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
제375장 아홉번째 제후
지룡은 보통 2급 마수로 용족의 피가 흐르는 생물이었다. 혈통이 순수할수록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으며, 특히 혈통이 고귀한 지룡의 경우 3급 마수로 손쉽게 진화할 수 있다.
나타난 기병부대의 지룡들은 고급 혈통까지는 아니어도 족히 2급 초기 마수 정도는 되어 보였고, 허혼 술사와 견줄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두 마리 정도만 나타났다면 딱히 신기할 것도 없겠지만, 기사단 전체가 모두 지룡을 타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이들은 명성이 자자한 지룡기병단이었다.
지룡은 방어력이 강하고 천성이 용맹하며 끈기가 있고 명령을 잘 따르기에, 후대에 가서도 탈것으로 길들여지는 마수이다. 또한 전장에 특화된 탈것으로 어떤 전투에서도 최대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남하국에 이토록 강한 지룡기병단이 있었나?’
질풍기병단의 전투력은 지룡기병단에 비해 한참 떨어지고, 그나마 그리핀 기사단만이 상대할 수 있었다. 다만 그리핀 기사단은 규모가 크지 않고, 그 수도 지룡기병단보다 많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핀 기사단은 왕궁기사단으로 왕성과 왕궁의 안위를 책임진다지만, 이 부대는 대체 뭐지?’
천제현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지룡기병단은 그리핀 기사단에 비해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최전방 부대이자 견융족과 정면으로 맞붙은 부대였다.
“전룡군단이다!”
“전룡군단이야!”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10년 전 열염군 전군이 몰살당한 후, 전룡군단은 열염군의 자리를 대신하여 북쪽 전장을 지켰다. 전룡군단이 없었다면, 견융족의 유목 기병부대가 왕국의 영지에 난입하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을 게 뻔했다.
전룡군단은 지난 10년 동안 견융족을 수차례 무찔러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에 남하국에서 그들의 명성이 자자했다.
이때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지룡이 앞으로 나왔다.
지룡의 혈통은 외형으로 구분했다. 혈통이 가장 낮은 것은 흑린지룡이고 그 다음으로 홍린지룡, 금린지룡이었다.
이 기병부대는 거의 다 흑린지룡이었는데, 성장 환경이 대단히 제한적이라 지룡을 3급 마수까지 진화시키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저들 중 가장 높은 단계의 지룡은 비늘이 암홍색이고, 옅은 금색 줄무늬가 섞여 있었다. 외관상 다른 지룡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이 지룡은 고급 혈통을 가진 것으로 보아 잘만 키우면 3급 마수로 진화시킬 수 있다.
그 지룡 위에는 준수하게 생긴 사내가 금빛 창을 손에 쥐고 암금색 갑옷에 금색 망토를 두른 채 타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펄럭이는 망토는 마치 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는 것 같았다. 그가 지룡에서 아래로 사뿐히 착지하자 그의 주위로 흙먼지가 날렸다. 그의 동작은 금빛 유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빠르고 날렵했다.
“전룡군단 왕천룡이 폐하를 뵈옵니다!”
그 사내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거침이 없었다. 나이는 많지 않았으나 진중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으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예리한 검은 언제든 칼집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견고하고 단단한 쇠처럼 한 치의 빈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룡군단의 지휘관 왕천룡 뒤에는 혼성 9성의 마력을 지닌 부장군과 함께 천제현과 불미스러운 일로 엮인 왕도도 섞여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천제현 일행은 속이 타들어갔다.
“주인공이 드디어 납시셨구먼, 하하하!”
남하왕이 방금 일은 완전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장군, 일어나시오. 오느라 수고하였소.”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성대한 연회를 벌이는 이유가 고작 저 왕천룡 때문인 거야?’
왕천룡은 공수하며 예를 갖추었다.
“소인, 아무런 공덕도 세우지 못했는데, 이렇게 환대해 주시다니요.”
천제현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겸손한 척 하기는, 요란뻑적지근하게 지룡기병을 거느리고 입성해 놓고는 뭐라는 거야?! 네놈이 돌아오는 걸 동네방네 알리려고 한 거면서 온갖 겸양을 떨기는.
“장군은 덕과 능력을 겸비한 남하국의 기둥이 아니겠소!”
남하왕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견융족 견제를 위해 북벌하여 위용을 떨쳤으니 그 공적은 길이 남을 것이오. 게다가 아직 서른하나 밖에 되지 않았잖소. 앞으로가 참으로 기대되는군!”
이에 왕천룡은 격에 맞게 대응했다.
“남하국을 지키는 건은 제 본분일 뿐이옵니다!”
“공이 있으면 상도 있어야 하는 법! 내 어찌 야박하게 대하겠소?”
남하왕이 물었다.
“듣자 하니, 장군의 마력이 또다시 경지에 올랐다고 하더군?”
“폐하께서 덕이 넘쳐 군신이 복을 얻으니, 소인 역시 그 덕에 소소한 성과를 거둔 것일 뿐입니다!”
왕천룡의 대답에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성과? 왕천룡은 혼성 9성의 실력자였다. 그런 그가 ‘성과’를 거두었다면 혼성 9성 정점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남하국에 고수 한 명이 더 추가된 것이니 나라의 경사나 다름없다!
