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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394화 (390/729)

# 394

제394장 뒤집어지는 전황

방금 전까지 격전을 벌인 남하군에게 추격병을 붙일 여력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으리라.

두 기병부대의 병력은 각각 4, 5만 정도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용병술의 핵심은 병력 규모가 아닌 공격 시점에 있었다.

기병부대는 요새 입구를 지나 번개처럼 빠르게 초원을 향해 달렸다. 그들은 곧 엉망으로 엉켜 버린 실타래 속에 날카로운 칼 두 개를 꽂듯, 양옆에서 견융대군을 미친 듯이 베기 시작했다.

공성에 실패한 채 성루의 화살을 피하느라 허둥지둥 퇴각하던 견융군 병사들은 기습까지 당하자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고,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소 1만 명의 견융족들이 목숨을 잃었고 기병부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체가 대량으로 남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제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멋지다!”

역시 백전의 노장군이었다. 기병부대의 기습은 더없이 적절했다.

공성 실패는 견융족에게는 참담한 좌절이었다. 그런데 철수 과정에서 또다시 약 대량의 병력을 잃게 만든다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만 되면 다시 한 번 성을 공격하는 건 엄두도 못 낼 것이고, 비참하게 초원으로 도망가야만 할 것이다.

남하국도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으나, 대부분이 요새가 파괴된 것에 불과했다. 1년 반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다시 수복 가능했다. 남하국 주둔군 중 주력부대는 아직 건재했으니까.

‘남하왕의 전사만 아니라면…… 깔끔한 승리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이변이 벌어졌다.

전장 한가운데서 음울한 북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였다. 그 낮지만 거대한 소리에 대지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북소리에는 살벌한 전의가 담겨 있어 허겁지겁 도망가는 견융군의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그 소리를 들은 동방전의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퇴각하라! 속히 퇴각하라!”

그러나 지휘대에서 내려와 있던 동방전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십여 초가 지나고, 전방에 경악스러운 변화가 생겼다.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던 호각이며 북소리도 일제히 멈췄다.

이윽고 견융대군의 중앙에 거대한 흑기가 올라왔다.

가지런히 정렬된 부대였다. 전쟁 시작부터 지금까지 미동도 없이 견융군의 중앙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그 부대는 요동치는 파도 한가운데 돌연히 나타난 암초처럼 위험천만해 보였다.

‘큰일이다! 견융족 놈들에게 아직 여력이 있었구나!’

적들은 지금까지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 심지어 퇴각 명령마저도 눈 속임수였다. 적군 사령관은 동방전의 용병술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동방전은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는 견융족 같은 오랑캐 부족 사이에 이렇게 교활한 사령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저 부대의 사령관은 대체 누구지? 저 부대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동방전은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견융초원에 그가 상상조차 못한 변화가 생겼는데, 남하국은 그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니.

“송곳니 왕! 송곳니 왕! 송곳니 왕!”

견융대군이 소리 높여 한 사람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견융초원에서 지고무상의 힘과 지위를 상징하는 이 칭호는 견융의 병사들을 광기와 흥분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황제가 등장한 것처럼.

뒤죽박죽이 되었던 견융대군의 깃발들이 동시에 사라지고 군영 중앙에 가지런히 정렬된 흑기가 일제히 떠올랐다.

그 흑기는 한 덩어리인 양 짜임새 있게 앞을 향해 밀고 들어왔다. 전방에 있던 패잔병들은 어느샌가 사라진 상태였다.

남하국 기병부대는 미처 깃발을 보지 못했지만, 주변의 적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적군이 물밀 듯 밀려들고 있어 퇴각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대융국의 깃발이다!”

적군 한가운데 떠오른 깃발을 본 동방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저건 송곳니 왕의 부대다. 견융초원에 새로운 송곳니 왕이 나타났구나!”

이제는 천제현도 송곳니 왕이라는 칭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견융족 중에서 세력이 가장 큰 종족은 들개족과 늑대족이었다. 그들은 야수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숭배하므로 견융초원에서 송곳니는 많은 부족의 토템이자 힘과 지위의 상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견융족들은 지위가 가장 높은 자를 송곳니 왕이라 추대한다. 그 칭호는 마수령의 언어를 직역한 것으로 인간들의 국왕과 동급이라고 볼 수 있다.

