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376화 (372/729)

# 376

제376장 영무후의 도발

연회가 무르익어갈 때 즈음 남하왕이 잔을 들어 함께할 것을 청했다.

“영무후가 방금 제후로 책봉되어 지방 건립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지금 바라는 바가 있다면 말해 보시오. 들어줄 수 있는 청이면 들어주겠소.”

“소인은 늘 병사들과 외부에 나가 있는 관계로 영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왕천룡이 남하왕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했다.

“그러나 소신 두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그래? 무엇이오?”

“먼저, 최근 왕성에 유언비어가 파다하여 왕씨 가문이 수백 년 간 이어온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소인에게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남하왕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영무후, 그건…….”

“두 번째는 소신이 자주 외부로 출정을 나가 그간 집안 관리에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문의 원로들과 상의한 결과 소인이 정실부인을 맞이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어명을 내리시어 기적상회의 공화련 부회장을 소인의 부인으로 맺어주십시오.”

공화련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왕천룡이 남하왕에게 이런 요청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천제현이 화가 난 공서련을 말렸다.

“우선 식사나 하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제가 해결할게요.”

지금 이 자리에서 일개 평민인 공서련이 나선다면 오히려 일이 복잡해질 수 있다.

남하왕이 천제현에게 완전히 등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영무후의 청을 들어줄 리 없다. 만약 남하왕이 동의한다면 천제현 성격으로 보아 남하국을 떠날 가능성도 있을뿐더러 무안군과 대학자 역시 반대할 게 뻔했다.

남하왕이 난색을 표했다.

“짐이 교지를 반포하여 왕씨 가문에 대한 부당한 여론을 잠재울 수 있으나 두 번째 청은…….”

“교지는 제왕의 말을 대변하는 것인데 어찌 소소한 사안 때문에 반포하실 수 있겠습니까?”

왕천룡이 말을 이었다.

“저희 가문이 받은 치욕은 저희가 갚겠습니다! 왕도!”

왕도가 걸어 나와 오만한 눈빛으로 천제현을 쳐다보았다.

“기적상회는 오랫동안 나를 모욕하고 능멸하였으며, 왕씨 가문에 커다란 손해를 안겼다. 내 요구사항은 크지 않다. 네놈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왕씨 가문이 제안한 혼례를 받아들이면 된다. 이 조건만 수락하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고, 나와 왕씨 가문은 이에 대해 다시는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금 사람들의 시선이 기적상회에게 쏠렸다.

천제현은 호박색을 띤 술잔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싫다면?”

왕도가 냉소했다.

“싫어? 그렇다면 술사의 방식대로 명예를 되찾아 오는 수밖에!”

천제현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왕도가 천제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에게 도전하겠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천추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왕도 장군, 혼성 9성 술사가 이렇듯 공개적으로 후배에게 도전하다니! 약자를 괴롭히는 짓이 아니고 뭐겠소! 이것이 술사의 방식이란 말이오? 이는 명예를 되찾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오. 승패 여부를 떠나 천하가 비웃을 거란 말이오!”

무안군 역시 거들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대장으로서 품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이오. 세력에 기대 약자를 괴롭히다니, 은혜를 저 버릴 생각이오?”

왕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무안군은 왕도의 이 같은 행동이 그의 신분에도 맞지 않고 남하왕의 체면도 깎는 일이라 여겼다.

아무리 새로 제후에 봉해진 왕천룡이라 해도 무안군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전룡군단, 이화군단, 질풍기병단 부대는 모두 무안군이 총괄 지휘했다. 그들은 단지 각지의 전장을 책임질 뿐, 무안군이야말로 남하국 최고의 군사 책임자였다.

왕도는 기분이 언짢았다.

탈것의 복수와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면 어찌 이 원한이 없어질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좋은 기회를 잡지 않으면, 천제현의 위세는 갈수록 높아져 앞으로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 명예 회복은 차치하더라도 천제현을 혼내주고 거기다 직접 쓰러뜨리기까지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기적상회에 도전하시겠다?”

그때, 검은 망토를 걸친 신비로운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우아하고 품격 있는 자태에 매력적이고 볼륨감을 넘치는 여인은 검은 면사포를 쓴 채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제가 상대하죠!”

사람들은 처음으로 검은 면사포의 여인을 주목했다.

여태껏 심빙우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채 줄곧 있는 듯 없는 듯 서서 사태를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연회석에서조차 속세의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처럼 천제현 옆에서 술 한 방울조차 입에 대지 않았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마치 얼음 조각상과 비슷했다.

그런 심빙우가 앞으로 나서자 혹한의 기운이 대전을 뒤덮었다. 사람들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단한 한기다!’

‘엄청난 기세다!’

심빙우를 본 염양군이 깜짝 놀라 물었다.

“당신은 심빙우가 아니오?”

염양군은 심빙우를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가 남하 왕성에 유랑하러 왔다가 남궁 가문이 그녀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를 모셔갔다. 그 후로 줄곧 남궁 가문의 객경을 맡다가 아경으로 격상되었고 선임 장로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남궁 가문은 불 속성 정령만 소환하지만, 심빙우는 정령, 무공이든 모두 얼음 속성이었다.

그래서 심빙우는 남궁 가문의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 단지 남궁 가문을 위해 일하고 수련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만 할 뿐, 독립적으로 수련한 셈이었다.

