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
제372장 왕궁연회(2)
무안군에게도 대놓고 욕설을 퍼붓는 고천추가 한낱 이화후 앞이라고 예의를 차릴 리가. 천제현이 나서기는 애매한 상황, 고천추야말로 적임자였다.
“국왕 폐하와 염양군께서도 처벌 이야기를 안 하시는 판국에 다짜고짜 남궁혜의 무공을 폐하겠다니, 이화후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아니면 어디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이오?”
염양군이 고천추를 매섭게 노려봤다.
“남의 가문 일에 대학자가 너무 주제넘게 나서는 것이 아니오?”
“가문 일이요? 정말 가문 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십니까?”
고천추가 피식 웃어 보였다.
“이건 남궁 가문만의 일이 아니라 나라의 일이자 천하의 일입니다. 이토록 중대한 사안을 이 늙은이가 못 본 척할 수야 없지요.”
염양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여튼 입만 살아서는, 온갖 걸 다 갖다 붙이는군. 나랏일은 무슨 망할 나랏일!’
고천추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남궁혜와 같은 천재는 남하국에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인물이 염양군의 이기심 때문에, 이화후의 염치없는 행각 때문에 장장 십 년이나 왕성 밖에 쫓겨나 살지 않았습니까. 모두에게 묻지요, 십 년이 인생에서 어디 짧은 시간입니까? 남궁혜의 인생 중 가장 황금 같은 세월을 통째로 망친 것이나 다름없거늘! 이게 남하국의 슬픔이 아니면, 남하국의 손실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남하국은 건국 이래 수백 년간 안으로는 수많은 재난에, 밖으로는 견융족의 위협에 신음해 왔습니다. 오늘날 조정에 쓸모없는 얼간이만 가득한 것도 전부 당신네들의 비열한 짓거리 탓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고천추가 이런 이야기를 처음 입 밖에 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국왕과 염양군을 면전에 뒀다는 점이 달랐다.
그야말로 남궁 가문과 염양군에게 대놓고 개망신을 준 꼴이었다. 염양군의 얼굴빛은 대충 봐도 이미 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 입에서 나왔다면 몰라도,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대학자인 이상에는 말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졌다.
대학자처럼 영향력 있는 인물이 염양군과 이화후를 면전에서 꾸짖다니, 삽시간에 나라 전체로 퍼져나갈 소식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궁 가문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가문의 치부가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되는 법.
게다가 확실히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안이 아닌가.
“이 늙은이도 그간 당혹스러웠소.”
조보까지 거들고 나섰다.
“남궁혜는 보기 드문 신급 정령을 보유한 인물이오. 대국에 가도 애지중지 대접받을 인재이거늘, 남궁 가문은 어째 저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물건 취급인지. 그 가문에는 신급 정령 정도야 쳐주지도 않을 만큼 천재가 차고 넘친다는 말이오?”
“틀렸소!”
이번에는 또 다른 학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알기로 남궁혜는 본래 열염후 쪽 인물이오. 전장에서 죽은 열염후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그를 따르던 세력은 모조리 제거당하고 말았지. 추방당한 이들 중에 앞날이 기대되던 젊은 인재도 한둘이 아니었소. 염양군께서는 설마 이 일을 몰랐다 하시겠습니까? 모르기는커녕 다 알고도 묵인하지 않았소이까!”
“열염군 영령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남궁 가문이 치졸했습니다!”
“전사자 가족들이 모조리 열염후 때와 같은 일을 당한다면 어느 누가 남하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이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덩달아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열염후 이야기였다.
염양군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열염후의 일은 그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응어리였다. 하지만 저 미친 작자들이 덤벼든다고 똑같이 응수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말싸움으로야 애초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잠자코 입 다문 채로 있으니 망정이지, 괜히 한마디 했다가 트집이라도 잡히는 날에는 지금보다 더한 집중공격이 쏟아질 것이다.
