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
제337장 왕성으로
신풍후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학자 칭호는 낮은 것부터 학사, 대학사, 국사, 대국사, 현자, 대현자로 나눌 수 있네. 각각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정되어 있지. 사실 운 어르신의 학식이라면 충분히 대학사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남하국은 작은 나라인지라 한 번에 한 명의 대학사만을 봉할 수 있다네. 학자의 직함은 남하국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에 가서도 통용되지.”
천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3만 년 후의 세상에서 대현자였던 자신이 이제는 고작 학사라니, 지위 강등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학사 칭호를 받았다는 말은 남하국에서 진정한 학자로 인정받았다는 말과 같네.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도 훨씬 편해지지. 많은 특권이 있거든. 예를 들어 왕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고, 법적 절차 없이 자네를 형벌에 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네. 남하국에는 학사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학사들 모두가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네. 남하왕조차도 자네를 움직일 때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안 그랬다간 백성들의 질책을 받는 건 물론이고, 다른 왕국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네.”
‘그렇군.’
무안군의 특별한 배려가 분명했다.
이 세계에서 학자 신분은 호신부적 같은 것이었으니 안심하고 왕성에 들어오라는 의미이리라.
‘이렇게 된 거, 바로 출발하자! 왕성에 입성할 때가 됐다!’
특사를 배웅한 천제현이 남궁혜에게 말했다.
“아가씨랑 심빙우 누님 모두 준비하세요. 바로 중주를 떠날 거니까요!”
“에? 지금 출발하겠다고?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건데?”
남궁혜는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
“아버지 좀 뵙고 가려고 했더니.”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가야 더 편할 거예요. 아버님은 잘 지내고 계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기적상회의 통신 시스템이 구축되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잖아요? 어쨌든 잔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가요!”
“알았어, 알았어. 대장 말 들어야지, 뭐!”
***
어스름이 깔리고 저녁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굳게 닫힌 중주성 동문이 열리며 육중한 현수교가 내려왔다. 곧이어 달빛 아래 기사 몇 명이 평범해 보이는 마수차를 호위하며 항구를 가로질렀다. 검은색 중형 선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사주호는 더없이 광활하고 아득해 보였다.
신풍후와 운천학은 호수를 바라보며 조용히 탄식했다.
운천학이 먼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천제현에게 말했다.
“꼭 이렇게 밤에 가야 하는 건가?”
여행자 망토를 입은 천제현의 등에는 큰 조롱박과 장검이 매여 있었고, 허리춤에는 방울이 하나 걸려 있었다. 열여덟 신혈강시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언뜻 봐선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 행색이었다.
“제가 벌써 중주의 인기인이 되어 버렸잖아요. 공개적으로 백주대낮에 떠나 봐요. 중주성의 수많은 소녀들과 애간장이 끊어지는 이별을 해야 한다고요. 그러니 되도록 빨리 가는 쪽이 좋겠다 생각한 거예요. 이해하시죠?”
신풍후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여튼 겸손이라고는 모르는 놈이로다!”
“저 정도면 엄청 겸손한 거라고요.”
천제현이 손을 휙휙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얘기는 그만하고, 전 이만 출발할게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자네도 조심히 가게!”
“왕성은 중주와 다르다네. 외부에선 열두 견융족이 위협을 하고 내부에선 각종 세력이 얽히고설켜 있지.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게. 충동적으로 굴지 말고.”
“알겠어요, 알겠어요!”
사실 신풍후도 크게 기대를 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말을 해서 들으면 그게 천제현이겠는가?
배가 출발하려고 할 때, 중주성 방향에서 수많은 등불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수백 명의 백성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제현은 깜짝 놀라 말했다.
“에? 충분히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들켰군요!”
“천제현 님!”
“배웅 나왔습니다!”
“왕성에 가셔서도 열심히 하세요!”
“기적상회를 왕성으로, 아니, 전 대륙으로 확장시켜 주세요!”
몇백 명의 소년들이 기적상회의 손마력등을 들고 허둥지둥 부두로 달려오고 있었다. 천제현이 탄 배는 이미 출발한 상태라 소년들은 부두에서 소리 지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손마력등 불빛을 모아 거대한 ‘천(天)’ 자를 만들었다.
“다음에 만나요!”
천제현도 힘차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기적상회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기적상회에 들어갈 거야.”
“반드시!”
임범과 임선 남매를 비롯한 수백 명의 천맹 회원들은 열정을 주체 못해 눈시울까지 붉혔다.
중주에 온 지 몇 달이나 됐다고 이번엔 왕성이라니. 발전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그의 추종자들이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그러나 그들의 신념은 처음 그대로였다.
쉽게 쫓아갈 수 있다면 그것을 목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소년들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적상회에 들어가겠노라고. 천제현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기적상회의 역사에 기왓장 하나라도 얹어 자신들이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겠노라고.
함선이 서서히 시야 밖으로 멀어졌다. 칠흑 같은 밤중에도 중주성의 등불은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남궁혜는 탁자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앞에 있는 통조림은 뚜껑이 열려 있었으나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뭔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남궁 아가씨도 그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네요.”
천제현이 심빙우와 함께 들어왔다. 그는 남궁혜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처럼 원한을 잘 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남궁 가 출신인 만큼 민감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천제현이 남궁적의 무공을 폐한 후로 대다수의 남궁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있었다.
