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
제368장 엘프의 방문
화염 장미 상회는 왕성을 대표하는 상회 중 하나로, 주력 영역은 병기와 갑옷 생산이었다. 질풍기병단의 장비 역시 이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연매출이 수십 억에 달한다니 명실상부한 대형 상회임이 틀림없었다.
공화련이 접견실에 들어갔을 때 화염 장미 상회 회장은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4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흰 피부와 육감적인 몸매가 여전히 싱그러운 여인이었다. 성이 한 씨인지라 다들 그녀를 한 여사라고 불렀다.
“한 여사님이 이리 직접 와주시다니, 오늘 정말 귀한 손님을 모셨네요!”
공화련이 최고급 엘프의 녹차를 내놓으며 말했다.
한 여사는 공화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나서야 감탄 섞인 투로 답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미인이군요. 젊은 나이에 대단해요, 지난 두 달간 왕성에서의 행보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답니다.”
“무슨 말씀을요. 오십 년 역사의 화염 장미 상회 앞에서 저희 기적상회는 아직 명함도 못 내밀죠!”
“낡고 뒤처진 것은 새것을 못 당하는 법이에요.”
먼저 나서 직접적인 물음을 던진 건 공화련이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그런데 오늘 방문하신 용건이…….”
“양쪽 모두에 득이 될 만한 계획이 있는데, 공화련 씨가 관심을 보일지 모르겠군요.”
“편히 말씀해 보세요.”
“영화를 보고 온 참이에요. 지금껏 경험해 본 그 어떤 여흥보다 매력적이더군요. 조만한 왕성을 넘어 남하국 전체에 일대 파란을 일으킬 거예요. 쏟아지는 관심이 이렇게 뜨거운데 더 큰 이윤창출의 가능성을 발굴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얘긴데, 다음 작품 출연자들이 우리 화염 장미의 제품을 착용해 줬으면 좋겠어요. 상표도 잘 보이게 새겨서…….”
공화련이 짐짓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작에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요. 어차피 군인들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장비가 필요하지 않나요?”
한 여사의 태도가 한층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우리 병기와 장비만 넣어준다면 협찬료로 이천만 냥을 지원하죠!”
공화련이 피식 웃었다.
“한 여사님, 물론 가능이야 하지만 이천만 냥은 너무 적지 않나 싶은데요.”
‘이천만 냥이 적어?’
한 여사가 눈을 부라리며 대꾸했다.
“갑옷과 병기에 인장 좀 찍어달라는 것뿐인데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일 자체는 간단할지 몰라도 화염 장미 상회가 얻을 홍보 효과는 어마어마할 거예요. 그리고 한 여사님이 생각해낸 방안을 다른 상회라고 생각 못 해낼 것 같지는 않군요. 고작 금화 이천만 냥으로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얼마를 원해요?”
“최소 일 억!”
한 여사가 속으로 기함을 했다.
‘아주 날로 먹으려 드는구나!’
금화 이천만 냥도 적은 액수가 아니건만 다짜고짜 일억을 달라니. 상표 몇 개 박아주는 대가로 제작비 태반을 건져가겠다는 속셈인데, 영악해도 너무 영악하지 않은가.
“일억은 과하군요!”
한 여사가 난색을 표했다.
“아직 누구도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신문물 아닌가요. 일 억이나 쏟아 부었다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손해는 우리가 다 떠안게 될 텐데. 최대 오천만 냥 이상은 곤란해요.”
공화련이 느긋한 미소를 곁들여 대답했다.
“실은 협력사 모집을 위한 투자 설명회를 준비 중이에요. 다른 도시에도 극장이 들어서고 나면 엄청난 광고 효과가 발휘될 테니 관심 있는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믿어요. 금액이 과하다고 생각되신다면 기회는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겠죠.”
한 여사가 울며 겨자 먹기로 말했다.
“팔천만? 이게 최대치에요!”
차를 한 모금 마신 공화련이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극비정보를 하나 알려드리자면, 조만간 국왕 폐하와 손잡고 왕국의 역사를 총망라한 대작을 제작할 예정이에요. 대규모 전투장면도 물론 들어가죠. 남하국 왕실에 소장되어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질지도 모르는 영화인데, 아직도 일억 냥이 아까우신가요? 한 여사님, 지금은 이 가격이지만 앞으로 극장이 늘면서 파급효과가 커지면 가격에도 변동이 생길 거랍니다.”
“못 당하겠군요!”
결국엔 한 여사 쪽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일억으로 합시다. 대신, 우리 장비를 효과적으로 노출시켜줘야 해요. 간단한 소개와 칭찬도 곁들이면 더 좋고.”
“물론이에요!”
합의점을 찾은 두 여인은 곧장 계약서 작성에 들어갔다.
공화련의 표정에서 만족감이 묻어났다. 아직 제작에 돌입하지도 않은 <대하국의 봉화>가 국왕의 제작비 지원도 모자라 화염 장미 상회의 협찬료 일억 냥까지 벌어들인 것이다.
향후 흥행 수입에 부대 수익까지 생각하면 세상에 돈을 벌어도 이렇게 쉽게 벌 방법이 없었다.
한 여사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상인과 귀족들이 속속 사무실을 찾아왔다.
단순 협력에서 직접 출연, 상표 노출부터 정식광고, 연기자 지원, 심지어 내용 창작까지 온갖 제안이 쇄도했다.
공화련의 말이 옳았다. 기적상회는 표 값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현재 상황만 봐도 아직 제작도 전인 작품 한 편이 금화 이삼 억은 너끈히 벌어들이지 않았는가.
