다.
“끽끽!”
첫 번째 추격대가 거의 다가왔음을 경고하는 소리였다.
머리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느낀 공화련이 고개를 들자 독응수를 탄 견융족 병사들이 보였다. 인원수는 어림잡아도 20명은 넘을 것 같았고, 전부 정예병으로, 현혼급의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송곳니 왕이 보낸 1차 추격대였다. 마림보다 먼저 천제현을 추격한지라 먼저 만나게 된 것이다. 공화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벌써 따라잡히다니!’
추격대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죽여라!”
“조무래기 몇 마리에 불과합니다. 아가씨, 놀랄 것 없어요!”
만신창이가 된 천제현은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호리병 안에서 마력기관총을 꺼내 일반 탄약을 넣고 등에서 유명검을 뽑았다.
“제 등 뒤에 서 계세요. 크게 흔들릴 테니까 잘 잡으시고요.”
공화련은 목 안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다 죽어가고 있으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키려 하다니. 풍전등화와도 같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가씨, 우린 지금 같은 줄에 매달린 신세예요. 그러니 너무 많은 걸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이제 우린 운명공동체라고요. 아가씨와 저 둘 중 누구도 혼자 살아남을 순 없죠.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전 지금 무척 기뻐요.”
그의 말을 들은 공화련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이 와중에 기쁘긴 뭐가 기쁘다는 거야?”
“큰아가씨와 태어난 시각은 달라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을 수 있잖아요? 우리 운명이 연결되어 있나 봐요. 하늘의 뜻이죠! 영광이에요!”
“흥! 누가 너랑 같이 죽어 준대?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을 하다니.”
하지만 천제현의 실없는 소리로 공화련의 공포와 불안감은 한결 가벼워졌다.
“와라!”
견융족 기병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며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화살이 폭우처럼 빽빽하게 둘을 향해 날아왔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천제현은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었고, 공화련을 보호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진 않았지만, 문제는 대다수의 화살이 그리핀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큰 그리핀을 어떻게 전부 방어한단 말인가.
천제현은 신식으로 화살의 궤적을 파악한 후 유명검으로 검기를 쏘아 화살을 떨어뜨리며 교묘하게 화살이 그리핀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방어했다. 가장 중요한건 그리핀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핀이 죽으면 무슨 수로 왕성까지 간단 말인가?
그러나 마력이 고갈된 천제현이 그 많은 공격을 막아내며 그리핀을 보호하다 보니 곧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가 그리핀을 보호하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허점을 발견한 견융족 기병대장은 활을 들어 천제현의 가슴팍을 노리고 화살을 발사했다.
“이런!”
신식을 운용하고 있던 천제현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다만 상대의 궁술이 너무나 뛰어난 데다 천제현에게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화살을 피하면 그리핀이 맞을 것이고, 화살을 피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위기일발의 시점이었다.
갑자기 공화련이 뛰어나와 천제현의 앞을 막아섰다. 마력이 담긴 화살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성광불멸체를 뚫고 공화련의 오른쪽 다리에 박혔다.
공화련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리핀의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가씨!”
천제현이 급히 공화련의 몸을 끌어안았다.
정신을 차린 공화련은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
견융족 한 명이 그 틈을 타서 장창을 뽑아 들고 날아오고 있었다. 창끝이 마력의 힘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보니 최소 혼성 6성의 고수인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혼성 6성 술사의 공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천제현이었지만, 지금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천제현도 아니었다.
그가 기관총을 들어 올려 방아쇠를 당기자 빛의 탄알들이 적을 향해 발사되기 시작했다. 마력무기를 처음 본 견융족들은 제대로 방어조차 못했고, 총알 십여 개가 거의 다 독응수와 병사들의 몸에 명중되었다.
강철조차 녹일 정도로 높은 온도를 지닌 총알이다. 그 총알에 맞은 독응수는 즉시 치명상을 입고 허우적거렸다. 그 통에 추격대장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천제현은 다시 한 번 남은 적들에게 기관총을 발사했다.
처참한 비명과 함께 또다시 독응수 두 마리가 백여 장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자 견융족 전사들은 아예 활을 내려놓고 근접 무기를 든 채 앞뒤 안 가리고 포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제현이 들고 있는 기관총은 총알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탄창을 갈 틈도 없었다. 천제현은 힘겹게 검기를 발사해 적 둘을 베었으나 다른 한 명이 그리핀에게 접근한 것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 견융족 기사는 천제현이 탄 그리핀의 배에 창을 찔러 넣은 뒤 길게 잡아당겼다. 그리핀의 배에 끔찍한 상처가 생겼다.
“꿰에에에엑!”
그리핀이 처참하게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바람에 천제현과 공화련은 떨어질 뻔했다.
