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
제369장 엘프의 방문(2)
완전히 매료당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용이야 어떻든지 간에 영상과 음향효과만 해도 이미 대만족이었다.
화면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구조가 상당히 탄탄했다. 영민한 주인공과 잔인한 악당, 그 중간에 삽입된 순수한 사랑까지. 남녀 주인공은 파란만장한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거지!”
“최고야!”
관객석 여기저기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비숑도 흥분했긴 매한가지였다. 수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이토록 흥미로운 신문물은 처음이었다. 굳이 이 작은 나라까지 찾아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여운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한 관객들이 자리를 뜨기 직전이었다. 까맣게 암전됐던 화면에 다시 불이 들어오더니 청순한 미모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미소 띤 얼굴로 관객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앗!”
“공주 아니야?”
“멍청이, 영화랑 현실도 구분 못 하냐. 기적상회의 서련 아가씨잖아!”
아비숑 역시 놀란 이들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원거리 화상통화가 가능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녕하세요, 공서련입니다. 극장이 선을 보인 지도 일주일이네요. 그간 기적상회에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재미있는 데다 값까지 싼데 과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기적상회를 왕성 최고의 양심상회로 임명하노라!
공서련의 말이 이어졌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번에 기념품인 상영기를 출시하게 되었습니다.
공서련이 몸을 비스듬히 돌리자 뒤쪽에 놓인 괴상한 모양새의 장비가 화면을 꽉 채웠다.
족히 가로 2장, 세로 1장은 될 전영경에 양편으로는 확성기 여러 개가 묶음 형태로 장착된 구조였다. 뒤쪽은 검은 상자로 감싸져 있었는데, 딱 봐도 고급스러움이 풀풀 풍겼다.
―기적상회의 신제품, 상영기입니다. 상영기 한 대면 기적상회의 영화를 언제든 마음껏 즐기실 수 있어요. 현재는 하루 열 대에 한해 경매형식으로만 선보입니다. 앞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 정식판매를 개시할 예정이오니 많은 구매 부탁드려요!
‘광고였던 건가.’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겨우 열 대라니, 적어도 너무 적지 않은가.
왕성에 차고 넘치는 게 돈 있는 자들이었다. 일반인들은 그저 목 빼고 정식판매를 기다리는 수밖에.
아비숑이 허겁지겁 판매장소로 달려갔을 때는 경매 준비가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이번 기회에 구입하면 <적혈전쟁> 영상판을 덤으로 증정한다고 했다.
오늘 영화를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나올 작품들도 상영 종료 후 영상판으로 구매해 소장이 가능했다.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드는 가운데 드디어 경매가 시작됐다.
“오십 만!”
“백 만!”
“…….”
“오백 만 부르겠소!”
귀까지 벌게져 다툼을 벌이는 귀족들 사이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일 억!”
‘이런 정신 나간!대체 어떤 놈이란 말이냐!’
‘돈이 돈 같지가 않은 게야? 아무리 여기가 왕성이라지만 금화 일억 냥이 뉘 집 개 이름이냐고!’
기적상회 직원들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다 있다니?’
아비숑이 인간들의 황당하다는 반응을 이해할 리 없었다. 그에게 금화 일 억은 대수롭지 않은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상에 올라간 그가 새하얀 손을 내밀자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번쩍하더니 마석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작은 산을 이뤘다.
“가져가도 되겠는지요?”
“그…… 그러세요!”
기적상회 직원이 찬란한 마석의 위용에 급기야 실명 위기에 처한 사이, 상영기 앞까지 간 아비숑이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상영기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통째로 반지에 빨려 들어갔다.
“저장 반지다!”
“저게 말로만 듣던 저장 반지라고?”
“최소 금화 수백 억은 할 걸!”
여기저기서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저장도구는 돈 주고도 못 살 보물, 특히 사용이 간편한 공간 반지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돈만 징그럽게 많은 거로도 모자라 저장 장비까지 갖고 있다니. 대국 아니면 그보다 급이 높은 곳에서 온 게 확실했다. 보잘것없는 소국 사람들로서는 절로 경외심이 생기는 게 사실이었다.
저런 자의 비위는 절대 거스르지 말아야 했다. 남하국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명문세가라도 대국이나 제국에서 온 인물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순식간에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아비숑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인간들의 시선이 유쾌하지 않았다.
상영기가 탐이 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난리판에는 애초에 끼지 않았으리라.
‘여정의 끝자락에 뜻밖의 수확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아비숑은 곧바로 왕성을 뜨는 대신 시장으로 이동해 자음기와 축음기 수십 대를 사들였다. 시장 여러 군데를 돌며 자음석판까지 잔뜩 사 모으고 나니 지출액이 어느새 또 억대가 됐다.
그까짓 돈이 아비숑에게 어디 대수던가?
그가 물건을 사들이는 데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출발 전부터 선물 꼭 사와야 한다며 귀찮게 치대던 공주. 덕분에 아비숑은 여정 내내 머리가 아팠다. 공주 신분으로 못 가져본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새끼 용이라도 구해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린 공주 앞에서는 유독 약해지는 그였다. 만족할 만한 선물을 가져가지 못하면 그 후폭풍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두려웠다.
어쨌든 이제 한숨 돌리게 된 것이다.
