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
제392장 반란 진압
견융대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기세등등하게 요새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최전방에는 십여 마리의 거수들이 경천동지할 발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수백, 수천 개의 주문이 걸린 화살들이 그들의 몸에 떨어졌으나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다. 진혼급 이상의 사수들, 또는 중형 노포로 쏜 화살만이 간신히 그들을 상처 입힐 수 있었다.
동방전은 망루 위에서 두 손으로 보검을 짚고 서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참혹한 전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전장 곳곳에서 수시로 전령들이 달려와 성곽 방어 상황에 대해 보고했고, 그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반시간이 지나 전투가 백열화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근래 보기 드문 대규모 전쟁이었다. 견융족은 맹렬하게 진공했지만 남하국의 전열은 붕괴되지 않았다. 전황은 아직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다.
백전노장인 동방전은 전장을 예리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현재 견융족의 사상자 수는 남하국의 3배에 달했고, 견융족의 공습부대는 전멸하다시피 했다. 남하국의 사상자 수도 적은 건 아니었지만 전쟁에 참여한 군단이 절반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병력을 교체해 전투력을 유지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었다.
견융족은 공격 측, 남하국은 수비 측이었다.
정으로 동을 제압하고, 느림으로 빠름을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남하국의 승리의 관건이었다.
동방전은 적을 섬멸해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 따위는 버리고 착실히 방어에 집중함으로써 견융군단의 살벌한 기세를 한 풀 죽게 만들 생각이었다. 첫 번째 공성전에 실패하기만 한다면 두 번째 공세를 펼치는 건 어렵게 될 테니까.
견융족에게는 이미 공중부대가 없는 상태였고, 공성에 사용된 거수들도 상당수 쓰러졌다. 이런 전투는 처음에만 상대의 기를 꺾어 놓으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곤 한다.
그리고 조금 전, 뭔진 몰라도 요새에 신비롭고 거대한 위압감이 뻗어 나오면서 적들의 질서를 무너뜨린 상태였다. 즉, 견융대군은 여전히 강했지만, 실상은 조금씩 패색을 띠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거의 다 됐군.”
동방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병부대를 동서 30번 요새에 집결시켜라. 견융족 놈들이 후퇴하면 양 날개 부분에서 기습한다. 공격은 단 한 번만 하되, 공을 세우기 위해 질질 끄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15번 요새가 지원을 한다.”
이제 견융족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그의 계획은 적을 철저히 패배시키는 것이었다.
수십 만 견융대군이 철수를 시작하면 반드시 혼란이 생길 것이다. 그때 남하국의 철기군이 돌격하면 적어도 적의 목을 8~10만 개는 벨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견융족에게 두 번 다시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요새 상공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하왕이 죽었다!”
“남하군단은 속히 저항을 멈추고 투항하라!”
검은 칼을 든 견융족 고수가 요새의 망루 위에 올라가 왼손에 든 수급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수급을 알아본 남하국의 장수들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적의 손에 들린 것은 정말 남하왕의 머리였던 것이다!
“남하왕이 죽었다!”
“남하왕이 죽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남하군단 전체가 넋이 빠져 버렸다.
병사들은 공황에 빠졌다. 남하왕이 죽은 판국에 싸우긴 뭘 싸운단 말인가?
견융군은 적군의 이러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진군에 박차를 가했다. 남하군단의 사기가 추락한 지금 공격 강도를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동방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적군의 간계일 뿐이다. 폐하께서는 일찌감치 철수하셨는데 어떻게 적에게 살해당하신단 말이냐? 장수들은 들으라! 헛된 소리를 지껄여 병사들을 현혹시키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라!”
동방전의 말에 장군들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양 정신이 들었다.
그들은 즉시 겁을 먹고 후퇴하려 하거나 군심을 동요시키는 자들을 참하고 질서정연하게 군사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미세하게 떨리는 동방전의 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폐하께서 정말 적군의 손에 돌아가셨단 말인가?’
남하왕이 전선요새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군의 사기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며, 남하국 전체에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이다.
이 일의 진위를 당장 판단할 방법이 없는 동방전은 거짓이라고 믿기로 마음먹었다. 사령관인 그마저 동요한다면 그의 휘하에 있는 장령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전투에 임하겠는가.
이때, 천제현과 고천추, 공화련이 지휘부에 도착했다.
하나 같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이었다. 심지어 공화련까지도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천제현을 엄호하느라 최소 20명 이상의 견융족 전사들을 벤 것이다.
천제현은 기운이 떨어진 듯 몹시 쇠약해 보였다. 고천추와 공화련의 엄호가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견융족 전사들에게 목이 날아갔으리라.
고천추가 몹시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사령관님! 비보가 있습니다!”
동방전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룡군단이 반역을 저지른 것으로 의심됩니다!”
고천추는 다급하게 말했다.
