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390화 (386/729)

# 390

제390장 배신(2)

움푹 패인 벽에서 왕천룡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제 그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겸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둡고 음산해진 얼굴에는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정령을 덧씌운 호신마력이 있었기 때문에, 남하왕의 급박한 일격은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없었다. 그저 내상 정도만 냈을 뿐이다.

“왕? 네가 가당키나 한가? 동방 가문이 가당키나 해? 우리 가문이야말로 왕이라 할 수 있지! 네놈은 왕의 자리를 뺏은 역당에 불과하다!”

왕천룡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대하 왕족의 혈통을 살려두면, 동방 가문의 은혜에 감지덕지 할 줄 알았는가? 잘못된 생각이지, 아주 큰 착각이야!”

고천추의 비난이 쏟아졌다.

“동방 가문이 아니었다면 대하국의 남은 강산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다! 네놈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견융족 놈들과 결탁을 하다니! 대하 왕족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모른단 말이냐? 이런 배은망덕한 놈, 천인공노할 짓을 하다니!”

남하왕은 후회가 밀려왔다.

세상만사 경험이 풍부한 가문의 어르신인 동방전은 이미 왕천룡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 겸손한 척하지만 그 속에는 무서운 야심을 품고 있는 인물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왕천룡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가 매우 위험한 인물임을 파악했기에 남하왕에게 경고를 했던 것이다.

만약 남하왕이 동방전의 경고를 듣고 왕천룡을 조금이라도 경계하며 의심했다면, 왕천룡에게 기습할 틈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면, 짐이 오늘 그 잘못을 고쳐야겠구나!”

동방 가문 무장 정령이 다시 나타났다. 이 정령은 상황에 따라서는 갑옷도 무기도 될 수 있었다. 남하왕은 이제 정령을 자색 대형 검으로 만들어 천지를 뒤흔드는 기세로 왕천룡을 찍어 내리려 했다.

진령 단계의 남하왕은 삼군 보다는 좀 약할지 모른다. 그러나 혼성 단계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실력 차를 보이는 진령 강자다.

그가 그 검으로 왕천룡을 찍어 내리기만 한다면, 왕천룡의 방어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소용없다. 필살의 일격을 날리는 것이다.

거대한 검이 그를 찌르기도 전에, 이미 강력한 위압에 눌린 왕천룡은 움직이지도 못했다.

남하왕의 분노가 쏟아졌다.

“죽어라!”

그 순간, 왕천룡 뒤로 한 장수가 튀어 나왔다. 그 장수는 허리에서 검은 장검을 빼내더니, 왕천룡을 막아서며 그 검으로 남하왕의 강력한 검을 막아냈다.

기습을 당했다 해도 남하왕의 공격은 진령 단계의 일격이다. 정면으로 남하왕의 검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진령 강자는 된다는 소리였다.

남하왕은 피가 흘러내리는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독이 더 심각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남하왕은 어두워진 낯빛으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네가 바로 그 유명한 남하왕인가?”

투구를 벗어던진 그 인물은 바로 견융족으로, 딱 봐도 강자로 보였다.

괴물 같은 눈빛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는 손에 흑색 장검을 들고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것 같은 투박한 외형 표면에는 거무스름한 화염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지옥의 노래 부족의 부족장, 명염검 마림이다!”

‘무안군이 여러 번 이야기한 그 신흥 부락인가?’

남하왕은 순간 스스로에게 비통함을 느꼈다. 무안군도 여러 번 이 부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남하왕은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동방전과 무안군, 그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구나!’

왕천룡이 지옥의 노래 부족의 부족장을 전룡 군단의 부관으로 위장시켜 요새로 진입시킨 것이다. 그 순간, 남하왕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선 요새의 부사령관 중 하나인 왕천룡이 배신을 했다면,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견융 강자 한 명만 요새로 데려왔을 것 같지 않았다. 더 많은 견융 강자와 더불어 견융 군대를 요새 안에 잠복시켰을 수도 있다.

게다가 왕천룡은 전룡 군단의 최고 사령관이 아닌가.

만약 왕천룡이 배신한다면 전룡 군단도 위험하다. 전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왕천룡의 직계인 지룡 기사는 모두 배신할 것이다. 1, 2천 명에 불과하지만 아주 강력한 부대가 배신하는 것이다.

‘큰일이다! 요새가 위험하다!’

아무리 견고한 요새라 해도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가 강할 뿐이다. 만약 적이 요새 내부를 뚫고 들어온다면, 이 요새가 여전히 난공불락일 수 있을까.

왕성 기병도, 창주 군단의 기병도 지금은 모두 지원이 불가능하다.

왕성에 몇십 만 명의 주둔군이 있지만, 대부분 관할 지역을 돌보는 군대였다. 멀리서는 이 급한 불을 끄기는 역부족이다.

“어리석은 인간의 왕이여!”

화려하지 않은 검은색 칼을 든 마림은 인간의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너는 지옥의 노래 부족이 진령 강자를 위해 특별히 만든 흑마술 독에 중독됐다. 해독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거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네 죽음이 바로 남하국 멸망의 시작이 될 거다.”

“허튼 소리!”

“인정하든 말든, 남하국은 완전히 패배했다.”

마림이 냉담하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인간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 너희는 반드시 멸망한다.”

마림의 냉정하고도 냉혹한 태도는 평소 견융족 모습과는 달랐다.