이때 이화후가 버럭 호통을 쳤다.
“감히 군상을 능멸하다니 뭐 하는 작자들인가!”
이화후는 그야말로 미친개 떼에 포위당한 심정이었다.
‘제길! 언제 원한을 산 사이도 아니거늘! 왜 개떼처럼 달려들어 사람을 물어뜯는단 말인가?’
이제 막 왕성에 돌아온 그는 알 리가 없었다. 현재 조정 학자 대부분은 이미 천제현의 사람이 되었음을.
“시시비비야 양심에 대고 물어보면 알 일!”
고천추가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남궁혜가 쫓겨난 이유가 염양군의 직계손이 아니기 때문임을 세상 누가 모른단 말이오. 아니 지금 우리가 없는 사실을 날조라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조보가 덧붙였다.
“지난 십 년을 앗아간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남궁혜의 일생을 망칠 심산이오?”
지켜보는 천제현은 그저 흡족할 따름이었다.
‘좋아, 잘하는군.’
미친개들이 그간 대접받은 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 학자들은 모두 왕성에서 유명한 시비꾼이었다. 근거 있는 주장이든 아니면 억지 궤변이든 찰지게 밀어붙일 줄 아는 능력자들이었다.
남궁 가문 역시 저들의 무서움을 알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도 가만히 있는 게 그나마 손해를 덜 보는 길이었기에.
공화련 자매는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남궁 가문이 저리 한심할 줄이야.
진짜 어려운 상대인 천제현은 아직 출격도 안 했는데, 미친개 몇 명 달라붙었다고 꼼짝도 못 하는 꼴이라니. 맥이 빠져도 너무 빠지지 않느냔 말이다.
참다못한 염양군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천부적 재능은 정령의 힘이 전부가 아니고, 한 인간의 잠재력은 천부적 재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바, 억지로 이어붙인 궤변 티가 너무 나지 싶소만.”
학자들이 반박하고 나서려던 찰나였다.
“남궁혜 아가씨는 기적상회의 일원입니다. 오늘 염양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아가씨를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천제현이 인파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하지만 대학자의 말이 편파적이었다 느끼셨다면 저한테 좋은 해결책이 있습니다만.”
‘이 자가 바로 명성이 자자하다는 그 천제현인가!’
천제현은 이화후의 매서운 눈빛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렇다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말발로 이겨봐야 무슨 소용인가,
남궁 가문이 분노하면 할수록 기적상회의 앞날만 험난해진다. 그보다는 실질적이고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 같은 결론에 따라 천제현이 시선을 옮긴 곳에는 남궁혜가 있었다.
“저는 기적상회에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하는데, 군상께서는 가문의 가르침을 받으라 하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차라리 실력으로 결정을 보도록 하죠!”
남궁혜가 거대한 망치로 지면을 쾅 내리찍더니 손가락을 펴 남궁검을 가리켰다.
“너, 내 도전을 받아들일 배짱 있어?”
염양군과 이화후가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도전? 대체 무슨 속셈이지?’
“남궁검은 가문에서 가장 촉망받는 후계자로 어려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죠. 그에 비해 저는 줄곧 찬밥 신세로 살다가 십 년 전에는 중주 구석으로 쫓겨나기까지 한 몸. 그래도 운 좋게 대장과 기적상회를 만나 이만큼 클 수 있었어요. 지난 반년 동안 기적상회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십여 년간 가문이 애지중지 공들여온 천재에게 도전하고자 합니다. 이긴다면 그간 제가 기적상회에서 많이 성장했다는 뜻이니 앞으로도 기적상회에 남겠습니다.”
이화후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진다면 어찌할 셈이냐?”
“기적상회 지분을 싹 다 정리하고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겠어요. 이후의 일은 무조건 가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남궁 가문 일행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결국 이기든 지든 기적상회에 손댈 생각은 접으라는 뜻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국왕이 재빨리 중재에 나섰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 큰소리가 나다니 웬 말이오! 짐을 봐서라도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떻겠소?”
