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
제344장 움직이는 천마교(2)
그것은 신의 권능에 근접한 정령이었다. 거한도 노파도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정령의 소유자라면 분명 천재 중에서도 천재일 터. 동급은 물론이요 상위급 적수와의 대결도 여유롭게 치러낼, 한계를 모르는 자이리라.
유별날 것 없어 보이던 청년이 신급 정령의 주인일 줄 누가 알았으랴. 그렇다면 그날 혼자만 살아나온 것도 설명이 됐다.
핏빛 보검이 드디어 완전히 검집을 빠져나왔다.
검붉은 안개에 휩싸인 청년의 신형이 빛의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두 개의 칼날이 맞부딪치는 찰나.
챙!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거한의 검은 이미 두 동강 난 뒤였다.
바닥에 내려선 청년의 무릎이 탈진한 모양새로 힘없이 꺾였다. 한편, 저쪽에서는 거한의 몸뚱이가 털썩 무너져 내렸다. 몸뚱이에서 떨어진 머리통이 데구루루 창고 입구까지 굴러갔다. 두 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채였다.
‘이것이 바로 신급 정령의 힘이란 말인가?’
실로 엄청나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검으로 바닥을 짚은 청년이 몸을 돌려 노파에게 예를 올렸다.
“당주님, 제가…….”
이때 노파가 청년의 말을 끊었다.
“조금 전에는 아주 그럴듯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 다시금 살의가 주위를 엄습해왔다.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어, 하지만! 네놈에게는 정녕 본좌가 천마교 교도조차 분별해내지 못할 장님으로 보이더냐?”
자신을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듯한 살기에 청년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지난번 두 분타주는 두어 달 동안 광기 어린 살육을 저지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혼성 9성 상태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이 당주라는 자는 겨우 며칠 만에 분타주를 넘어서 혼성 9성 정점의 실력을 회복한 것이다. 양쪽의 능력치 차이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현재 실력만 해도 남하팔후를 근소한 차로 넘어설 수준이었다. 천마교가 무서운 집단임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청년은 바로 천제현이었다.
그는 이 위장극에 허점 따위는 절대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천제현이 훔친 신분은 숲에서 처치한 마교술사의 것이었다. 수련일지에서 정보를 수집한 뒤 변장술을 동원해 외모도 바꿨다. 게다가 더욱더 마교술사처럼 보이기 위해 유명검 대신 음혈검을 들고 오기까지 했다.
그 음혈검은 천시에게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음혈검에는 적혈파 마공과 흡사하게 인간의 정혈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들켰을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당주도 괜히 으름장 한번 놓아보는 것일 뿐이리라. 그렇다면야, 이 기회를 역으로 이용해 가짜 신분을 더 믿게 만드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분타주들을 죽이고 천마교 교도인 척 본좌를 속여넘기는 게 가능할 줄 알았더냐?”
노파가 내뿜는 살기가 점점 더 강해졌다. 핏빛 손톱 끄트머리에 막강한 에너지가 모이는 게 보였다.
“그 검도 네놈이 쓰는 무공을 마공으로 위장하기 위한 도구일 뿐일 테지. 우습지도 않은 장난질로 감히 본좌를 농락하려 들어!”
“소인, 정식 교도가 아닌지라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적혈파 절학을 시전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청년이 황급히 덧붙였다.
“당주님을 속이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부디 굽어 살펴 주십시오!”
“내가 널 어찌 믿고!”
천제현이 자못 큰 결심이라도 한 양 이를 악물었다.
“천마교 재건 후 소인을 확실히 키워주시겠다면 주종계약을 맺고 일평생 당주님 곁에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오히려 당황한 건 노파 쪽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떠보려던 것뿐.
애초에 저 청년이 첩자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신분 자체가 확실한 자였고 위협이 될 만한 고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근거는 강력한 정령을 부린다는 점이었다. 어딜 가든 애지중지 대접받을 초특급 천재를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미끼 따위로 삼아 불구덩이에 던져 넣겠는가? 있을 리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툭 한 번 던져본 으름장에 이렇게 큰 수확이 걸려 올라올 줄이야.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녀석이었다. 꼭두각시나 다름없이 부릴 수 있는 자를 잘 키워 높은 자리에 올려놓으면 앞으로 얼마나 쓸모가 많겠는가.
“네 충심이 가상하니…….”
노파가 살기를 누그러뜨렸다.
“기회를 주도록 하마. 본좌와 정신계약을 맺겠느냐?”
“예!”
천제현이 정신 일부를 분리해 계약서에 봉인했다. 이제 계약서와 함께 그의 생사여탈권 역시 노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노파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교단의 재건을 앞둔 시점, 그 어느 때보다도 인력이 아쉽던 참이었다. 이런 인재를 붙잡아둔다면 교단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셈은 물론이요 앞으로 천마교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좌는 서심노자(逝心老人)라 한다.”
계약서를 손에 넣은 시점부터 노파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상대방의 명줄이 제 손아귀에 들어온 판에 의심의 여지가 더 있겠는가.
“총타의 문이 곧 열린다. 우리 손으로 수존님을 깨우거든 분명 큰 상을 내리실 게야. 놓쳐서는 안 될 절호의 기회이니라.”
“예, 감사합니다.”
