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
제345장 견융족의 등장
서심노자가 왜소한 몸을 휘릭 날리는가 싶더니 늪 표면의 부유물을 밟으며 순식간에 수십 장을 앞서나갔다.
꾸르륵, 꾸르륵!
그때 수면 위로 엄청난 양의 기포가 솟구쳤다.
늪 바닥에 쌓인 독기가 기둥 모양으로 뭉쳐 한꺼번에 분출되는 장면이었다. 아마 지금 저 자리에 뭔가를 갖다 댄다면, 그게 강철 덩어리라 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 없어지리라.
뒤이어 두꺼비처럼 생긴 생명체 십여 마리가 진흙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적조와 검푸른 흙덩이가 덕지덕지 붙은 몸통은 마치 그 자체 역시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찌그러지고 흘러내리며 불안정한 양상을 보였다.
다름 아닌 늪지 괴물.
붉은 늪에만 사는 독특한 생명체였다.
놈들은 늪을 이용해 사냥감을 잡는 포식자로, 맹독을 지닌 위험한 존재였다.
단, 공격력이 높은 건 아니어서 독만 피할 수 있다면 혼성술사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심노자 같은 고수에게야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파파파팟!
핏빛 칼날 수십 개가 한바탕 휩쓸고 간 자리, 남은 건 괴물의 잘 다져진 잔해가 고작이었다.
서심노자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로 늪지 안쪽을 향해 걸음을 마저 재촉했다.
역시 무시무시한 실력의 늙은이였다. 심빙우를 데려와도 열 합을 버텨내기 힘들 듯했다. 노파와의 정면대결을 피하기로 한 건 매우 옳고도 또 옳은 선택이었다.
천제현이 서심노자 뒤에 따라붙었다.
붉은 늪에는 막대한 양의 적조 외에도 적색을 띤 갈대가 빽빽이 자라고 있었다. 약재로 쓰이는 이 갈대는 적소진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갈대밭 안쪽 역시 독사를 비롯한 온갖 맹독성 파충류의 천국이었다. 구석구석 어디에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붉은 늪이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적혈총타가 이런 곳에 지어졌을 줄이야.
늪지대 깊숙이 들어감에 따라 땅에서 올라오는 독기운이 점점 더 강해졌다. 짙어진 붉은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요 몸도 갈수록 견디기 힘들었다.
독안개를 이겨내려면 준비한 단약을 복용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천제현은 최고 이동속도로도 꼬박 하루가 걸려서야 붉은 늪의 중심에 도달했다.
사방에는 늪지가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늪지 내부는 어지럽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적조로 뒤덮여 있는 바람에 육안으로는 알 수 없었다. 이곳에 빠지면 소용돌이에 휘말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까지 끌려 내려가 결국 진흙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곳에 나타난 마수와 생명체는 생김새가 흉측할수록 위력도 컸다. 진혼 강자라 하더라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었다.
서심노자는 늪지 괴물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천제현은 시종일관 서심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주변 갈대밭에 빼꼼히 머리를 내민 여우를 발견했다. 여우가 천제현 쪽으로 가볍게 소리를 내고는 발을 휘휘 저으며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손짓하자 새끼 여우가 재빠르게 숨었다.
서심노자가 늪지 괴물을 제거한 후 불만스럽게 뒤돌아보며 물었다.
“뭘 꾸물대는 거야?”
“당주 어르신, 저쪽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뭐라?”
서심이 공중을 가로질러 천제현이 가리킨 방향으로 수십 장을 빠르게 돌진했다. 진흙이 사방으로 흐르는 늪지대에 도착해 눈앞에 있는 물체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암자색을 띤 거대한 촉수가 잘린 채로 갈대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 촉수의 길이는 3장 이상인 데다 암자색을 띤 표면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대하고 징그러운 빨판이 여전히 오므라졌다가 펴지는 것이 아직 완전히 죽은 것 같지 않았다.
매끄럽고 반듯하게 잘려나간 자리에는 자홍색 액체가 쏟아져 나와 주변 늪지에 끊임없이 유입되었고, 썩어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유독성 기체가 방출되고 있었다.
천제현은 짐짓 깜짝 놀라는 척 하며 말했다.
“이 촉수 괴물은 대단한 늪지 괴물인 게 분명해요. 이 괴물을 죽인 사람도 분명 엄청난 고수일 겁니다!”
“네가 떠들지 않아도 알고 있다. 잘려나간 부분이 예리하고 반듯한 것을 보니 촉수를 자른 사람은 혼성 9성 이상의 실력자일 게다!”
서심노자가 깊은 한숨을 쉬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동작이 빠른 놈이 있는 것 같군. 우리도 서둘러 적혈신전에 가야겠다.”
붉은 늪지는 면적이 방대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지나간 곳을 거쳐 갈 확률은 거의 없었다. 이 촉수 괴물은 새끼 여우가 천제현을 위해 일부러 이곳에 버려둔 것이다.
‘적혈신전에 간다고? 모두 다 들어가면 내가 거저먹을 시간이 없잖아?’
천제현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적소진에 남하국에서 온 고수 두 명이 나타났습니다. 남하국의 고수를 제외하고 견융초원의 강자도 있던데, 이번에 적혈 보물을 탐내는 자가 적지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들은 천마교 교도를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특히 적혈수존은 가공할 마력을 지닌 데다 세력도 막강해 그들이 가장 꺼리는 존재지요.”