문성군이 입을 열었다.
“젊은이들끼리 한 수 겨룬들 지켜보는 눈이 이리 많은데 설마 무슨 큰일이야 있겠사옵니까?”
처음부터 진짜 말릴 생각은 없던 국왕이 옆에 있는 염양군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러자 염양군이 말했다.
“남궁 가문은 도전을 겁내지 않습니다.”
“흥, 너처럼 천한 것 따위가 감히 나한테?”
이화후가 입을 열기도 전, 남궁검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건 남궁 가문의 자존심만이 아니라 제 자존심도 걸린 싸움이옵니다. 부디 기회를 주시옵소서!”
남궁검은 가소롭다는 기색이었다.
남궁검에게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남궁혜는 천하고 하찮은 계집애 불과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괴롭히고 모욕을 주던 대상이 별안간 천부적 자질을 확인받아 자기한테 쏟아지던 관심을 빼앗아갔을 때는 미칠 듯한 질투에 휩싸였었다.
‘천한 방계 출신 주제에 어떻게 그토록 강한 혈통을 이어받았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남궁혜는 아비와 함께 시골 촌구석으로 쫓겨났다.
그 후로 십 년의 세월.
남궁검은 이제 혼성 7성의 진혼급 고수가 됐다. 동방호연이나 왕천룡에 비해 모자란 것은 수련에 투자한 총 시간뿐이었다.
남궁검은 스물이 채 되지 않은 나이. 동방호연은 이미 스물일곱. 왕천룡은 서른하나였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소위 말하는 왕성쌍교쯤은 얼마든지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다. 동방호연이나 왕천룡 정도는 되어야 자신과 급이 맞는다는 게 남궁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궁혜? 그깟 계집은 내 발밑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떠는 역할에나 어울린다!’
그나저나 지난 십 년이 미운 오리 새끼를 경국지색의 미인으로 탈바꿈시켜놓지 않았는가. 무공을 폐하고 노리개로 삼아 밤마다 저 화끈한 몸뚱이를 유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설마 이미 천제현과 잔 건 아니겠지?’
아무려면 어떤가. 혈통이 좋은 계집이니 씨받이 삼아 자식 몇 명만 얻어도 가문에서의 위치를 굳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남궁혜라고 그 음탕한 속내를 읽어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십 년 전에 당했던 수모를 갚아줄 기회가 드디어 왔다.’
염양군과 이화후 정도의 마력이면 상대의 실력을 읽어내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남궁혜는 혼성 6성,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니었다.
봉황 정령이 있으니 평소 같으면 상위 단계 적수에게 도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나 남궁검은 혼성 7성. 혼성 6성과 7성은 단순히 한 등급 차이가 아니었다. 혼성 중기와 후기는 천양지차, 그게 어디 쉽게 극복 가능한 격차이던가.
어디 그뿐이랴. 남궁혜가 수련한 것은 기본적인 가문 무공이 고작, 핵심 무학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으리라. 반면 적통 후계자인 남궁검에게는 대량의 재료를 쏟아 부은 고급 무공 교육이 이뤄졌다.
염양군과 이화후가 대결에 동의한 건 남궁검이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상황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화후가 무심한 투로 말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섯 초식 안에 끝내도록 해라.”
남궁검이 아버지를 향해 포권했다.
“존명!”
국왕과 삼군, 그리고 여기 모인 수많은 사람 앞에서 실력을 뽐낼 절호의 기회였다. 여기서 인정받는다면 왕성쌍교가 당장에 왕성삼교로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들었어요? 저쪽에서 다섯 초식 안에 때려눕히겠다고 하는 거.”
천제현이 남궁혜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후딱후딱 처리해요!”
“걱정하지 마!”
남궁혜가 배시시 웃었다.
“저런 쓰레기는 한 방이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