송곳니 왕의 통치가 없는 견융초원은 모래알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는 견융족들이 연맹을 해도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남하국은 그들 사이에 분란을 조장함으로써 아주 쉽게 연맹을 와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송곳니 왕이 등장한 이상, 견융초원은 다시 한 번 대융족으로 부상할 수 있다. 이것은 남하국이 거대한 위기를 눈앞에 뒀다는 말과 같았다.

최후의 송곳니 왕이 죽은 후, 견융초원에는 백 년 넘게 새로운 왕이 나타나지 않았다. 각 부족의 실력이 비등했기 때문에 송곳니 왕 자리를 놓고 끊이지 않는 전란만 벌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송곳니 왕이 탄생했다면 추측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 송곳니 왕이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부족을 무릎 꿇렸다는 것.

‘방금 전의 공격은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인가?’

송곳니 왕의 군대가 움직였으니 진정한 전투는 이제 비로소 막을 올린 셈이었다.

‘큰일이다! 위험해!’

동방전은 기병부대를 철수시키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견융대군이 둘로 갈라지면서 흉악한 검은 부대가 혼란스러운 전장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10만 명 정도로 이뤄진 이 부대의 기병들은 전부 검은 전투늑대를 타고 거대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기와 방어구, 탈것까지 전부 동일한 10만 명의 병력이었다.

각각의 낭기병(狼騎兵)들은 모두 등에 흑기를 꽂고 있었는데, 그 깃발에는 야수의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다가왔으나 강한 죽음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공포스러운 살기가 전장 전체를 뒤덮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선 낭기병 한 명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두운 금색 비늘갑옷을 입은 그자는 몸이 어찌나 거대한지 8척도 넘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흉측한 흉터들이 가득했으며 그중 가장 큰 검흔은 그의 머리와 얼굴 전체를 반으로 가로질렀다. 흉터 주변에는 봉합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에는 거대한 철추가 들려 있었는데, 그 철추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가 철추를 휘두르자 공기마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자가 타고 있는 것이 머리 셋 달린 늑대, 즉 삼두마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삼두마랑은 칠흑처럼 검었으며 털은 하나도 없어 암석 같은 피부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놈의 체내에서는 화염이 요동치는 듯했다. 보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3급 마수였다. 전설에 따르면 혼돈시대의 흉수, 삼두지옥견의 혈통으로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송곳니 왕!”

“송곳니 왕!”

그를 본 견융족 병사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양옆에서 돌진하던 남하기병들은 완벽히 전투태세를 갖춘 견융 낭기병들을 발견했다. 삼두마랑의 엄청난 기운이 그들이 탄 전투마들을 혼란에 빠뜨렸고, 말들이 울부짖기 시작하자 가지런하던 돌격 대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송곳니 왕? 저자가 송곳니 왕이란 말인가?”

기병대장은 대규모의 기병이 돌격을 시작한 이상 중간에 멈추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병부대의 규모가 너무 커 명령 전달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수를 명령해 봤자 자멸할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돌격!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라!”

송곳니 왕이 아무리 강해봤자 만 명의 철기병들을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기병들이 이 정도의 속도로 달려들면 진령급 고수라 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송곳니 왕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철추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반경 3여장 범위에 힘이 일렁이면서 강렬한 마력장을 형성했다.

이윽고 그가 무기를 높게 치켜 올리자 가는 번개 한 줄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와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거대한 먹구름이 나타났다.

“자금뇌신당(紫金雷神?), 너의 분노를 보여라!”

남하국 기병들이 적군 진영으로 돌격해 들어온 순간, 전장의 상공에 번개가 우르릉거렸다. 그리고 수많은 번개들이 폭우처럼 남하 기병들을 향해 쏟아지자 기병이고 전투마고 할 것 없이 번개에 맞아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송곳니 왕의 손놀림 한 번에 200여 명의 남하 정예기병이 죽은 것이다. 남은 기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구나. 큰일이다!’

“마림은 어찌 되었느냐?”

송곳니 왕은 남하 기병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전방에 우뚝 선 요새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친히 손을 쓰게 만들다니!”