“이런 젠장!”
그 와중에도 공화련은 천제현의 기관총을 넘겨받아 탄창을 갈았다.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마력탄알이 순식간에 갑옷을 뚫고 적군 몇 명의 몸에 구멍을 냈다.
“아가씨, 잘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견융족 기병들은 아직도 열 명 넘게 남아 있었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적들은 멀리서 지원하고 가까이서 공격하는 등 보조를 잘 맞추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천제현의 상태도 문제였지만, 천제현에게 공중전은 너무 어려운 전투였다.
휙!
그때, 빠르게 다가온 칼날 하나가 그리핀의 목을 베었다. 이미 몸 여기저기에 부상을 입고 있던 그리핀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을 뒤집은 채 추락했다.
“안 돼!”
공중에 내팽개쳐진 천제현과 공화련 역시 중심을 잃고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탈것을 잃은 그들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그 모습을 본 견융족 기병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천제현과 공화련은 고도 100여 장에서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파열음이 귓가를 할퀴었다. 지면이 곧 코앞이었다. 이런 높이에서 떨어졌다가는 강철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도 오장육부가 모조리 파열되고 말 것이다.
더 위험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응수를 타고 쫓아오는 견융족 병사였다. 추락 직후부터 두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려는 독응수들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꺼져!”
천제현의 검기가 독응수의 뱃가죽을 가르는 동시에 시뻘건 피와 내장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때 공화련의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독응수의 발톱에 붙잡힌 공화련이 눈에 들어왔다. 몸통 쪽으로 창이 한 번 찌르고 들어오는 게 보였지만, 평범한 독응수 기병의 마력으로 공화련의 방어무공을 뚫기란 불가능했다.
공화련이 창 자루를 붙잡고 휘둘러 다른 쪽 끝을 잡고 있던 기병을 저만치 밀어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천제현이 유명검을 한 바퀴 돌려 비수를 잡는 듯한 자세로 감아쥐더니 무서운 기세로 집어 던졌다. 그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보검이 공화련을 노리던 독응수를 꿰뚫었다. 마수는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숨통이 끊겼다.
이 순간 폭발적으로 발산된 마력에 검신으로부터 청백색 화염이 치솟았다. 무시무시한 심연유명화가 독응수와 기병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글거리는 화염은 곧 팔다리가 달린 형상을 갖췄다. 흡사 악마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유명! 처치해!”
“존명!”
원소 형태로 소환된 악마 유명은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었다. 타오르는 유성처럼 돌진한 유명이 독응수 기사들과 충돌하면서 찬란한 화염 덩어리 예닐곱이 허공을 수놓았다.
천제현은 기령이 빠져나간 유명검을 쥔 채로 공화련과 함께 추락 중이었다.
풍덩!
풍덩!
초원 한가운데, 거울처럼 잔잔하던 호수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단번에 호수 밑바닥까지 처박히면서 받은 충격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내장이 터져 죽었을 수준이었다. 천제현은 호수 바닥에 있던 바위와 꽤나 친밀한 몸의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그래도 충격에 산산이 조각난 바위와 달리 천제현의 머리통은 무사했다. 잠깐 눈앞이 아찔했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는 두 다리로 호수 바닥을 한 번 박차고는 빠르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저 앞쪽에서 공화련이 연거푸 허우적대고 있었다. 공화련은 아무래도 수영에 별 조예가 없는 듯했다. 허벅지에 꽂힌 화살 때문에 움직임이 불편한 것도 이유였다.
빠르게 헤엄쳐간 천제현이 공화련의 허리를 안아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후아.”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던 가운데 공화련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저야 명이 질긴 놈이라 당연히 괜찮은데, 큰아가씨는 어때요? 심하게 다친 거 아니에요?”
천제현의 손이 공화련의 육감적인 몸을 위아래로 더듬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평소와 달리 어디까지나 공화련을 염려한 탓이었다.
공화련의 몸에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천제현은 허벅지에서 박힌 화살을 마력으로 끊어냈다.
“올라가서 상처부터 치료해야겠어요.”
공화련이라고 천제현의 음흉한 손길을 못 느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헤엄쳐온 새끼 여우가 입에 물고 있던 유명검을 천제현에게 내밀었다.
유명검을 받아든 천제현이 새끼 여우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악마 유명은 여전히 공중에서 견융족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독응수 기병이 저 위에 붙잡혀 있는 덕분에 두 사람은 물가로 올라갈 시간을 벌었다.
천제현이 한 손으로는 공화련의 풍만하고도 몰캉몰캉한 몸을,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명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곧 물속에서 마력을 분출하며 발을 구르자 엄청난 속도로 호수 기슭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끼익!
이때 새끼 여우가 경고음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