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
제365장 천제현 대 왕자(2)
유명이 곧 천제현의 몸을 뒤덮어 그와 한 몸이 된 후 거대한 악마로 변했다. 사악하고 음침한 기운이 순식간에 기적상회 전체를 뒤덮었다. 동방호연은 그 엄청난 힘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 힘은 이미 현혼급의 위력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왕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거대한 화염 악마로 변한 천제현은 거만한 눈길로 동방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대결은 흥만 깨질 뿐이지요!”
***
동방호연과 천제현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남하왕은 왕궁 안에서 신하들과 함께 변경 지역의 병력 배치와 관련된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동방호연은 답답할 정도로 조용하고 강직한 성격이었으나. 스물일곱의 나이에 혼성 9성의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하국을 통틀어 그와 어깨를 견줄 만한 상대는 왕천룡뿐이었다. 이 기회에 천제현이란 놈을 손봐 줄 수 있으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동방호연의 성격은 워낙 유명하니 무안군과 대학자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무안군이 남하왕에게 보고했다.
“최근 견융초원의 동정이 이상합니다.”
사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기에 남하왕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신경은 오로지 천제현과 왕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건성으로 물었다.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조용할 날이 없었지 않소. 또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무안군이 대답했다.
“견융초원의 부족들 중 ‘지옥의 노래’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견융초원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부족이지요. 제가 집중적으로 신경을 쓰는 부족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최근 몇 달간 그 부족에 심어놓은 제 수하들이 전부 연락이 끊겼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문성군이 무시하는 말투로 말했다.
“견융족은 정찰능력이 뛰어난 놈들이오. 이상할 게 뭐가 있단 말이오? 내 수하들은 수시로 지옥의 노래 부족과 연통하며 중위층 인사들과 암암리에 거래를 하기도 한다오. 그러나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면 연통을 했을 것이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소.”
“정탐꾼 몇 명이 사라졌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한 번에 전부 연락이 끊기다니 이상하지 않소! 문성군 그대의 사람들은 이익관계를 통해 정탐을 하고 있으니 진위를 구별하기가 어려울 거요. 목적이 있어 고의로 만들어낸 함정일 수도 있고 말이오.”
무안군은 남하왕에게 말했다.
“신이 직접 정찰부대를 이끌고 견융초원에 가서 조사하고 오겠나이다.”
“견융부족은 심각한 내전을 겪고 있다고 들었소. 무안군은 견융족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니 직접 갈 경우, 오히려 놈들이 연합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오. 그렇게 되면 남하국은 더 큰 위기에 빠질 테니 저들끼리 싸우게 두는 게 낫지 않겠소? 전선에 있는 아군 군단 중 전룡군단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듯하니 그들로 하여금 정탐해 보라 명하겠소. 무안군이 직접 움직이는 건 아닌 것 같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안군은 확실히 민감한 신분이었고, 그가 움직일 경우 견융족들의 경계심만 높아질 가능성이 컸다.
다른 사람들이 채 의견을 내기도 전에 기사 한 명이 허둥지둥 뛰어들어왔다.
“폐하, 큰일입니다. 기적상회 본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왕자 전하와 천제현이 싸우고 있다 합니다!”
“음? 싸우고 있다고? 어떻게 된 것이냐!”
남하왕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흥미진진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그는 바로 그 표정을 숨기고 놀란 양 물었다.
“어쩌다 싸우게 되었다더냐? 다친 자는 없고?”
그 기사는 괴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큰 부상을 당해 한동안은 회복이 힘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구나. 죽지 않았다니 됐다. 요즘 젊은이들은 툭하면 서로 실력을 겨뤄 본다지? 굳이 말릴 일도 아니질 않느냐. 남하국은 본디 무를 숭상하는 나라! 그런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어찌 견융족과 이 오랜 시간을 싸울 수 있었겠느냐?”
남하왕은 개의치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만 물러가거라. 이 일은 잠시 후에 처리하도록 하마.”
이게 바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날뛴 결과다.
이번에는 호연의 손을 빌려 경고만 했을 뿐이다. 이번 일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그 기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폐하, 하지만…….”
“그쯤하면 되었다. 설마 내가 친히 앞에 나서서 젊은이들의 싸움을 말리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남하왕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호연의 성격은 모르는 자가 없다. 그가 싸움을 좋아한다고는 하나 원치 않는 사람과 억지로 대결을 펼치는 사람은 아니다. 상호 동의하에 공평한 대결을 했다면 패배를 통해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동방호연의 성격은 왕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도전과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이라 툭하면 싸움 걸 상대를 찾아 돌아다니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성 또한 나쁘진 않아서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겨루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천제현과 겨뤘다면 천제현이 동의했다는 말이 된다.
