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317화 (313/729)

# 317

제317장 학자의 정체

문성군 저택.

상관 가문 장로 한 명이 다급한 걸음으로 상관장봉 앞에 나타났다.

“군상, 무안군이 청주로 밀서를 보냈습니다!”

삼군은 사실상 치열한 경쟁 관계, 무안군은 전장에서는 날아다닐지 몰라도 권모술수 쪽으로는 영 젬병인 자였다.

무안군 저택을 출발한 편지란 편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문성군의 손을 거치게 되어 있었는데도 무안군은 꿈에도 이 사실을 몰랐다.

“여기 있습니다.”

봉투를 뜯은 문성군이 서신을 훑어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음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자에게 천제현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상관 가문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어달라는.

“무안군은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군!”

문성군은 사실 천제현을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다만 벌써 몇 차례나 상관 가문에 모욕을 줬다는 사실이 거슬릴 뿐이었다. 상관명을 폐인으로 만들어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게 시작이었다.

물론 상관명이 먼저 왕령을 어겼던 탓에 가문에서도 찍소리 못하고 가만히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정도가 더 괘씸했다. 사방후의 아들 상관비진을 반병신으로 만든 거로도 모자라 뇌주 백성들이 단체로 사방후를 내모는 사태를 조장한 것이다.

평민이 제후를 내쫓다니.

남하국 건국 이래 전례가 없는 경우였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사방후는 남하팔후 중 한 사람이기 이전에 상관 가문의 중요한 일원이었다. 사방후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판에 상관 가문이라고 타격이 없었겠는가?

문성군의 눈에 천제현은 개미새끼에 지나지 않았다. 삼군의 지위로 개미 한 마리 짓눌러 죽이는 것쯤이야 간단하겠지만 그까짓 놈 때문에 직접 움직이는 건 다소 모양 빠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던 참에 마침 기회가 왔으니 적극 활용함이 당연지사.

“이대로 가로챌까요?”

“가로채긴 왜? 무안군과 굳이 얼굴 붉힐 필요 뭐 있겠나. 내용만 살짝 손봐서 원래 갔어야 할 곳으로 보내게.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할 걸세, 무슨 말인지 알지?”

당연히 알다마다.

문성군의 지시대로 수정된 편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머지않아 청주에 있는 대학자의 손까지 무사히 전달되리라.

***

청주성.

청목후는 서쪽 지역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청룡경이 뚫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서둘러 본성으로 돌아갔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확인해 보니 이는 모두 사실이었다.

청목후도 실패를 거듭한 청룡경 문제를 아들 목헌이 해결한 것이다. 목헌도 이번에 거둔 쾌거로 청주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될 것이니 청목후에게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후 며칠 간 청주성에는 대대적인 군사 소집이 이루어졌고, 무려 10만 대군이 청룡경의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밀고 들어가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뿌리를 뽑아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 교통의 요지를 완전히 뚫는 데 성공했다.

청주는 유사한 사건이 재발하지 하지 않도록 산을 깎아 청룡경 곳곳에 초소를 구축하였고, 정예군 3만 명을 청룡경 군영에 주둔시켜 청룡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청령의 자원 생산이 빠르게 재개되고 모든 자원 생산장도 다시 가동되자 천제현에게 지분이나 자원을 매각한 상인들은 모두 울상을 지었다.

천제현이 청령에 금화 6억 5천만 냥을 투자한 상황에서 지금 당장 그가 소유한 자원 산지와 각종 지분을 전부 매각해도 최소 2배 이상의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청룡경이 안정화 될 테니 그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정상적인 시기라면 이 가격으로는 절대로 이 자원 생산장들을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천제현은 거의 절반 가격으로 자원 생산장을 매입했고, 기적상회에 안정적인 공급 루트를 확보했다. 이건 대단히 성공적인 거래였다.

목헌이 청목후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버님께 보고 드립니다! 청룡경 사갈수를 완전히 소탕하였습니다. 현재 산을 깎아 군영을 설치하는 등 청룡경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여 재발 방지에 힘쓰고 있습니다.”

“아주 잘했다!”

청목후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지난 수개월 동안 짓누르던 마음의 짐을 벗어 던져 무척 홀가분했다.

“지난 몇 달간 청주를 괴롭힌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내가 직접 추 선생을 만나 감사를 드려야 겠어. 여봐라!”

“아버님, 추 선생도 이번에 큰 공을 세웠으나…….”

목헌이 잠시 뜸을 들였다.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는…….”

“목헌!”

청목후가 한껏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듣거라. 여장가라는 자는 이곳에 온 적이 없는 것이다! 넌 이 청주성의 세자야! 내 말 뜻 알겠느냐?”

목헌이 순간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타지 상인이 공을 세워 뭣에 쓰겠느냐?”

“흥! 게다가 이미 대가도 받아가지 않았느냐?”

“금화 5억 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디 5억 냥뿐인 줄 아느냐?”

청목후가 노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청령 자원지역의 지분 절반을 그놈이 사 버렸다. 이것으로 우리는 20억 이상의 손해를 봤어! 우리가 어려움에 빠지자 그 틈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다만 대부분 자원 생산장의 지분만 가질 뿐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냥 눈감아준 것이다!”