“한 잔 할래요?”
“좋지!”
천제현은 자신이 직접 담근 밀주를 따르며 말했다.
“아가씨는 남궁 가문과 왕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오래전 일이라서 가물가물하거든.”
남궁혜는 술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아홉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왕성에서 나왔으니까 벌써 10년이나 지났잖아. 왕성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걸. 기억나는 거라곤 견융초원에서 종주님이 전사하신 후로 우리 가문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는 거야.”
그녀가 말한 종주란 가문의 주인이 아닌 가문의 적통 계승자였다.
남궁 가문에서는 두 명의 제후가 나왔는데 한 명은 지금의 노주 제후인 이화후였고, 또 한 명은 열염후였다. 그 둘은 모두 염양군의 가장 재능 있는 아들로, 열염후는 첫째, 이화후는 여섯째였다.
유서가 깊은 남궁 가문은 동방이나 상관 가문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자랑했다.
대하국 시기 전부터 존재했던 남궁 가문은 대하국이 멸망하고 동방 가문이 의거하자 동방 가문의 최대 조력자로 부상했고, 오늘날까지 남하국 최강의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무안군은 군사 분야의 총사령관이지만 대부분 후방 지원만을 담당할 뿐, 진정한 전투 통수권은 남궁 가문에게 있었다.
지난날 열염후가 지휘하던 열염군은 남하국에서 손에 꼽히는 최강부대로 불렸으며 견융초원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
남궁혜는 바로 그 열염후의 방계 출신이었다.
열염후와 열염군의 명성이 대단했고, 또 열염후 자체가 뛰어난 실력을 갖춘 데다 사람됨도 진중했기 때문에 당연히 훗날 작위를 계승할 거라 점쳐지곤 했다. 그런데 10년 전의 격렬했던 전투로 열염군이 전멸하면서 열염후도 전사하고 말았다.
원래 남궁 가문의 서열은 삼대 가문 중 두 번째였으나 그 처참했던 패배 이후로 상관 가문에까지 뒤쳐지고 말았다.
두 제후 중에 하나를 잃고 이화후 혼자서 가문을 지탱하고 있으니 염양군이 죽으면 가문의 대권은 이화후에게 넘어갈 것이 자명했다.
이것은 열염후 계파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당시 그들은 열염후의 첫째 아들로 하여금 작위를 계승하게 할 계획이었다. 열염후의 첫째 아들은 남궁의의 사촌 형 뻘이 되므로 남궁의로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화후의 압박이 있었는지 아니면 세력 부진 탓인지는 몰라도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고, 이화후는 열염후의 세력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열염후 계파들은 가문의 대소사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으며, 외진 곳으로 보내지거나 군대 전입 명령을 받게 되었다.
당시 28세였던 남궁의는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장로 신분조차 지니지 않은 방계 출신이므로 이화후의 시선을 끌 리 없었다. 그런 그가 재수 없게 외진 천남성으로 유배되다시피 한 데는 남궁혜의 역할이 컸다.
그녀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던 것이다.
염양군은 백 세 고령의 나이였고, 이화후가 그의 뒤를 이어 가문의 실세가 된 후로는 정도에서 크게 어긋난 일만 아니면 별로 관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남궁혜의 말을 들은 천제현이 대꾸했다.
“늙어서 노망이 났나 보죠? 남궁혜 아가씨는 신급 정령을 갖고 있는데 중용하진 못 할 망정 배척을 하다니. 정말 말도 안 돼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심빙우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어쨌든 이화후는 친아들이고 남궁혜는 방계 출신이잖아. 염양군도 성인은 아닐 테니 자기 아들이 더 중요하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겠지?”
연거푸 술 몇 잔을 들이켠 남궁혜는 취기가 돌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녀가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십 년이 지났어! 이제 열염후 계파는 몇 명 남아 있지도 않다고! 내홍으로 인한 결과는 세력의 급전직하였고! 그 빌어먹을 상관 가문은 각종 음모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데!”
동방 가문은 위기를 떨치고 일어나 무너지는 국토를 어깨에 짊어졌고 그 결과 대하국 국토의 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궁 가문의 수많은 장수들은 전장을 누비면서 그들의 피로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그렇다면 상관 가문은 어떤 공을 세웠길래 이들과 함께 삼대 가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사실 상관 가문은 대하국 시기, 손에 꼽히는 대재벌 가문이었다. 이들은 많은 외국의 가문들과 교류를 해서 나라가 위험할 때마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이끌었다. 지금도 상관 가문 사람들은 남하국에서 외교관이나 내정관 등으로 활약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지난날 대하국이 멸망할 때, 대융국이 대하국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던 것도 상관 가문의 공이 컸다.
상관 가문은 대외적으로는 이간질을 통해 대융국의 각 부족 간 분쟁을 야기했고, 결국 그들의 힘을 내부적으로 소모시켰다. 대내적으로 남하국의 각 대소 가문들을 규합하여 대융국에 대항했다. 이렇게 합종연횡으로 정국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견융초원의 오랜 분열과 내분은 절반 이상이 상관 가문의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상관 가문은 상업 분야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휘둘렀다. 주변 국가들이나 이족들과 연맹을 맺었기 때문에 중요할 때마다 남하국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삼대 가문이 오늘날의 지위를 얻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