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제342장 보물을 노리고 모여드는 강자들
적혈총타 궤멸 당시 정예 대부분 역시 함께 목숨을 잃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건 분타주 열 명과 당주 한 명, 그리고 수존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수존은 금지된 주술로 수백 년 세월을 뛰어넘어 재기의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분타주 열 명 중 셋은 천제현의 손에 끝장났으나 나머지 일곱의 행방은 불분명한 상황이다.
그들이 사용한 비술은 실력과 마력이 부족할수록 휴면 도중 사망할 확률이 높아지므로 나머지 분타주들은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적혈당주는 잠에서 깨어나 총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수존은? 그 무시무시한 실력의 소유자가 침대에서 황당하게 죽었을 리가 없다.
지금은 몰락했을지 몰라도 한때는 찬란한 왕국을 건설했던 천마교이다.
통행증까지 손에 들어온 판에 한번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적혈수존이 세상에 나오면 남하국이 위협받게 될 건 뻔한 일. 대단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천마교가 부흥 과정에서 기적상회와 마찰을 일으킬 게 문제였다.
그걸 원치 않는다면 수존의 부활을 막아야만 했다.
몇날 며칠을 이동한 끝에 일행 셋은 적소진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인구 십만이 넘는 도시였지만 길가에 늘어선 건물은 누추하기 짝이 없고 길은 온통 질퍽거렸다. 마주치는 사람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몰골들이 다 진흙투성이였다.
어쩌겠는가.
늪지대 위에 도시를 지은 결과인 것을.
“오는 내내 진흙구덩이였어.”
남궁혜는 여관 문턱을 넘자마자 목이 긴 신발부터 벗어던졌다. 안에서 시커먼 흙탕물이 쏟아져 나왔다.
“젠장, 발이 다 퉁퉁 불어 터졌잖아!”
천제현의 시선이 슬쩍 그녀의 다리를 훑었다.
공화련만큼 비현실적이진 않아도 남궁혜 역시 황금비율의 다리를 갖고 있었다. 하얗고 늘씬하게 빠진 다리에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가 더해져 후끈한 광경을 연출했다.
“여긴 늪에 근접한 곳이에요. 붉은 늪은 창주초원에 위치한 늪지대로 남하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습지이기도 하죠. 당연히 멀쩡한 길이 없을 수밖에요.”
천제현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붉은 늪 안쪽으로 진입하면 길이 더 험해질 테니 오늘은 푹 쉬어둬요.”
열여덟 신혈강시도 진흙인형 뺨치는 모양새였다.
일단 강시들을 깨끗이 씻긴 천제현이 커다란 나무통 십여 개를 구해왔다. 연성진을 새기고 정혈 재료를 쏟아 넣은 나무통은 곧 강시들의 정련 공간이 됐다.
신혈강시는 붉은 늪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터.
분타주에게서 얻은 재료도 있겠다, 시간 난 김에 정련이나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신발을 주워 신은 남궁혜가 창가 햇빛가리개를 걷고 밖을 내다봤다.
“이렇게 치명적인 독안개로 가득한 붉은 늪 주변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지?”
“규모는 작아도 자원이 풍부한 도시에요. 늪지 특산품은 값이 꽤 나가니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죠.”
“방금 발견한 게 있어.”
안으로 걸어 들어온 심빙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
심빙우를 따라 여관을 나온 두 사람은 골목 한구석 벽면에서 검은 색으로 적힌 부호를 발견했다. 남들이 언뜻 보기에는 낙서로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이었지만 세 사람에게는 아니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남궁혜가 확신 없는 투로 물었다.
“설마?”
“맞아요, 천마교의 연락암호.”
천제현이 곧장 답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여정 내내 수첩을 손에서 떼지 않아 암호에 빠삭한 덕이었다.
“적혈당주가 이미 적소진에 있는 모양이군요.”
남궁혜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빨리?’
천제현이 채 말을 잇기도 전, 거리에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화물용으로 쓰이는 늪지 도마뱀 마수차가 미친 듯이 이곳저곳을 들이받으며 진흙을 튀어대고 있었다. 도마뱀에게 밟힌 사람만도 한둘이 아니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와 동시에 세 사람은 도시 서쪽으로부터 강력한 기운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마수차를 끌던 도마뱀들이 날뛴 이유도 그 기운에 놀란 탓이었다.
“가까이에 거대한 마수가 있어요!”
말이 끝나는 순간.
어마어마한 몸집의 마수가 일행의 머리 위를 스칠 듯 낮게 날아 지나갔다. 육중한 날개가 드리운 그림자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사람이고 마수차고 할 것 없이 기겁해서는 숨기 바빴고 늪지 도마뱀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었다.
흉측하게 생긴 마수였다. 길이는 약 3장, 털 한 가닥 없는 갈색피부는 두껍고 울퉁불퉁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자 피부 아래 날카로운 골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기다란 꼬리 끄트머리는 녹색 화살촉 모양이었기에 마수가 지나간 자리에는 희미한 녹색 궤적이 남았다.
천제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쌍익독룡(雙翼毒龍)!”
쌍익독룡은 이름과는 달리 용족이 아닌 2급 상위 맹독계 마수였다.
2급 하위 마수에 불과한 남하국 왕궁기사의 그리핀도 한 마리당 금화 삼천만 냥을 상회했다. 비행마수는 육상 마수보다 두 배는 더 값이 나가는 게 보통이었다.
쌍익독룡은 진혼급 고수에 필적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마수는 원래부터도 대적 불가능한 우위를 지닌 생명체, 일반적인 진혼급 고수라면 쌍익독룡과 붙어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사실 놈의 가치는 돈으로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남하국처럼 작은 나라에서는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쌍익독룡이었다.