“속히 반란을 평정하여 요새 내부에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뭐라고? 전룡군단이 반란을!”
동방전의 직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이 비보는 사실이라고.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왕천룡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천룡이라는 인물이 워낙 철저한 놈인지라 통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전룡군단이 정말 반역을 저질렀다면 전선요새는 엄청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밖에 또 한 가지 추측이 동방전의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바로 왕천룡이 반역을 저질렀다면 남하왕을 시해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즉, 방금 적의 손에 있던 그 수급이 정말 남하왕의 것일 가능성이 컸다. 고천추 등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당장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리라.
“왕명이오!”
그가 들고 있는 건 남하왕의 지존영패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건네 줄 수 없는 물건이다. 저 영패가 남하왕이 아닌 다른 사람 손에 있다는 건 딱 한 가지 가능성을 의미했다. 남하왕이 이미 죽었다는 것.
‘빌어먹을!’
동방전은 비통함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짐승 놈들이!”
천제현은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동방전 앞으로 나아가 공수하며 말했다.
“사령관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전선요새를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사령관님께 달렸습니다!”
고천추도 말을 보탰다.
“요새만 지켜낸다면 남하국은 무사할 것입니다. 허나 요새가 무너진다면 남하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보고합니다!”
그때 전령병 한 명이 황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사령관님! 서쪽 전룡요새가 공습을 받았습니다! 주둔군이 고전 중에 구조를 요청하는 봉화를 올렸습니다!”
동방전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벽을 치자 벽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혈응영(血鷹營)을 준비시켜라! 내가 직접 난을 평정하러 갈 것이다!”
혈응영은 동방 가문의 병력이자 무안군의 직속 부대로, 매우 희귀한 공군부대였다.
혈응영은 그 특수성 때문에 전선에서 가장 빠른 쾌속 부대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워낙 귀한 병력인지라 요새에 있어도 쉽게 움직여서는 안 되는 부대였고, 지금처럼 돌발 위기가 발생했을 때만 사령관의 직접적인 명을 받아 참전할 수 있었다.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고천추가 피리를 꺼내 불자 마지막 남은 수십 명의 호위 그리핀 기사들이 날아왔다.
동방전은 이미 혈응부대를 부른 상태였다. 이윽고 핏빛 옷을 입은 동방 가문의 장수 수백 명이 혈응수를 타고 요새 밖으로 날아올랐다.
천제현, 고천추, 공화련도 그리핀 한 마리에 올라타 혈응영과 함께 전룡요새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핀이나 혈응수 모두 매우 빠른 탈것에 속했으므로 전속 질주하자 반 시간도 채 되기 전에 동란이 발생한 전룡요새에 도착했다.
전룡요새에는 대혼란이 일어나 있었다.
전룡군단이 정말 반역을 일으킨 것이다. 아군 병력에 섞여 있는 견융족 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전투에 남하군단은 손을 쓰지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룡군단 중에서 왕천룡의 직속인 지룡부대만 반역을 일으켰다는 사실이었다. 그 밖에 수만 명의 병력들은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다.
전룡요새에는 전룡군단뿐만 아니라 다른 파벌의 고위 장령들도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상황이 매우 다급하다고는 하나 아직 붕괴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
“미쳤구나! 모두 미친 것이냐?”
전룡군단의 부장 한 명이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수하 수백 명을 이끌고 싸우고 있었다. 그는 이미 몸 십여 군데에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왕천룡이 남하국을 배신하다니, 믿을 수 없다!”
장창을 든 왕도는 지룡기사들과 견융족 고수들을 이끌고 포위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부장의 말을 들은 그는 차갑게 웃으며 소리쳤다.
“왕렬! 우리 가문이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을지 여부가 이번 전투에 달렸다. 왕천룡이 네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은 것은 네 녀석이 꽉 틀어 막힌 놈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가문의 대업을 막으려 들 줄은 몰랐구나! 내 너를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라!”
“왕위라고?”
왕렬이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견융족에게 비굴하게 허리를 굽혀 얻은 왕위를 어디에 쓴단 말이냐? 네놈들이 원한 것이 견융족의 노예 자리였더냐! 견융족 놈들이야말로 우리의 적이다. 남하국과 인간을 배신하다니, 너희는 마소보다 못한 놈들이다. 죽을지언정 너희를 따르진 않을 것이다!”
“좋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왕도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죽여라!”
지룡군단이 다시 한 번 돌격하자 왕렬이라 불리는 이 장군은 순식간에 다시 십여 곳에 부상을 당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전사한 상태였다.
전룡군 부장이 다시 한 번 칼을 휘둘렀다.
“으아악!”
처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왕렬의 한 팔이 땅에 떨어졌다.
왕도는 얼음장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불복종의 대가다. 저놈을 베어라!”
“이 역적! 죽어라!”
그때, 무시무시한 포효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수백 마리의 혈응수가 폭풍처럼 돌격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