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
제338장 창주의 악마
남궁혜를 통해 천제현은 왕성의 대략적인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각 가문들 간의 이익쟁탈전 따위야 코웃음 한 번 치고 넘겨 버릴 수 있었지만, 그들의 세력 범위 안에 들어가려면 단단히 준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천남성은 수련에 필요한 자원이 몹시 부족한 곳이기 때문에 지난 십 년간 남궁혜의 성장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러나 최근 몇 달간 눈부신 성장을 이룬 그녀를 이화후가 모를 리가 없었다.
기적상회를 노리는 이화후의 최종 목표 역시 남궁의 부녀를 쳐내는 것이었다. 결국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다른 방법을 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관두자!’
천제현은 남하왕과 문성군 앞에서도 겁먹지 않는 인간이다.
‘이화후 따위가 뭐라고!’
같은 팔후 중 한 명인 신풍후는 거의 천제현의 수하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으며, 금전후도 천제현을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명문가 출신인 사방후조차 천제현에게 포로로 잡혀 모욕을 당하지 않았는가?
남궁혜가 천제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대장, 나중에 우리 남궁 가문을 공격할 거야?”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그건 왜 물어?”
“아가씨가 원한다면 이 참에 남궁 가문 사람들을 좀 혼내 주려고요. 제가 워낙 인정 많은 대장이라서 말이죠. 아랫사람이 괴롭힘을 당했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요?”
남궁혜는 천제현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네. 남궁 가문은 거대한 짐승 같은 존재라고. 정말 날 위해 그 거물들을 건드릴 수 있겠어?”
입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남궁혜의 마음은 매우 기뻤다.
‘역시 대장은 의리가 있다니까.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지!’
천제현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남하국은 너무 작아요!”
중주에서 왕성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사주호에서 줄곧 북쪽을 향해 반 정도 이동한 후 나머지 길은 강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배를 타고 북쪽으로 계속 가면 왕성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하국은 1역 8주로 이뤄져 있다.
왕성이 있는 왕역이 1역이고 그 외에 중주, 뇌주, 남주, 청주, 창주, 노주, 서주, 동주를 일컬어 8주라 한다.
각각의 주는 지리적으로 한쪽에 치우쳐 있었는데, 중주만 8주의 중심지에 위치했다. 그래서 운송과 교류의 중추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이밖에 뇌주는 군사 훈련지, 남주는 야만족을 막아 주는 장벽, 청주는 자원 도시 역할을 했으며, 창주는 말 생산지로 유명했다. 질풍기병들이 타는 질풍청구도 창주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하국에 있어 이 8주는 무엇 하나 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명망과 신임이 높은 사람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 그러므로 남하팔후는 무공만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공로나 명성까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달해야 했다.
이것은 중주에서 세력을 크게 키운 천제현을 남하왕이 못마땅해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남하왕은 천제현이 특사를 공격해 중상을 입힌 것도, 삼대 가문 사람들을 죽인 것도, 오만 방자한 천제현의 태도도 용납할 수 있었지만, 제후가 아니면서 제후로서의 실세를 지닌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천제현의 중주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회장님!”
상어해적단 정예병 한 명이 들어와 보고했다.
“길을 바꿔야겠습니다!”
천제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어째서지?”
“원래는 운하를 따라 창주와 왕역의 교차지까지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 다음에 육로로 왕성에 진입할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전방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창주와 왕역의 경계지역에서 전대미문의 유혈 사건이 있었답니다. 그 일로 주변이 몹시 시끄러운 상태입니다. 왕성에서 고수들도 많이 온 것 같고요.”
‘대체 무슨 일이지?’
천제현은 왕성에 들어가기 전까지 되도록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면 가능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통행 검사도 매우 엄격할 것이다. 머나먼 중주에서 온 배이니만큼 시선을 끌 게 분명하다.
“유혈 사건이라고?”
남궁혜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대체 무슨 사건인데? 얼마나 끔찍하길래 그래?”
상어해적단 정예병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만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도살당했다고 합니다. 그 수법이 너무나 잔인하여 모두 공황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견융족의 짓이라는 사람도 있고 마수의 짓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합니다. 아무래도…….”
천제현이 그의 말을 자르며 외쳤다.
“육지에 배를 대거라!”
“네?”
“왕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육로로 가겠다. 지나가는 길에 상황을 좀 봐야겠구나.”
***
천제현은 창주 외곽 지역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왕역까지는 반나절 정도의 거리였다. 창주는 왕역 인근 도시로, 왕역과 서로 맞닿아 있었다.
왕역과 창주, 북방의 견융대초원은 모두 험준한 지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드넓은 평야지대였다. 그중에서도 창주평야는 남하국 최대의 주요 말 생산지로, 전국에 이름난 질풍청구 역시 창주에서 생산된다.
