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
제371장 왕궁연회
사실 이화후의 지위는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제후도 제후지만 그보다 이화군 총사령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병권을 쥔 제후를 군후(軍候)라고 불렀다. 남하팔후 중 품계를 받은 군후는 단 네 명. 뇌주의 금전후, 남주의 사방후, 창주의 창운후.
그러나 그들 모두 이품인데 반해 오직 이화후만은 일품이어서 그를 일품군후라고 칭하곤 했다.
그 외 중주의 신풍후와 청주의 청목후 등 사병을 거느린 제후는 많았지만 그들은 지역 수비군에 지나지 않을 뿐, 외지까지 파견돼 전투를 치를 능력은 없었다.
“두 번째 인물은요?”
“전룡군단의 왕천룡 장군입니다!”
왕씨 가문의 역사에 대해서라면 천제현도 어느 정도는 알았다. 과거 대하국의 왕족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수차례나 몰락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걸출한 인물이 하나씩 등장해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했다. 대하왕족의 핏줄에 흐르는 천부적 강인함이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덕이었다.
왕천룡의 증조부는 이름난 제후였지만 아들과 손자 대 모두에서 쓸 만한 인물이 나지 않은 탓에 결국 작위를 반납해야만 했다. 왕씨 집안에 다시 볕이 든 건 왕천룡이 태어나고 나서였다.
왕천룡은 어려서부터 본바탕이 범상치 않았다. 무공에만 무서운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대단했다.
열다섯 나이에 장군으로 군영에 들어갔고, 스무 살을 넘긴 지 얼마 안 돼 전룡군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지난 십 년간 전룡군단은 혁혁한 공을 세우며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런 왕씨 집안을 풍비박산 내놓았으니, 왕천룡이 천제현을 가만둘 리 없었다.
고천추가 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안군과 이 늙은이도 있고, 기적상회도 그리 만만한 집단은 아니지 않습니까!”
‘알 게 뭐야.’
천제현은 애초부터 고천추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
왕궁은 시끌벅적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활짝 열린 궁문 사이로 절색의 궁녀들이 바삐 움직이며 연회를 준비 중이었다.
정전(正殿)에서부터 왕궁 가장 외곽의 궁문까지 붉은 양탄자가 길게 깔렸다. 둘씩 대열을 맞춰 늘어선 왕궁기사들의 갑옷과 무기는 새로 밀랍을 먹여 번쩍번쩍하게 광이 났다. 저마다 쥐고 있는 고삐는 그리핀의 것이었는데, 흙먼지 한 점 안 탄 조각상 같은 그리핀들은 신성한 존재라도 맞이하러 나온 듯한 자태였다.
예식용 도구와 악기를 든 의장대 행렬 역시 무척이나 화려했다.
국왕 동방호를 필두로 무안군 동방건, 염양군 남궁염, 문성군 상관장봉이 가장 앞쪽에 섰고 그 뒤로는 중신과 장군들이 도열해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얼른 이리 와!”
천제현을 자기 쪽으로 잡아끈 공서련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영 심상치가 않은걸. 봐, 존귀한 국왕 폐하부터 삼군 어르신들까지 총출동했잖아. 진짜 놀라 자빠질 광경이야.”
공화련 자매와 남궁혜, 심빙우 모두 미리 도착해 있었다.
한껏 들뜬 공서련과 달리 공화련은 언제나처럼 차분한 얼굴이었고 심빙우는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평소 활기차던 남궁혜는 어쩐지 다른 사람들 뒤에 숨어 얼굴도 못 내밀고 있었다.
염양군 탓이었다.
둥둥둥!
“이화후 대인 납시오!”
웅장한 북소리에 남궁혜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다. 화가 나는 건지 두려운 건지,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감아쥔 모습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천제현이 남궁혜의 어깨를 다독였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잖아요. 제가 있는 이상 저들도 아가씨를 어쩌지는 못해요.”
항상 무지막지한 모습만 보여주던 남궁혜가 지금은 작은 토끼만큼이나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공화련도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건넸다.
“그 누구도 우리 허락 없이는 기적상회 사람을 함부로 데려가지 못해요!”
“맞아요, 맞아!”
공서련이 자그마한 주먹을 휘둘렀다.
“언니, 평소의 그 패기 어디 갔어요. 우리가 있잖아요!”
감동이었다.
남궁 가문이 어떤 세력인지 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기를 지켜주기 위해 그 거대한 세력에 맞서겠다는 것이다.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제아무리 기적상회라고 해도 남궁 가문과 맞붙는다면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내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자신이 상회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못 된다는 것쯤은 남궁혜도 잘 알았다.
공화련처럼 지혜로워서 천제현 대신 상회를 꾸려나갈 수 있는 것도, 심빙우 같은 고수라서 천제현을 보호해 줄 수 있지도 않았다. 공서련처럼 천제현과 특별한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남궁혜는 자기가 상회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때 절도 넘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한 무리의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장비가 대단히 독특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무거운 갑옷에 자루만 해도 사람 키만 한 검을 들고 있었다.
검날에 빽빽하게 새겨진 화염 주문에서 델 듯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이름도 찬란한 남궁 가문의 이화군.
남궁 가문의 역사는 대하국보다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자칭 불사조의 후예라는 그들은 대대로 막강한 힘을 타고났다. 뛰어난 무인이 운집한 덕에 남궁 가문은 나라에서도 중요한 대접을 받았다. 남궁 가문이 고유의 방식으로 배출해낸 전사 집단, 그들이 곧 남하국의 최정예 부대였다.