이 물건들이라면 어린 공주도 분명 기뻐할 터였다.
아비숑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선물할 상영기가 앞으로 그와 그가 사는 엘프의 숲에 얼마나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줄지…….
***
“언니!”
신바람이 난 공서련이 문을 열어젖히고는 그 길고 늘씬한 다리로 문지방을 훌쩍 넘어 들어왔다.
“상영기 열 대를 전부 팔아치웠어. 한 대당 금화 백만 냥 정도에 말이야. 제일 비싼 건 얼마 받았는지 알아?”
공화련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공서련도 더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닌지라 예전처럼 작은 일로 호들갑일 리는 없었다. 수백 냥에서 수천 냥 선이었다면 기껏해야 그 자리에서 놀라고 넘어갔지 이 난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설마 억대?”
“와아, 너무 크게 쓰는데. 그렇지만 맞았어!”
잔뜩 흥분한 얼굴의 공서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 상영기 한 대에 금화 일 억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 돼? 정식 판매 시작하면 한 대에 끽해 봐야 천 냥 대일 텐데! 돈이 썩어난다는 게 그런 사람 얘긴가 봐!”
“그럴 리가, 정말 억대라고?”
공화련의 첫 반응은 당황이었다.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봤니?”
“캐봤는데 수확은 없었어. 타지 사람인지 거래도 마석으로 했거든. 이미 왕성을 뜬 것 같아.”
공화련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기적상회의 영향력이 벌써 나라 밖까지 미치는 게 잘된 일인지 모르겠어. 우려했던 상황이 너무 일찍 닥치지는 않아야 할 텐데.”
기적상회는 남하국에서 이미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가장 부유한 상회도, 가장 규모가 큰 상회도 아니었지만 대신 성장 잠재력이 최고인 상회였다. 지금처럼만 발전해나간다면 전국 제일의 상회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하국은 결국 작은 나라였다.
소국에서는 상회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화련도 장차 국제환경에 진출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모종의 거대 세력이 기적상회를 노리기라도 한다면? 남하국에는 그들을 지켜줄 힘이 없었다.
그러나 대세는 거스를 수 없는 법. 걱정만 하고 앉아 있느니 더 부지런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편이 나았다. 각 방면의 구상을 서둘러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특히 수련재료를 모아들이는 일이 중요했다. 대륙에서 발붙이고 버티려면 모두가 강해지는 길뿐이리라.
“천제현은 어디 가고?”
“방금 나갔어.”
언니가 동생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뜻밖의 수확을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었던 상대는 본래 천제현이었을 것이다.
“조금 전에 대학자가 무기 공장에 일이 생겼다고 데려갔어.”
공서련은 금세 잔뜩 실망한 표정이 됐다.
공화련이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오늘 밤에 왕궁 연회가 열려. 왕성 귀족들이 전부 참석할 거고 우리도 초대장을 받았어. 넌 이제 유명인이잖니. 잘 준비해서 우리 기적상회의 면을 세워줘야지.”
“왕궁 연회?”
물론 신경 쓰고 가야 할 자리였다.
“알았어, 당장 준비할게!”
***
천제현이 도착한 왕성 무기 공장은 무안군이 직접 선정한 부지에 세워져 있었다. 왕성에서 무려 오십여 리 떨어진 첩첩산중.
주변 숲 속에는 동방 가문의 고수들이 쫙 깔려 있어 참새 한 마리도 멋대로 날아 들어오긴 힘들어 보였다.
“무안군도 참, 사람이 걱정이 많네요. 마력무기 공장이 뭐라고 일을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만드는지.”
뒤에 따라오던 고천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니, 정녕 모른단 말이던가? 이 무기 공장이 남하국에 어떤 의미인지를?’
마력 무기는 그간 견융족의 횡포에 시달리던 남하국에 판세를 뒤엎을 기회를 만들어줄 물건이었다. 국왕이 지금 천제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도 최소 절반은 그가 보유한 마력무기 기술 탓이었다.
신분 확인을 마친 천제현은 숙영지를 가로질러 바위 문과 동굴을 지나서야 공장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장에서는 반자동 3차원 생산기기 수십 대가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중이었다. 작업자들은 모두 통일된 제복 차림이었는데, 가슴께에 동방 가문의 상징이 선명했다.
물론 작업장 내부의 경비도 무척이나 삼엄했다. 붉은 옷의 동방 가문 병사들이 덩치 큰 개과 마수를 끌고 수시로 주위를 순찰했다.
“규모가 벌써 이 정도나 됐습니까?”
천제현이 놀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왕성 무기 공장은 중주보다 한두 달 늦게 착공했다. 하지만 지금 모양새라면 이미 중주를 따라잡은 것 같았다.
공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개별 생산된 부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거쳐 비밀작업장 안으로 운반됐다. 안에서 주문을 새기는 진법사만도 아마 수백은 될 듯했다.
이 무기 공장의 지분 절반은 기적상회 소유였다.
동방 가문이 공장 규모를 키울수록 기적상회도 이득을 보는 셈이었다.
“고천추 학사님! 천제현 학사님!”
동방 가문의 고위급 장로가 두 사람에게 예를 표했다. 두 눈 가득 존경심이 엿보였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상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따라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