정식으로 결투를 하는 중에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어도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다는 게 남하국의 풍속이었다.
그러나 남하왕 앞에 선 기사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건 그렇지만 폐하. 되도록 빨리 의원을 보내시는 게…… 그렇지 않으면…….”
남하왕은 살짝 짜증을 내며 손을 내저었다.
“기적상회엔 남는 게 돈 아니냐? 굳이 짐이 치료사를 보내 줄 필요도 없을 터. 알아서 하라고 하라.”
그러자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고했다.
“폐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중상을 입으신 건 왕자 전하이십니다!”
콰직!
옥좌의 손잡이가 부러졌다. 남하왕은 사람들 앞에서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노기로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호연이 부상을 당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야!”
기사는 황급히 꿇어앉아 대답했다.
“왕자 마마께서는 기적상회 본사로 찾아가 천제현에게 대결을 신청하셨으나, 대결 중에 몇 차례나 땅에 쓰러져 심각한 부상을 당하셨고, 그 모습을 모두가 보았습니다. 폐하, 서두르지 않으시면 왕자 마마가 위험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멍청한 놈!”
남하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제현한테 얻어맞고 중상을 입다니. 이 일이 왕성 밖으로 알려지면 왕족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 아닌가! 빌어먹을! 천제현 이 망할 놈이!’
“폐하, 진정하시옵소서!”
고천추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앞으로 나와 말했다.
“우리 남하국은 자고로 무를 숭상하는 나라 아닙니까. 공평한 대결 과정에서의 생사는 하늘의 뜻에 달린 것. 왕자 마마의 패배로 천제현을 벌주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폐하께서 방금 전에 친히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조보도 정색을 하며 말했다.
“폐하, 신도 같은 생각입니다. 군왕은 말을 바꿔서는 안 되는 법이라 사료되옵니다!”
남하왕은 분노와 창피함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을 뒤집는다면 체면을 구길 건 자명한 일이었다. 만약 번복한다면 그 소문이 내일 성안에 퍼지면 불만의 목소리까지 나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이를 악물고 분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천제현을 벌하지 않을 거라면 체면이라도 챙겨야 한다.
“괜한 걱정을 하는구려. 짐 역시 천제현을 벌할 생각은 없소. 호연이 거만한 데가 있어 걱정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교훈을 얻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 오히려 천제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군!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요.”
남하왕은 주변을 둘러보며 손을 내저었다.
“마차를 준비하라. 기적상회에 다녀오겠다!”
남하왕은 마수차에 올라 급히 기적상회 본사로 향했다.
사실 동방호연의 상처가 처음부터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천제현이 염마변을 시전하는 걸 본 그는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마력을 혼성 7성까지 높여 진혼급의 실력으로 천제현과 겨뤘다.
동방호연은 믿을 수 없었다.
‘천제현이 단계를 뛰어넘은 대결까지 가능하다고?’
게다가 이건 보통의 초월 대결이 아니었다. 혼성 6성과 혼성 7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동방호연을 절망에 빠지게 한 것은 염마변을 시전한 후 천제현의 전투력이 진혼급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가볍게 동방호연을 제압했다.
동방호연은 어릴 때부터 하늘이 낸 기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가 자기보다 높은 실력의 술사를 쓰러뜨린 적은 있어도, 자기보다 낮은 실력의 술사에게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그를 쓰러뜨린 자는 그가 요란하게 꾸짖은 천제현 아닌가.
‘저놈이 정말 이렇게 강하다고?’
동방호연은 이미 중상을 입은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천제현과 겨뤘다. 이때 그는 혼성 8성의 힘을 썼고, 그러자 비로소 천제현과 막상막하로 겨룰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상회 한 구석에서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한파가 일더니 검은색 그림자가 허공에서 뛰어내렸다. 바로 천제현의 개인 경호원, 심빙우였다.
심빙우는 왕성에 온 이후 계속 폐관 중이었다.
폐관을 끝내고 나온 그녀는 실력이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고, 기운만 봐서는 이미 혼성 9성 정점에 도달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현재 심빙우의 마력 경지는 남하팔후와 맞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동방호연은 입으로 피를 뿜을 뻔했다.
심빙우의 나이는 서른 몇에 불과했다.
자신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여인이, 자기보다 많은 자원을 지원받지도 못한 여인이 혼성 9성 정점의 경지에 오르다니.
그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소란을 피우는 게 누구냐!”
“심 선생님, 저자예요!”
심빙우는 즉시 눈꽃표창을 던져 동방호연의 갑옷을 맞췄다. 그 통에 동방호연은 다시 한 번 바닥에 쓰러졌다. 여러 차례의 타격을 받은 동방호연은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거만하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 자들은 대체 뭐지? 남궁혜부터 천제현, 심빙우까지, 쉬운 놈이 하나도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