진령 단계의 무시무시한 강자라고는 하지만, 남하왕은 그 이름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온통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때 왕천룡이 불쑥 천제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하왕도 중요하지만 저놈도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꼭 저놈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마림이 왕천룡의 말을 듣고 천제현을 돌아보는 사이, 남하왕이 두 손을 합장하며 맹렬한 힘을 일순 끌어냈다. 그러자 하늘에 부적 주문으로 가득한 긴 창이 나타났다.

하지만 마림은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검은색 장검을 들고 응전했다.

두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어떤 소리도, 어떤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하왕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공격이 이루어지는 순간, 모든 힘이 흡수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마림의 무기는 마치 블랙홀처럼 남하왕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해 남하왕의 공격을 상쇄해 버렸다.

마림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왕은 내게 맡겨라. 너희들은 다른 놈들을 상대해라. 이 천제현이란 놈 빼고 모조리 죽여라!”

전룡군으로 변장했던 몇몇이 그 위장 차림을 벗어 던지자 모두 견융족의 유명한 고수임이 드러났다. 모두 혼성 9성 정점에 이른 자들이었다.

‘끝장났다!’

마림의 실력은 남하왕보다 조금 더 강한데다가 남하왕이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상태라 남하왕의 패배는 확실하다.

강한 실력의 마림 외에도 견융족에는 혼성 9성 정점의 강자가 5명이나 된다. 게다가 역적 왕천룡까지 더해졌다.

이제 혼성 9성 정점이 6명이다.

고천추와 새끼 여우는 많아도 1명 정도를 막아낼 수 있으니 승산 없는 전투다.

사태가 이 정도로 악화될 거라고는 천제현도 예상치 못했다. 사전에 낌새를 차리거나 준비도 전혀 못했다. 천제현과 공화련, 모두 위험에 빠진 것이다.

두 진령 경지의 강자가 맞붙자 들끓는 마력이 방 전체를 잡아 뜯는 듯했다.

마림은 시커먼 화염이 이글거리는 칼날을 들어 남하왕의 창을 쳐내면서 그 기세로 남하왕의 몸을 베었다. 남하왕은 즉각 정령을 방어상태로 바꿨지만, 그 괴상한 검은 칼날은 마력을 흡수하며 맹렬한 힘으로 그를 허공에 내팽개쳤다.

“지루해 죽겠네!”

마림은 검은 화염을 내뿜는 긴 칼을 두어 번 휘두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을 사용할 것까진 없잖아? 정정당당하게 한판 겨루면 얼마나 좋아. 형님의 고집 때문에 대결이 따분해졌어.”

남하왕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모욕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절대 마림을 이기지 못하리라.

남하왕이 마림의 칼에 맞고 뒤로 날아가던 그때, 왕천룡은 5대 견융강자와 함께 천제현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천제현은 다급히 소리쳤다.

“여우야!”

영리한 새끼 여우는 즉시 영혼나무인형을 꺼내 던지며 숨을 불어넣었다. 이윽고 용석수의 거대한 몸집이 방의 절반을 채우며 나타났다.

녀석은 9성 정점의 고수들을 향해 입으로 녹색 빛을 내뿜었다. 그 힘은 고수들조차 피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흥!”

그 모습을 본 마림이 검은색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모든 물질을 파괴하는 용석수의 녹색 빛이 놀랍게도 그의 칼에 둘로 갈라졌다.

“천제현을 생포해라!”

여섯 고수가 다시 한 번 기습해왔다. 고천추가 재빨리 그중 한 명을 가로막았으나 창에 호신마력이 뚫려 중상을 입고 말았다.

공화련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끝났구나!’

이제 남하왕과 고천추는 전투불능의 상태가 됐다. 공화련과 천제현은 마력이 너무 약해 큰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지원군을 기대할 수도 없다. 갑자기 기적이 생길 리도 없으니 죽은 목숨이 분명해 보였다.

이때, 천제현이 품속에서 기관총 두 개를 꺼냈다.

“이거, 기억해요?”

“이런!”

그것을 본 왕천룡이 낯빛을 흐리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윽고 수없이 많은 암홍색 세침이 폭풍우처럼 쏟아지자 견융족 고수 몇 명이 처참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땅에 쓰러졌다. 침 하나하나에는 모두 극독이 묻어 있어 설령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한동안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본 마림은 시커먼 연기를 뿜는 검은색 칼을 들고 일행을 막아섰다. 진령 고수의 마력은 2급 혈음강으로도 뚫을 수가 없다. 기관총 탄창에 들어 있는 세침 탄약도 거의 다 떨어져가는 상태였다.

천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러면 방법이 없는데!’

과연 진령 경지의 고수였다. 혼성 술사가 모든 수단을 다 써도 진령 고수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행동에 불과하다.

여럿이서 돌아가며 마력을 소진하게 한 후 한꺼번에 달려드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림은 천제현이 궁지에 몰린 모습을 보면서도 더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천제현, 네 재주를 높이 사 견융족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좋다!”

천제현은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

“내가 견융족으로 들어가길 바라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왕천룡을 죽이면 네 뜻대로 하겠다!”

방심하고 있던 왕천룡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놈이 감히!”

“흥, 네까짓 게 조건을 제시하다니! 살려 주는 것만 해도 큰 은혜를 베푼 것이거늘!”

그러자 천제현은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인간들 모두가 나라를 팔아먹는 쓰레기는 아니거든. 자기 한 몸 살자고 털 난 짐승들의 밑으로 들어갈 순 없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