새로운 송곳니 왕은 다시 한 번 그 살벌한 철추, 자금뇌신당을 들어 올렸다. 그의 냉혹한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침묵을 지키던 십만 마랑병들이 일제히 돌진을 시작했다. 그 속도는 남하 기병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푸른 급류와 검은 급류가 맹렬하게 부딪혔다. 검은 급류는 해일처럼 순식간에 남하국의 정예 기병부대를 삼켜 버렸다.

‘이길 수 없는 전투다!’

남하국의 기병들이 탄 것은 질풍마로, 1급 마수에 불과했다.

반면 대융국 기병들이 탄 것은 2급 마수인 악마랑이었다.

악마랑들은 최소 혼성 1성의 실력을 지닌 마수다. 그러나 마랑의 실력을 논하기 전에 남하 기병들이 직면한 것은 혼성 술사 10만 명으로 구성된 대군이었다. 그 숫자와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악마랑들은 폭발적인 돌격, 마력 방어, 마염 공격 등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리라면 그리 위협적인 마수는 아니겠지만, 그런 것이 십만 마리가 모이니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견융기병들은 대다수가 혼성 1, 2성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정예병이라면 눈을 대륙으로 돌려도 손에 꼽히는 병력이라 할 수 있었다. 소국에 불과한 남하국의 정예부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로 인해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수많은 남하 기병들이 굶주린 늑대에 물리고 찢겨 목숨을 잃었다.

송곳니 왕은 번개가 번쩍이는 자금당을 들고 적군 사이를 휘저었다. 철추가 휘젓는 곳마다 수많은 병사와 말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송곳니 왕!”

“송곳니 왕!”

송곳니 왕이 이끄는 병력의 엄청난 전투력을 본 견융대군의 사기가 다시 한 번 하늘을 뚫을 듯 올라갔다. 그들은 미친 듯이 반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십만 기병. 그들은 장성군단의 모든 병력이었다.

그 소중한 병력이 동방전의 눈앞에서 참혹하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남하국 진영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확신하던 그들이었는데, 눈앞의 참상에 정신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광기 어린 강력한 적들을 앞에 둔 남하군들은 뼛속 깊이 공포를 느꼈다.

“인간들을 말살해라!”

악마랑 기병들은 남하 기병을 갈기갈기 찢으며 한 자루의 검은 검처럼 전방의 요새를 향해 돌진했다. 남하국 장수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각 요새의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전투를 준비하라!”

“저들을 성벽 밖에서 막아내야만 한다!”

이때 송곳니 왕이 다시 한 번 손에 잡은 자금뇌신당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저에게 힘을 주소서!”

하늘 한복판에서 자금뇌신당으로 거대한 번개 한 줄기가 내리 꽂혔다. 송곳니 왕은 무기를 들고 용맹스럽게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광포한 힘이 거수의 공격으로 넝마가 된 성문을 다시 한 번 공격하자 성문 한 가운데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남하국 수비군들은 그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무시무시하다!’

‘저런 무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송곳니 왕의 실력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일격에 성문을 박살 내자 악마랑 기병들은 일제히 깊고 넓은 해자에 뛰어들어 왕이 낸 틈을 통해 요새로 쳐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남하국 장병들은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서쪽 전선 함락, 서쪽 전선 함락!”

“지원을 요청합니다! 속히 지원이 필요합니다!”

요새 여기저기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공포스러운 적의 앞에서 남하국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전선 수비군은 종잇장처럼 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동방전은 분연히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저런 군대는 하루아침에 양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견융초원에 이런 군대가 나타났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놈들이란 말이냐!”

고천추는 동방전을 보며 말했다.

“사령관님, 전방 요새가 곧 함락될 것 같습니다. 빨리 왕성으로 후퇴하여 수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당장 왕성으로 떠나시오!”

송곳니 왕이 성문을 박살 낸 순간, 동방전은 전선 방어선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성에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고 즉시 전투를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전방 방어선이 무너졌으니 다음으로 공격 당할 곳은 왕성입니다. 왕성이 함락되면 남하국도 끝장입니다!”

공화련이 물었다.

“그럼 사령관님께서는?”

“노장은 이 전선만 50년을 지켰소!”

동방전은 창을 세우고 무서운 기세로 밀려들어오는 낭기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여기에서 싸울 것이오! 내 결정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시오! 남하국엔 그대들이 꼭 필요하오! 어서 가시오!”

전선요새는 다음 공격을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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