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
제315장 무안군과 만난 신풍후
무안군이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이제 목숨을 보전하느냐 마느냐는 천제현 자신에게 달렸다.
사실상 왕이든 무안군이든, 이들만이 아니라 염양군이나 문성군도 마찬가지로 천제현에게 크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는 않았다.
인재가 넘쳐나는 삼대 가문의 눈에 저 아래 변두리에서 툭 튀어나온 천재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해 보이겠는가.
그렇다면 뇌주에서 세운 공에 대해서는?
수년 이래 남하국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마수가 날뛰는가 하면 전염병이 돌고, 그게 좀 잠잠해졌다 싶으면 지진이 터지는 식이었다.
게다가 뇌주 사태의 경우 워낙 단기간 안에 해결된 탓에 왕성에서는 그간의 재난과 별다를 게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어떻게든 천제현의 면을 세워주려 했던 신풍후와 금전후도 있으나, 두 제후의 두터운 친분과 천제현에 대한 신풍후의 신뢰를 생각하면 거기에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남하국의 진짜 근심거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오직 하나.
북방의 마수령 왕국, 즉 견융 부족이었다.
엄밀히 얘기하면 ‘견융(犬戎)’은 국호가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그곳의 수많은 마수령 유목부족 중 절대다수가 들개족과 늑대족이기에 개 견(犬) 자를 넣어 견융부족이라 칭하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들이 사는 땅은 견융초원이라 불렸다.
견융부족은 마수령의 습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윤리, 도덕, 율법 따위는 없이 초원을 떠돌며 약탈을 일삼는 그들은 태생이 침략자였다.
과거 대하국 전역을 휩쓸었던 무리는 그들 중에서도 최강의 부족 열두 개가 연합한 군대였다.
이 연방제 부족국가의 우두머리는 국호를 ‘대융국(大戎國)’으로 정하고 스스로를 ‘아왕(牙王)’으로 칭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그들의 왕을 ‘견융왕’이라 불렀다.
열두 개 부족을 통틀어 가장 용맹한 전사만이 아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그들의 군대는 위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하국을 남하국으로 강등시키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까지 몰아붙였던 대융국. 그들의 전투력이 여전했다면 남하국은 이미 오래전에 지도에서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취약한 사회 체계의 마수령왕국이 장기간 흥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대로 아왕이 죽을 때마다 견융초원에는 반드시 내란이 발발했다. 새 아왕 자리를 두고 부족 간에 일어난 충돌이었다.
최근 백 년간은 부족들의 세력이 전부 비등비등했던 탓에 아왕의 자리가 줄곧 비어 있었다. 제대로 된 통치자의 부재는 구성원들의 분열을 낳았다. 개별 부족의 실력이 아무리 막강해 봐야 뭉치지 않으니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한 부족이 인간국을 약탈하는 동안 다른 부족은 도움은커녕 뒤에서 칼 꽂을 궁리나 하고 있는 판이니 제대로 되는 일이 있을 리가.
바로 이런 이유로 최근 견융국의 공격은 매번 소규모 노략질에 그칠 뿐 본격적인 전투로 발전하지 못했다. 물론 남하국으로서야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무안군과 국왕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란이 심화될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남하국에 유리해져 갔다. 때가 되면 무안군이 이끄는 군대가 출격해 수백 년 원한을 일거에 갚아줄 것이다.
견융초원.
언젠가는 남하국의 땅이 될 그 이름.
원대한 계획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지방의 말썽은 단칼에 싹을 잘라내는 게 중요했다.
무안군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저택에 돌아왔다.
“보고드립니다!”
무안군이 견융초원의 최신 첩보를 훑어보는 사이 호위병이 다가왔다.
“중주에서 신풍후가 와 있습니다.”
“신풍후?”
무안군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 시점의 방문이라면 천제현 때문일 게 뻔했다.
“그만한 일을 저지르면서 결과도 예상치 못했단 말인가. 나는 해줄 게 없으니 돌아가라고 전해라.”
무안군의 반응은 언뜻 냉담해 보였다.
사실 왕성이야말로 지금 신풍후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왕의 교지가 내려간 이상 번복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풍후가 지금 중주였다면 그나마 사방후를 견제할 수 있었으리라. 거기에 대학자가 힘을 보탰다면 천제현의 명을 잠시나마 보전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풍후가 왕성으로 달려왔으니 이제 누가 사방후를 대적한단 말인가?
“군상을 뵙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풍운천 그 작자가!”
무안군이 들고 있던 서한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눈빛에 한기가 스쳤다.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자들이야말로 무안군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해야 할 일이라면 시키지 않아도 할 것이요,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아무리 빌어봐야 소용이 없을진대.
“알겠다, 신풍후를 들라 하라!”
문턱을 넘어 들어온 신풍후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무안군을 뵙습니다!”
“편히 있으시오.”
무안군이 무표정한 얼굴로 신풍후를 응시했다.
“이 먼 왕성까지 달려오다니, 설마하니 천제현 때문은 아닐 테지.”
“역시 예리하십니다!”
신풍후는 애초에 돌려 말할 생각이 없었다.