유목민인 견융족은 정착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유지해 왔다. 때문에 모든 종족이 병사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침략을 하지 않을 때는 광활한 대초원에 숨어 지내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침략을 할 때는 질풍처럼 빠르고 벼락처럼 강하게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한 후 다시 모습을 감추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뛰어난 기동부대 없이 견융족의 침입을 막는 건 불가능했고, 그런 점에서 창주평야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지였다.
그러나 왕역과 맞닿아 있는 데다, 일부 지역은 견융초원 옆에 있었기 때문에 수시로 견융족의 침입을 받아야만 했다. 이로 인해 전란이 끊이지 않아 남하팔주 중 세 번째로 큰 면적을 자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구수는 가장 적었다.
석양이 내려앉고 호수 주변의 풀들은 저 멀리 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창주에는 고목이나 숲도, 하늘에 닿을 듯한 험준한 산도 없어 더욱 아득하고 황량한 느낌을 자아냈다.
“멋지군. 이렇게 비옥한 초원이 있었다니. 그러니 그 많은 질풍청구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거겠지!”
육지에 오른 천제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견융족이 ‘대융국’일 때 송곳니 왕이 단번에 창주를 점령하는 바람에 대하국은 중요한 말 생산지를 잃었다고 들었어요. 그럼, 남하국은 어떻게 아직 망하지 않은 거죠?”
“흥!”
남궁혜는 시원찮은 말투로 말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정말 망했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을 수 있었겠어? 만약 왕성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큰일 날 거야!”
“그냥 해본 말이에요. 뭐.”
천제현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잠깐 쉬었다가 가죠.”
상어해적 한 명이 천제현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이곳은 대하진이라고 하는 마을로, 면적은 수백 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상어해적단 형제들이 며칠 전에 도착해서 지부를 만들고 있습니다. 대하진에서 잠깐 쉬신 후에 빠른 말을 타고 달리시면 왕역까지 반나절, 왕성까지는 사나흘 안에 도착할 수 있으실 겁니다.”
천제현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도 채 안 됐는데 벌써 창주에 자리를 잡았다니, 상어해적단이 수고가 많군!”
“상어해적단은 원래도 꽤 잘나갔습니다. 이제 기적상회의 자금 지원까지 받으니 성장속도가 더욱 빨라진 거지요!”
그 해적은 얼굴에 흥분의 빛을 띠며 말했다.
“저희는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사주호에서 나와 총 16개의 지부를 세우고 1만여 명의 신규 직원을 모집했습니다. 그중에는 고수들의 숫자도 꽤 되고요.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앞으로 몇 년 안에 남하국 수역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마을사람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하나 같이 아이를 안거나 손에 잡은 채 소와 양떼를 몰고 있었으며, 솥이며 그릇 같은 세간살이를 끌고 황급히 반대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보세오!”
이상하게 여긴 남궁혜가 물었다.
“그리 급히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대꾸 없이 도망가 버렸다. 등 뒤에서 악마라도 쫓아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직 모르는 거요?”
“어젯밤 대하진에 대살육이 일어났다오!”
“마을사람 수천 명이 남김없이 살해당했다지!”
“끔찍하지 않소? 빨리 도망가시오. 악마한테 잡히면 우리 모두 끝이오!”
마을사람들은 한두 마디씩 던지고는 그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허둥지둥 사라져 버렸다.
‘뭐라고? 대하진에서 대살육이?’
천제현은 방금 왕역 부근의 창주에서 최근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가는 길에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렇게 빨리 찾게 된 것이다.
“뭐라는 거야?”
깜짝 놀란 상어해적이 피난민들을 가로막고 그들 중 제일 앞에 서 있는 노인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 노인은 혼비백산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의 바지춤에서 오줌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만 둬!”
천제현이 성깔을 부리는 상어해적을 저지하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장,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들은 술사들입니다. 우연히 대하진을 지나가게 되었지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 당신들은 술사님이시군요!”
천제현의 말을 들은 노인은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실력 차이가 엄청났다. 마력이 강한 술사들이 백성들 몇을 죽인들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저희는 대하진 부근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촌장이고요. 오늘 아침 대하진에 장을 보러 갔는데 대하진에 들어가자마자…… 너무 놀라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요. 죽었어요. 마을 사람 전체가 죽었단 말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그런 장면은 여태껏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무서웠어요!”
“그렇습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한 건장한 사내가 옆에서 말을 덧붙였다.
“저도 그때 옆에 있었습니다. 촌장님의 말씀은 전부 사실입니다!”
“대하진은 이곳에서 5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살인마들이 주변에 있을 게 분명하니 빨리 도망가십시오. 그놈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피를 마시는 악마입니다! 그들에게 잡히면 우리는 모두 끝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놈들은 모두 악마예요!”
마을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