이걸 보고도 극장이 돈이 안 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한두 푼 버는 게 아니라 아예 자루 째 쓸어 담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공화련은 극장 사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남하국의 모든 주요 도시에 극장이 들어서면 그때부터가 진짜 돈벼락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에 품은 또 하나의 야망. 그건 바로 영화라는 문화를 주변국의 다른 민족에게까지 전파해 기적상회의 영향력을 훨씬 더 광활한 범위로 확대한다는 계획이었다.
영화관이 문을 연 지도 어언 일주일 남짓, 왕성을 가득 채운 열기는 식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뜨거워져만 갔다. 이제는 소문을 들은 인근 도시의 귀족, 부자, 행상들까지 영화 한번 보자고 천릿길도 마다치 않고 왕성으로 몰려드는 지경이었다.
왕성 극장은 매일같이 관람객들로 미어터졌다. 저렴한 입장권 가격도 수가 많아지니 꽤 짭짤한 수입이 되는 데다 극장 네 곳의 관람객들이 창출하는 부대 수익도 만만치 않았다. 이대로만 가준다면 한 달여간의 상영기간이 끝날 때쯤에는 투자금 대부분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네 개.
현재 운영 중인 영화관의 수는 고작 네 개에 불과했다.
네 개만으로도 이토록 눈부신 성과를 거뒀거늘 만약 극장이 여덟 개, 열여섯 개, 서른두 개…… 백 개로 늘어난다면?
누가 그랬던가, 극장이 돈이 안 된다고. 지금 보이는 저 앞날이 분홍빛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중간에 딸려올 온갖 부수입을 제하고서도 이 정도인데.
***
왕성 한 모퉁이,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검푸른 망토와 거기 달린 모자로 수려한 외모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기 흐르는 긴 머리와 소맷부리로 언뜻 드러난 새하얀 손만으로도 뭇 여인들을 울고 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왕성 극장을 바라보는 아비숑은 꽤나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누군가 망토 아래 감춰진 그의 진짜 모습을 봤다면 분명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내는 여인 뺨치는 미모만을 자랑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과는 달리 높고 뾰족하게 솟은 귀…… 엘프였다.
엘프는 마수령보다도 오래된 종족이었다. 빼어난 외모만이 아니라 인간에 비해 여덟 배는 더 긴 수명 역시 엘프의 특징이었다.
수명이 긴 생명체일수록 생의 즐거움을 위해 예술에 탐닉하는 법. 엘프들은 모두가 박학다식한 학자요,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남하국 주변에는 알려진 엘프들의 나라가 없었다. 지금 왕성에 나타난 남자 역시 우연히 근방까지 흘러들었다가 재미있는 신문물이 있다는 소문에 구경을 온 것이리라.
‘극장? 흥미로운 물건이 아닌가!
욕망에 사로잡혀 싸움질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들 중에도 예술을 아는 자가 있었다니‘
엘프로서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이미 수많은 인간국을 거쳐왔지만 아비숑이 특별하다고 느낀 곳은 남하국이 유일했다. 하잘것없는 소국임에도 남하국에는 대국에서조차 혀를 내두를 만한 물건이 즐비했다.
마력등, 마력 화로, 확성기가 그러했고 심지어 이곳에는 방송국까지 있었다. 대체 무슨 원리로 돌아가는 건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관람권은 이미 며칠 후 것까지 모조리 매진된 뒤였지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극장 내의 귀빈석은 경매 방식으로만 판매됐다. 대다수 귀빈석의 가격이 금화 십만 냥을 넘어선 상황. 입찰마감은 상영 세 시간 전이었다.
아비숑이 가장 가까운 극장에 도착한 건 마감까지 고작 10분을 남겼을 때였다.
“귀빈 관람석 한 장 주시지요!”
완벽한 인간의 언어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높은 음의 어조에서 고귀한 기품이 배어났다. 곧이어 새하얀 손이 마석 한 줌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 정도면 되겠나요?”
‘마석?’
기적상회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탁자 위에서 반짝이는 돌멩이는 고순도 고마력 함량의 중품 마석이었다. 중품 마석 하나의 가치는 하품 마석 백 개에 해당한다. 하품 마석 하나의 가격만 해도 무려 금화 만 냥.
다시 말해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건 금화 수백만 냥이었다.
“충분합지요, 그럼요!”
마석으로 표를 사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 술사들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 큰손이라니, 직원의 응대가 빠릿빠릿한 것도 당연했다.
“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귀빈 관람석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극장 내에서 가장 좋은 위치, 독립된 구조의 칸인지라 방해받을 일도 없었다. 게다가 전담 직원이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안에 들어간 아비숑은 일단 마력 요리법으로 만든 음식 몇 가지부터 주문했다. 중품 마석 몇 개를 던져주며 나머지는 용돈으로 쓰라고 하자 직원들이 기절할 듯한 표정이 됐다.
오십 년 치 봉급을 용돈으로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집중하고 싶으니 그만 나가 봐요.”
“네, 네!”
입이 귀에 걸린 직원들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으로 사라졌다.
젓가락으로 고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아비숑이 반짝 눈을 빛냈다. 인간의 음식에서 이런 맛이 나다니, 놀라웠다. 몇몇 엘프족 요리에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남하국은 정말이지 감탄스러운 나라였다.
이때 거대한 화면에 불이 켜지며 영화가 시작됐다. 우선은 사방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또렷한 매의 울음소리와 바람 소리가 흘러나와 실내를 채웠다. 거기에 화려한 영상까지, 전율이 일 정도의 몰입감이었다.
‘흥미롭군, 흥미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