“이 단약병을 챙기거라. 하나는 땅에서 올라오는 독기운과 독안개를 막아주는 단약이고 다른 하나는 상처를 치료하는 용도다.”
서심노자가 단약병 두 개를 던져주며 말했다.
“적혈전의 결계가 서서히 안정화 되고 있다. 출발이 목전이니 속히 몸을 회복해야 할 것이야.”
단약병을 받아 밖으로 나온 천제현이 싸늘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 몸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 착각하고 있으렷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대로였던 것을!’
천제현의 작전은 알고 보면 간단했다.
‘내 힘으로 안 될 바에야 남의 힘을 이용하라!’
견융족 고수, 남하국 고수, 천마교 당주 서심노자, 전부 막강한 상대들이었다. 강대강의 경쟁구도는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타격을 주게 마련. 천제현은 그 때를 노릴 생각이었다.
깜찍한 여우 한 마리가 길가 구석의 땅굴을 비집고 기어 나왔다.
부르르 몸을 흔들어 진흙을 털어낸 여우가 재빨리 천제현의 품속으로 뛰어들더니 단약 한 알을 토해냈다.
“정신계약 따위로 날 묶어두겠다고? 웃기고 있군! 굳이 이 몸의 소유권을 따지자면 공서련이 먼저여도 한참 먼저지, 어디서 흉측한 늙은이 따위가!”
미리 준비해 둔 재료를 꿀꺽 한입에 삼킨 천제현이 즉각 손실된 정신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그걸로 걱정은 끝이었다.
노파가 준 단약을 꺼내 냄새를 맡아본 천제현이 다시 한 번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나 독성분이 섞여 있었다. 잠복기가 긴 종류로, 한 번 중독되고 나면 약을 조제한 이 말고는 누구도 치료가 불가능한 독이었다.
만약 이걸 먹었다면 일정 기간 간격으로 개미떼가 온몸을 갉아대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으리라.
천성이 잔인한 마교술사들은 저급한 수단으로 수하를 조종하길 좋아했다. 단순히 생사여탈권만을 빼앗는 정신계약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않고도 부하를 고분고분하게 길들일 수단으로는 약물만한 게 없었다.
“늙은이, 잠시나마 즐거울 시간을 주마.”
천제현이 단약을 새끼 여우에게 넘겼다.
“당분간 그 늙은이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해.”
새끼 여우가 단약 한 알을 휙 던져 올렸다가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려 냉큼 집어 삼켰다. 새끼 여우는 맹독이 든 단약을 간식 씹어 먹듯 까드득 까드득 씹으며 천제현에게 문제없다는 발짓까지 해 보였다.
“계획 다시 한 번 말해 줘?”
끼잉, 낑!
지금 이 여우 어르신의 지능을 의심하는 거냐? 중간중간 단서를 흘려서 왕성에서 온 자들, 견융족, 노파가 서로 싸우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새끼 여우로 말할 것 같으면 대단한 능력까지는 없어도 잠행과 줄행랑만은 일류라 자부하는 녀석이었다.
서심노자는 물론이고 남하삼군이 와도 새끼 여우를 붙잡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런 녀석에게 일을 맡겼으니 실수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언뜻 심각해 보이는 천제현의 상처는 사실 대부분이 위장용이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다시 원래의 쌩쌩한 그로 돌아오리라.
***
“출발하자꾸나.”
적소진을 벗어난 서심노자와 천제현은 붉은 늪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늪은 광활한 면적의 늪지대로, 다양한 생물군의 서식처이기도 했다. 특히 개중 몇몇 늪은 깊이가 수백 장에 달했다.
다시 말해, 그런 늪에 빠진다면 살아 올라올 희망은 버리는 게 좋았다.
붉은 늪의 또 다른 위험성은 공기에 있었다.
이곳 바닥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식물은 적조라고 불리는 종이었다.
붉은 늪 전역에 분포하는 이 식물은 흙탕물 속의 퇴적물을 양분으로 빠르게 생장했다. 그 과정에서 적조가 뱉어내는 독성물질은 특성상 자연분해가 어려웠는데, 이런 물질이 오랜 세월에 걸쳐 땅에 쌓인 결과 붉은 늪의 땅은 강한 독기운을 뿜어내게 됐다.
덕분에 붉은 늪의 지면은 항상 탁한 독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혼성술사가 아닐 경우 한 시간 안에 흥분, 분노, 환각 등 중독증상을 호소하다가 결국에는 미쳐 죽는 게 보통이었고, 혼성급 이상의 술사라 해도 적절한 보호조치 없이는 습지 안쪽까지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안쪽으로 향할수록 독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일반인은?
당연히 늪지 가장자리조차 접근 불가였다.
붉은 늪을 눈앞에 둔 천제현의 첫 반응은 경악이었으니, 상상 속의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그 원인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선홍색이었다.
그 선연한 붉은빛은 적조가 내는 색깔이었다. 시선을 멀리 던지면 붉은 바다와 흡사한 장관이 펼쳐졌다. 이 늪지에는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파도가 밀려가고 다시 밀려오듯, 늪은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 쉼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앞서 걷던 서심노자가 말했다.
“늪에 고인 물은 부식성이 몹시 강하다. 잘못해서 미끄러지기라도 했다가는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릴 테니 죽고 싶지 않거든 정신 바짝 차리거라!”
천제현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