‘그랬구나! 역시 간사한 놈이었어! 그놈은 이미 실리를 취하고선 위기를 이용해 더 많은 돈을 가져가려고 했던 거군. 이건 청주가 밑지는 장사였잖아.’

청목후가 이 일을 규명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천제현도 청목후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청주에서 이 인물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다가, 사람들 대부분은 목헌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명성은 추 선생이나 베일에 싸인 여장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목헌에게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었다.

그는 청목후의 세자로서 머지않아 청목후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이런 때에 이 같은 위업을 달성했으니 사람들이 목헌을 존경하고 숭배하게 될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그가 청주를 다스리는 데도 힘을 실어줄 것이다.

목헌이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추 선생은 보통 사람이 아니던데, 남하국에서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죠? 설마 외국 학자인가요?”

“목헌아, 사실 너도 잘 아는 사람이란다. 다만 그가 추 선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뿐이지.”

“무슨 말씀입니까?”

“추 선생은 자신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 가명을 쓰고 있는 것뿐이다.”

청목후의 목소리가 순간 바뀌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하지만 추 선생을 쭉 지켜본 바로는 남하국 최고의 학자, 동방 가문의 최고 상경인 고천추가 틀림없다!”

목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추 선생의 진짜 신분이 대학자인 고천추라고?’

고천추는 젊은 시절 20여 년간 여러 나라를 두루 유람하며 수많은 대사를 만나 배움을 청했다. 이후 남하국으로 돌아온 그는 현재까지 남하국 최고의 현자로 추앙 받고 있으며, 그 밑으로도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남하국 학자들에게 고천추는 우상이었다.

목헌은 이 겸손하고 진중한 노학자가 남하국 최고의 학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야 설명이 된다.

남하국의 최고의 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자가 바로 대학자 고천추와 중주 운문의 운천학이다. 갑자기 청주에 나타난 이 추 선생이라는 자가 운천학에 버금가는, 심지어 그를 뛰어넘는 학문의 깊이를 보여줬을 때, 모두의 머릿속에는 ‘고천추’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단지,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대학자가 조용히 청주에 왔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신분을 공개했다면 이 일대가 들썩거려 고천추는 연구에 몰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갈독 해독은 고천추에게도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사갈독을 완전히 제거하면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나, 만약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약간이라도 지체된다면, 청주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

대학자 같은 사람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남하국에서 과연 누가 풀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사태를 진압하지 못했다면, 청주 사람들은 왕국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 것이고, 이는 대규모 이주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청주와 왕국으로선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사건은 해결되었으니 고천추도 더는 신분을 숨길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청주에 온 거물급 인물에게 청목후 부자가 방문하여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학자는 아직 연구실에 있는 것이냐?”

“네. 그날 밤 이후로 사흘 밤낮을 꼬박 출입하지 않으셨어요.”

그날 밤 고천추는 사갈수 토벌전을 벌인 후 그 뒤에 이루어진 마무리 전투 때에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사방천뢰진의 설계도 연구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이 진법에 담긴 지혜가 실로 무궁무진한 것이다!’

고천추는 보물을 발견한 모험가처럼 흥분과 열광에 사로잡혔고, 이후 사흘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은 채 두꺼운 책 세 권을 빼곡하게 채워나갔다.

“청목후 목영, 추 선생을 뵙습니다!”

고천추는 청목후의 등장으로 흐름이 끊기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즉시 서적을 덮고 연구소에서 나왔다.

“청목후께서 직접 왕림하시다니, 이 늙은이가 누군지 아셨나 봅니다.”

청목후도 더는 시미치 떼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대학자께서 먼 길을 오셔서 청주에 큰 힘이 되어 주셨는데, 제때에 알아보지 못해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오늘 이렇게 찾아뵙니다. 목헌, 어서 선물을 가져오거라.”

“이것들을 모두 거두십시오!”

고천추가 쳐다보지도 않고 탄식하듯 말했다.

“이번에 청주 문제를 해결한 것은 제 공이 아닙니다!”

고천추는 수일 간 설계도 연구에 골몰했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설계도는 매우 세세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한 부분만 떼어 연구하더라도 며칠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 소년은 대체 누구지?’

목영은 대학자가 선물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권하지 않았다.

“청령이 뚫려 청주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이에 성대한 연회를 열 계획인데, 대학자께서도 제 체면을 봐서 참석해주셨으면 합니다.”

고천추가 대답하려던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위를 보니 거대한 비행 마수 백여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옅은 노란색을 띤 날개가 태양을 방불케 했다. 황갈색 털로 뒤덮인 사자의 몸에 머리부터 앞다리까지 독수리 형체를 한 이 마수는 황금색 날개를 퍼덕였다.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은 본래 이종족이 세력을 틀고 있는 곳에서 존재하는 마수였다.

그리핀은 그 거대한 몸집에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등 위에는 창을 든 기사가 타고 있었다.

“그리핀 기사단? 왕궁기사단이 아닌가?”

“왕성에서 왔다고?”

남하국처럼 작은 나라에서 날아다니는 마수는 대단히 드물었다. 그리핀은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하였다.

그리핀 기사는 전투력이 막강하였으나 그 수가 부족하여 대대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하고 그저 감찰, 송신, 왕궁 수위 등에서만 동원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