어쨌든 진혼 경지에 오른 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재능은 결코 왕성쌍교에 뒤지지 않았다.

심빙우는 진혼 경지에 오른 후 수련의 정체기를 겪게 되자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서 남궁 가문을 떠난 것이다.

당시 염양군은 심빙우가 앞으로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직감하고는 그녀를 흔쾌히 보내주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 왕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뜻밖에도 천제현의 호위무사가 되어 있을 줄이야.

‘그녀가 내뿜는 기운으로 보면…… 설마 혼성 9성 정점에 이른 것인가? 이토록 빠르게 성장하다니!’

염양군은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심빙우가 남궁 가문을 떠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본래 열염후의 객경이었기 때문이다.

열염후가 전사한 후 심빙우는 열염후의 측근들이 핵심 권력층에서 밀려나는 상황을 목도하였다. 심지어 전국 각지로 방출되는 사람까지 있었고, 여기에는 남궁혜처럼 출중한 재능을 지닌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모습에 실망한 심빙우는 염양군 곁을 떠난 것이다.

염양군이 당시 가문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 그가 심빙우의 결정에 흔쾌히 찬성한 데에는 물론 심빙우를 위해서이기도 했으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가문의 세력 구도를 신속하게 재정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남궁 가문을 완전히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심빙우는 염양군에게 고마운 것이 많았다.

남궁 가문에서 객경으로 있으면서 염양군의 중용을 받지 못했다면 심빙우는 진혼급에 도달할 충분한 자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그 덕분에 중주에서 천제현을 만나 그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지 않았는가.

심빙우는 염양군에게 공수로서 간단히 예를 차렸다.

“염양군 대인을 뵈옵니다!”

염양군은 심빙우가 천제현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보니 더욱 놀라웠다.

‘냉혹한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여인이 천제현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다니, 고놈 참 난 놈은 난 놈일세.’

심빙우는 한기로 가득 찬 눈동자로 왕도를 응시했다.

“말해 보세요. 어떻게 겨루고 싶은지?”

왕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도 기적상회에 실력자가 있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으나 이토록 엄청난 마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혼성 9성 정점의 고수라니.

더욱 대단한 것은 왕천룡과 몇 살 터울 밖에 안 나는 젊은 여인이 왕성쌍교에 필적하는 마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런 여인이 어째서 천제현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왕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쌍익독룡이 있었다면 그는 혼성 9성 정점과 충분히 겨룰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쌍익독룡을 잃고 그의 전투력도 크게 꺾인 상태라 심빙우와 겨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심빙우의 메마른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읽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상대를 짓누르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자기보다 마력이 낮은 사람에게 도전할 용기는 있으면서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는 잔뜩 움츠러든 꼴이라니. 남하 장군들은 모두 당신처럼 나약한가요?”

이 말에 왕씨 가문 사람들은 분개했다. 이는 대놓고 모욕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하하하. 빙우 누님께서 구태여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저놈이 도전한 건 기적상회가 아닌 저니까요. 그러니 빙우 누님을 수고스럽게 할 수 없지요.”

천제현이 얄궂은 눈빛을 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왕씨 가문의 도전을 기꺼이 수락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왕도가 이죽거렸다.

“무슨 조건이냐?”

“왕씨 가문은 제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천제현이 손가락으로 왕도를 가리켰다.

“하지만 너는 자격이 없어!”

장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이 턱 막혔다.

어쨌든 왕도는 남하의 대장군이 아닌가. 그런데 자격이 없다니.

천제현은 그들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난 지금껏 네놈을 비방한 적이 없다. 자신이 한 일은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물론 왕씨 가문의 도전은 수락할 수 있어. 그런데 무슨 명예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포장한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지. 자신이 한 일에 책임도 못 지는 쓸모없는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와 겨룬다는 거야?”

“그럼 누구랑 겨루겠다는 거지?”

“나와 겨룰 수 있는 사람!”

왕천룡을 비롯하여 부장군들이 잇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제 상대가 아닙니다!”

천제현이 적절한 어휘 선택에 고심한 후 왕천룡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무후 대인, 저와 겨루어보시겠습니까?”

심빙우가 놀란 마음에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공화련, 남하왕, 삼군, 그리고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심빙우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장내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천제현이 왕도도 건너뛰고 바로 영무후에게 도전한다니?’

‘영무후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저놈은 알기나 하는 것인가?’

영무후는 혼성 9성 정점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전투력에서는 남하 제후 중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왕천룡은 왕성쌍교로 불리는 인물로, 원래부터도 천재인데다 수년간 혼성 9성의 마력으로 혼성 9성 정점의 견융족과 수도 없이 전투를 벌였다. 이토록 강한 사람에게 겨우 혼성 6성의 실력을 지닌 천제현이 도전한다니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왕도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설마 천제현 저놈이 자기가 누구랑 싸워도 진다는 걸 알고 아예 더 고수인 사람과 겨루려는 건가? 져도 덜 창피하게 말이지.’

하지만 그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직접 나서는 거지? 심빙우가 나섰을 때 그냥 놔뒀으면 되었을 것을?’

천제현의 말에 왕천룡이 벌떡 일어섰다.

“전룡군단은 여태껏 도전을 거절한 적이 없소. 천 회장이 직접 나와 겨루겠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만약 내가 이기면 왕씨 가문의 모든 요구를 들어줘야 하오. 물론 공화련도 내놓아야 하고.”

영무후가 도전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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