“천제현은 비범한 자입니다. 그런 인물을 평범한 기준으로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 천지 구분 못 하고 날뛰는 놈은 흔치가 않지. 중주 땅에 해적을 끌어들이고 제멋대로 유서 깊은 가문 셋을 집어삼키고도 모자라 특사로 간 남궁 가문 장로를 폐인으로 만들기까지. 무엇하나 가벼운 죄목이 있소? 제아무리 학식이 뛰어나다 한들 왕국의 동량이 되기는 글렀소이다. 평범한 기준을 갖다 댔으면 벌써 열 번은 죽고도 남았을 놈이오!”
“잘못 알고 계십니다.”
신풍후가 힘주어 항변했다.
“왕성에는 한쪽의 말만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중주의 난은 애초에 천씨, 낙씨, 양씨 세 집안의 음모가 발단이었습니다. 게다가 줄곧 왕국의 골칫거리였던 사주호 해적을 제도권 내로 편입한 것은 죄가 아니라 공이라 해야 옳지요.”
“멋대로 세 가문의 재산을 가로채고 왕성 특사를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은 건 어찌 해명할 셈이오?”
“그 두 가지는 적절치 못한 처사였지요.”
천제현의 과오를 인정하는가 싶던 신풍후가 금세 말투를 바꿨다.
“하오나 천씨, 낙씨, 양씨 세 가문이 먼저 천제현을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중주성에도 막대한 피해를 끼쳤습니다. 천제현이 그들 가문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나 어마어마한 재물을 풀어 중주의 안정에 기여했음도 알아주십시오. 또한 남궁적은 주변의 충동질에 넘어가 기적상회를 맨입으로 삼키려다 그 꼴이 된 것입니다. 천제현에게도 분명 잘못은 있지만 그보다는 공이 더 크니 처벌은 옳지 않습니다!”
“정말 모르는 것이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무안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돌려 말하지 않겠소. 왕이 천제현을 제거하려는 이유를 모른단 말이오? 앞에서 말한 갖가지보다 더 중요한 건 미천한 출신인 주제에 중주의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게다가 걷잡을 수 없이 오만한 성격까지. 중주는 남하국의 중심이오. 중주에 변고가 생기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생각이나 해봤소?”
‘역시.’
표면적인 이유 외에도 더 깊숙한 뭔가가 있었다.
중주가 어째서 중주라는 이름을 얻었겠는가? 지리적으로 남하국의 중심에 위치해 각 지방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간 신풍후가 모습을 감춘 중주를 네 가문이 사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게 바로 왕성에서 원하는 방향이었던 덕이었다. 중주에는 세력 간의 균형이 필요했다. 중주가 흔들리면 남하국 전체에 상상도 못 할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천제현의 성격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 길들지 않는 야생마 같은 자가 중요한 시기에 말썽이라도 일으키면 후폭풍은 남하국이 감당하기 어려울 수준이리라.
“천제현은 나라에 해를 끼칠 인물이 아닙니다!”
신풍후도 아주 고려해 보지 않은 문제는 아니었다.
“놀라운 재주를 가진 자입니다. 견제보다는 자유롭게 클 수 있도록 해준다면 3년 안에 중주를 팔주 중 최고로 만들어놓을 것입니다!”
“근거 없는 소리.”
“목숨이라도 걸겠습니다. 3년 안에 아까 한 말이 실현되지 않으면 그때는 제 목을 치십시오!”
무안군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신풍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제가 지켜본 천제현은 오만하긴 해도 은혜는 잊는 법이 없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 주신다면 분명 백배로 보답할 것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그 애송이에게 신풍후가 이렇게까지 나올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
신풍후가 말을 이었다.
“무안군께 그를 살릴 마음이 있다면 누가 설득하지 않아도 천제현은 무사하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으시다면 혀가 닳도록 사정한들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안다니 다행이군.”
무안군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굳이 왕성까지 왔다는 건 날 설득할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천제현이 전해드리라는 선물이 있습니다.”
신풍후가 수정함을 내밀었다.
“살펴보시지요.”
‘선물? 겨우 생각해냈다는 게?’
무안군이 내심 냉소했다. 신풍후의 체면을 봐서 만나줬을 뿐 본래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던 일이었다.
무안군은 원칙주의자였다. 권모술수라면 학을 떼는 건 물론 아첨과 선물로 윗사람을 움직이려는 자들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쓸 만한 인재라는 생각에 왕성까지 압송되고도 숨이 붙어 있거든 슬쩍 도움을 줄 의향도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신풍후를 포섭해 선물을 전해?’
일말의 기대감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제후 작위에 제 목숨까지 걸지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신풍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만, 중요한 물건이니 다른 사람은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대가 신풍후만 아니었어도 당장 쫓아내고도 남았으리라.
신풍후가 어떤 인물인지는 무안군도 잘 알았다. 팔후 중에서 세속의 공명에 가장 욕심이 없는 자를 꼽으라면 그게 바로 신풍후였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한낱 애송이에게 무릎을 꿇었을 리가 없었다. 신풍후가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어디 구경이나 해볼까!’
욕심 없기로 유명한 신풍후가 자기 작위와 목숨까지 걸어가며 천제현을 도우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안군이 소매를 훠이 내저으며 일어섰다.
“모두 물러가라. 명이 있기 전까지는 이곳에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호위병들이 줄이어 건물 밖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