이화군 전사들의 전투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약초로 몸을 강철처럼 단련한 이들에게는 통각이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거기에 비술을 이용한 수련까지 마치려면 한 명의 전사가 태어나는 데는 약 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남궁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비술은 전사의 잠재력을 갉아먹는 속성을 지녔다. 이화군 전사 대부분은 수명이 짧았으며 실력 역시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올라서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전투력이 연체 9성 정점으로 전원 균등한 군대를 조직하는 게 가능했다.
여기에 고유의 무학과 특수장비가 더해져 견융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한 부대가 탄생했다.
과거 열염후는 이런 전사를 무려 팔만이나 거느렸으니, 그들은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다.
십 년 전 견융초원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열염후가 전사했을 때, 견융족 정예의 피해는 무려 아군의 세 배였다. 현재 이화후의 손에 남은 마지막 인원들은 남하국을 대표하는 중갑보병 집단이기도 했다.
제일 앞쪽에서 걷고 있는 이화후는 남궁 가문 특유의 붉은 장발에 보기 좋게 균형 잡힌 체형의 소유자였다. 머리색과 마찬가지로 붉은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연상케 했다.
암홍색 갑옷 위에 걸친 장포에는 선연한 적색의 무늬가 빽빽했는데, 이화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의 뒤를 바짝 따르는 인물은 총 일곱 명이었다.
그중 여섯은 남궁 가문의 고위층 내지 상경 지위의 문객으로, 전원 이화후의 최측근이자 혼성 9성가량의 절정고수였다. 나머지 한 명은 열여섯에서 열일곱 즈음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그가 남궁 가문의 일원임을 알려줬다. 소년은 이화후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
이화후가 가장 아끼는 아들, 남궁 가문의 차기 후계자인 남궁검이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군상을 뵙습니다!”
이화후를 포함한 여덟 사람이 예를 올리자 이화군 전사 수백 명도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국왕과 삼군의 사이로 염양군의 얼굴이 유독 자부심에 차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남궁 가문의 자존심이었다.
일품군후인 이화후는 부대와 함께 타지에서 지낼 일이 많았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왕성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은 뭔가 중대한 사건이 있을 게 확실했다. 왕궁 연회 역시 평범한 연회가 아니리라.
사실 왕국 앞에 언제 지었는지 모를 무대가 생겨난 걸 눈치챈 사람도 진작부터 있었다. 장수를 위해 마련한 지휘대 같기도 하고 뭔가 포상을 위한 무대 같기도 한데, 정확한 용도는 알 길이 없었다.
이화군은 휴식을 위해 퇴장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던 중이었다.
매처럼 날카로운 이화후의 눈빛이 천제현의 뒤에 선 남궁혜에게 꽂혔다. 곧이어 이화후가 냉랭한 투로 말했다.
“남궁혜, 남궁 가문의 후예라는 자가 근본도 없는 시골 촌놈 뒤에 숨어서 뭐 하는 짓이냐! 이 몸을 보고도 예를 올리지 않고 군상을 뵙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니. 네가 어느 가문 사람인지 완전히 잊은 게로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남궁혜 쪽으로 쏠렸다.
지루하게 대기하던 중에 좋은 볼거리가 생긴 것이다.
잠시 시선이 흔들리는가 싶던 국왕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끼어들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남궁혜는 꽤 긴장한 기색이었다. 가문 내에서도 어려운 어른인 이화후에, 그 위로는 지고지상한 염양군까지 버티고 있으니. 남궁혜가 받는 압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이화후를 뵙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에 굴할 남궁혜가 아니었다. 그녀가 오히려 과감하게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군상을 뵙습니다!”
국왕이 짐짓 의외라는 투로 말했다.
“아니, 염양군. 남궁 가문에 이리 우수한 인재가 있었다니, 어째서 짐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이오?”
“오랫동안 타지를 떠돌던 아이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옵니다.”
염양군의 기운은 흡사 수사자를 떠올리게 했다. 일순 엄청난 압박감이 남궁혜의 어깨를 짓눌렀다.
“더는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이제라도 돌아오너라. 네 자질은 이미 가문이 인정한 바, 돌아오기만 하면 과오는 묻지 않으마!”
염양군은 남궁혜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아주 잘 알았다.
가문에서는 줄곧 찬밥 신세였던 녀석이 기적상회의 고위 간부가 되었을 줄이야. 남궁혜만 손에 들어오면 남궁 가문이 기적상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 역시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기적상회에서 배우는 것이 많아요. 당분간은 돌아갈 생각 없습니다.”
염양군 앞에서도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역시 남궁혜는 남궁혜였다.
“안심하세요. 제가 불사조의 후예라는 사실은 죽는 순간까지 변치 않을 테니까요!”
염양군이 미간을 찌푸렸다.
“웃기는 소리!”
이때 이화후가 비웃는 투로 끼어들었다.
“지금 무슨 협상이라도 하는 줄 아나? 그간 가문의 규율을 무시하고 벌인 온갖 짓거리가 얼마더냐! 당장 돌아와 벌을 받지 않겠다면 내 친히 너의 무공을 폐해 본보기로 삼을 것이야!”
‘흥, 건방진 놈 같으니! 이 천제현 님이 버티고 계신 앞에서 감히 내 사람을 협박해? 이 몸의 무서움을 알게 본때를 좀 보여줘야겠군.’
천제현이 고천추 일행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기세가 대단하시구려, 이화후!”
인파 속에서 긴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걸어 나왔다. 다름 아닌 대학자 고천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