왕천룡은 문무를 겸비한 장군으로 나라의 평안을 지키는 조정의 대들보이다. 거기다 고급 장수로서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적들의 목을 벤 장군이기도 하다.
“좋소! 좋아!”
남하왕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군은 역시 내 기대를 저 버리지 않는구먼. 문성군은 본 교지를 선포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문성군이 예관 두 명으로부터 교지를 건네받고는 단상에 올라가 금색 교지를 펼쳐들었다. 왕서가 내뿜는 불빛에 장내 사람들은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삼군 중 한 명인 문성군이 직접 교지를 낭독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대단한 일인 듯싶었다.
“전룡군단 지휘관 왕천룡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누비며 10년간 견융족의 침입을 훌륭히 막았다. 90여 차례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견융족 80만 명 이상을 도륙하여 남하국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바, 남하국 젊은이들에게도 귀감 되었다. 이에 짐은 왕천룡에게 이품 군후의 품계를 내리고 영무후로 봉하노라. 왕역, 창주, 견융 세 개 지역을 포괄하는 땅 8,000리, 성 42개, 백성 3천만 명을 아울러 무주라 명하니 앞으로 영무후가 친히 관할토록 하라!”
쾅!
축하 포성이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이토록 요란법석을 떤 이유가 있었다. 수년 만에 남하국에서 또 다른 제후가 탄생한 것이다.
영무후 왕천룡은 고작 서른 초반의 나이에 남하제후로 책봉된 데다 그 위세도 하늘을 찌르니 이는 남하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하왕의 이 같은 결정에 문무백관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천룡은 이미 실권을 가진 장군이었다. 스무 살 초반부터 전장을 누빈 그는 지난 10년 간 눈부신 전공을 쌓아나갔다. 그가 가진 실력만 보아도 제후로 책봉될 자격이 충분했기에 이번에 벼슬과 영지를 받은 것은 예견된 수순에 불과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부장군인 왕도는 오늘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이 모시는 장군이 정식으로 제후에 책봉되는 모습을 보자 격앙된 마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왕씨 가문에서 세 번째 제후가 배출되었으니 또다시 영광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영무후는 고작 서른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최소 70년간 왕씨 가문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물론 남하국에서 삼대 가문의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왕천룡은 살짝 허리를 굽혀 왕서를 받아들고는 삼군과 남하왕에게 차례로 예를 표했다.
그는 시종일관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명성에 연연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남하왕이 책봉식의 시작을 알렸다.
남하팔후에 제후가 한 명, 남하팔주에는 주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영무후 왕천룡은 수많은 사람의 부러움과 감탄 어린 시선 속에서 제후 관인을 하사받았다. 이것으로 왕천룡은 아홉 번째 제후이자 중주 신풍후, 청주 청목후보다 품계가 약간 높은 이품 군후가 되었다.
“영무후의 제후 책봉은 전국의 경사입니다!”
“남하국이여, 천년만년 동안 길이 빛나기를!”
왕궁 연회는 본래 영무후의 제후 책봉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영무후가 유일한 주인공이었다. 영웅적 기개와 호방한 성격을 겸비한 데다 휘하에 대군을 거느린 그가 젊은 나이에 제후까지 되었으니 인생에서 더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잇따라 영무후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고 군신은 더욱 예우를 갖추었으니, 천제현의 핮자들도 왕천룡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학문에 미친 학자들은 사실상 일에서야 까다롭지 사람에게는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왕천룡은 남하국에 기여한 바가 뚜렷하고 어린 나이에 전방을 지킨 공로가 눈부시므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게다가 이제 제후로 책봉되었으니 그의 지위는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알겠군.’
무안군도 왕씨 가문이 천제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저 사람 참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군 그래. 고대 왕족 출신에다 동방호연에 필적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며, 무안군에 버금갈 정도로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데다 전공까지 톡톡히 세웠으니 명성이 높을 수밖에. 그러니 지금 영무후가 된 것이지.’
게다가 영무후는 듬직하고 진중한 모습을 유지했다. 천성하처럼 자신을 과시하거나 보통의 천재들처럼 오만방자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게 더 힘든 법이다.
처음에 공서련은 왕궁 연회에 초대되어 무척 기뻐했지만, 지금 이 상황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공화련 역시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최근 왕씨 가문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높았는데, 이는 왕천룡이 왕성에 돌아오지 않은 데 따른 것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왕천룡이 돌아왔고 정식으로 영무후에 책봉되자 왕씨 가문 사람들도 기를 펴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여론들도 제후로 책봉된 순간 바로 증발해 버렸다.
앞으로 한동안 영무후 왕천룡은 왕성의 새로운 총아로 거듭날 테니 천제현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될 것이다.
공화련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지금 이 모든 것은 이미 계획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남하왕이 갈수록 높아지는 천제현의 위세를 억누르고, 천제현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영무후를 등용한 것처럼 느껴졌다.
천제현의 기적상회는 일개 상회에 불과하지만 영무후의 전룡군단은 남하국을 지탱하는 기둥이나 다름없다.
영무후와 천제현이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면 백성이 어느 편에 설지 단정할 수 없었다.
천제현에 대한 남하왕의 견제가 의심되는 상황이나, 공화련은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
어쨌든 왕천룡의 실력, 명망, 공로, 자질 등 어느 면으로 보나 제후 책봉은 예견된 수순이었기에 꼬투리 잡을 만한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