쌍익독룡의 등 위에는 오만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올라타 있었다. 자색 갑옷에 기다란 창, 몸 전체에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고삐나 다른 고정 장치가 전혀 없음에도 남자는 마치 쌍익독룡의 등에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듯 여유로운 자세였다.
심빙우가 낮게 읊조렸다.
“익룡상장(翼龍上將) 왕도야!”
천제현이 재빨리 되물었다.
“누군지 알아요?”
“남하국에 쌍익독룡을 타는 장군은 하나뿐이니까.”
잠시 망설이던 심빙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왕성 선발군단 중 하나인 전룡군단(戰龍軍團)의 2인자이자 선봉장이야. 견융초원에서 오랫동안 견융족을 견제해온 덕에 명성이 대단하지.”
왕도가 돌연 한 방향을 노려봤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 방향에 등장한 건 황금색 가마처럼 생긴 물체였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가마 주위로 눈부신 불꽃이 튀었다.
“유화교(流火橋)!”
유화교는 무기 제조 기술이 적용된 일종의 교통수단이었다. 사용자가 표면에 새겨진 동력 시스템에 마력을 불어넣음으로써 가마의 비행능력을 활성화하는 원리였다.
이 역시 몹시 보기 드문 물건이다.
이 가마를 만드는 데는 성품 금속재료가 필요했다. 게다가 재료값만 억만금인 게 아니라 거기 새겨진 마력진은 심지어 고대 천족의 기술이었다.
“유화교는 남궁 가문의 보물이야.”
심빙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남궁 가문 사람이겠군. 그것도 지위가 높은.”
“그 유명한 익룡상장 왕도 장군을 뵙게 되다니, 듣던 대로 풍채가 늠름하십니다.”
유화교 안에서 온화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좌연이라 합니다.”
“남궁 가문의 상경인가.”
왕도의 눈빛에 경계심이 서렸다.
“사교가 남긴 찌꺼기 따위가 남궁 가문의 관심까지 끌줄은 몰랐습니다그려.”
좌연이 개의치 않는 투로 말했다.
“비룡장군께서는 어찌 안 오시고!”
“장군께서는 초원에서 의무를 다하고 계십니다. 비룡장군이 직접 오셨다면 그쪽한테는 아예 기회조차 없었을 겁니다.”
왕도가 호탕하게 웃었다.
“어쨌든 이렇게 만난 참에 손을 잡는 건 어떻습니까?”
“손을 잡다니, 내가 왜!”
“방금 들어온 첩보에 따르면 적혈령 일부가 견융족의 손에 있다고 합니다. 작전 중에 견융족 고수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쪽이나 나나 단독 행동으로는 승산이 없을 텐데 어쩌겠습니까.”
“견융족이라니? 견융족이 남하국 내륙까지 들어와 설친다는 말입니까?”
“믿든 말든 그건 그쪽 자유고.”
좌연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정말 견융족이 개입했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천마교 잔당도 나타날 거라는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던가. 분타주만 해도 쉬운 상대가 아닌데 당주급 인물까지 끼어 있다면 큰일이다.
“좋습니다! 협력합시다!”
상황을 지켜보던 천제현 일행의 얼굴이 구겨졌다.
돌연 일이 꼬이고 있었다.
천마교 당주가 근처에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심빙우에게 필적하는 고수 둘이 손을 잡기까지.
베일에 싸인 견융족 고수도 끼어들었다고 했던가.
모르긴 몰라도 그자 역시 심빙우보다 약하지는 않으리라. 적혈파 보물 쟁탈전에 피 튀기는 경쟁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대장, 어떻게 생각해?”
“너무 쉽게 흘러간다 했어요. 우리만 보물이 탐날 리야 없겠죠.”
턱을 만지작거리던 천제현이 순간 눈을 빛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면으로 맞붙어 봐야 우리가 전적으로 불리해요.”
천제현, 남궁혜, 심빙우.
셋 중 고급 진혼술사로는 심빙우가 유일했다.
천제현과 남궁혜는 아직 혼성 5성, 제아무리 전투력으로는 빠지지 않는다고 해도 이번에는 어느 쪽과도 상대가 안 될 게 뻔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남하국 고수든 견융족이든 보물이 목적이라면 사전에 장기간의 정보수집과 준비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천마교 당주의 대비태세야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천제현 일행은 실력에서도 밀릴뿐더러 여정 자체가 우연히 시작된 탓에 사전 준비도 전혀 없었다. 이대로 대책 없이 끼어드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천제현은 약간 흥분한 얼굴이었다.
“미친 짓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수고를 많이 덜어줄 겁니다.”
남궁혜가 눈을 반짝였다.
“얼른 말해 봐!”
천제현이 방금 떠올린 계획을 설명한 후.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배짱이라면 자신 있는 남궁혜도 그 계획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완전히 볏짚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꼴이야. 실수하면 끝장이라고.”
언뜻 무덤덤한 듯한 심빙우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천제현이기에 가능한 정신 나간 계획.
“걱정할 것 없어요. 새끼 여우가 마지막으로 지옥 화염을 소환할 수도 있고 저도 그렇게 만만한 놈은 아니니까요. 신중하게만 움직인다면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결심이 선 거야?”
“시간 없으니까 당장 준비하죠. 필요한 재료를 좀 부탁할게요. 특히 정신력 보강에 쓸 것들이 많이 필요해요. 서두릅시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던 심빙우와 남궁혜가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은 천제현인 걸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