천제현이 주저하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수존은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었잖습니까. 지금 깨어나시더라도 실력은 크게 떨어져 있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 고수들이 한꺼번에 적혈신전을 공격한다면 아마도…….”
“됐다!”
서심노자는 차갑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는 매서운 살기로 번뜩였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수존께 대적하려 들어? 가자! 따라와!”
천제현은 놀라는 체 하며 물었다.
“당주님! 먼저 신전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서심노자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했다. 비쩍 마른 몸으로 갈대밭을 지나 흔적이 보이는 쪽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곧 상대를 만나게 될 텐데 구태여 적혈전에서 싸울 필요가 있는가.
상대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쫓아가 단번에 습격을 가하는 방법도 있다. 한두 명 정도만 제거하고 적혈신전으로 가 수존과 합세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저승길로 직행하게 될 것이다.
‘이 녀석 말대로 적혈수존의 마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소생한 터라 한동안은 쇠약할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적혈수존의 명성은 이미 다 알고 있을 텐데 이 도둑놈들은 수존이 두렵지도 않은 것인가?’
적혈수존의 손에 떨어진다면 저들은 완전히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수존이 힘을 회복한다면 삼군급 강자들도 저들을 구할 수 없다.
저들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 할 테니 적혈수존을 공격 대상 1순위로 삼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협공하여 수존이 치명상이라도 입게 되면 적혈파에게 더 이상 미래는 없다.
서심노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가는 도중 산발적인 단서들을 찾았으나 추격하면 할수록 흔적들이 제각각이었다. 이는 새끼 여우가 상대가 있는 노선 쪽으로 서심의 주의를 끌려고 했기 때문이다.
붉은 늪의 핵심 구역에 가까워지자 독안개가 점차 옅어졌다. 천제현은 저 멀리 붉은 늪 중앙의 거대한 적색 장벽에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벽은 반구형으로 커다란 가림막이 늪지 중심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대규모 결계다! 저 결계 속에 봉인되어 있는 게 적혈신전인가?’
순간 전방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천제현과 서심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늪지 중앙에 마룡처럼 생긴 거대 괴물이 나타났다. 전신은 뾰족한 털과 비늘로 뒤덮여 있고 날카로운 흉기와도 같은 발톱에 몸집은 태산처럼 거대하고 공포스러웠다. 입에서 분출되는 녹색 빛은 가공할 살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녹색 빛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까지 가루가 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그것은 2급 특급 마수인 용석수(龍奭獸)로 남하팔후에 필적하는 마력을 지녔다. 붉은 늪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보기 드문 마수였다.
잿빛 도포를 입은 세 사람이 용석수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용석수는 녹색 마력을 미친 듯이 분출하였고, 이 힘이 휩쓸고 지나가면 어떤 것이든 그 자리에서 바로 분해되었다.
그러나 잿빛 도포를 입은 장신의 세 사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용석수의 막강한 실력에도 수세에 몰리기는커녕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사실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알 수 있다.
저들은 용석수의 힘을 빼기 위해 적당히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공할 힘을 자랑한다고 해도 용석수는 한낱 우둔한 마수에 불과했기에 이들의 전략을 알아차릴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세 사람 가운데 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과 낭아봉을 들고 있는 사람은 최소한 혼성 9성의 실력자였고, 이들 중 최고수는 좁고 긴 톱날 모양의 장도를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혼성 9성 정점의 실력자인 듯했다.
게다가 저들은 남하국 술사와는 완전히 다른 전투 방식을 보이고 있었다.
어쩐지 저 세 사람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으악!”
용석수가 또다시 화염을 분출했다. 광폭한 힘이 부채꼴 형태로 휩쓸고 지나가자 잿빛 도포를 입은 세 사람이 동시에 피했고, 화염이 그들 뒤에 있는 갈대밭으로 세차게 뻗어나갔다.
천제현은 그 화염이 자기 쪽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발각됐나?’
“흥!”
서심노자가 천제현을 잡고 뛰어 오르자마자 녹색 빛이 갈대밭을 훑고 지나갔다. 갈대밭 전체가 눈 깜짝할 새에 분해되어 가루도 남기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두 사람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잿빛 도포를 입은 한 사람이 달려들더니 막강한 정령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마치 독사의 이빨처럼 뾰족한 톱날 모양의 장도 두 개에서 날카로운 빛이 발사되었다. 현란하지 않지만, 그 힘만큼은 압도적이었다.
천제현을 떨궈 낸 서심노자도 정령을 방출하기 시작하자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도 그의 도포 자락이 펄럭였다. 그가 소환한 선홍색 이무기가 뒤에서부터 세차게 달려들더니 장도에서 방출된 빛을 한 입에 삼켜 버렸다.
서심노자가 곧바로 공격을 가하자 잿빛 도포를 입은 사람이 재빠르게 장도로 막았다. 그러나 힘의 반동으로 저만치 튕겨 날아갔다.
잿빛 도포가 찢어지고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상대의 모습을 보자마자 천제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은 7척에 육박하는 장신에 윤곽은 사람에 가까웠으나 전신에 덥수룩하게 털이 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늑대 모습을 한 머리였다. 짙은 녹색의 반질거리는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꿈틀대는 도깨비불처럼 간담을 서늘케 했다.
‘역시 견융족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