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
제313장 떠나는 대현자
이튿날의 태양이 뜰 무렵.
전장은 참혹하게 찢긴 사갈수 사체로 이미 발 디딜 곳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이겼다!”
“청주가 이겼다!”
투구를 벗어 던진 병사들이 환호했다.
물러설 수 없는 싸움에서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이다.
장군 한 명이 달려와 목헌에게 전장 상황을 보고했다.
“사갈수 도합 3,256마리를 해치웠습니다!”
목헌이 황급히 물었다.
“아군 피해는?”
잔뜩 상기된 얼굴의 장군이 대답했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쳐 100명가량입니다!”
사갈수 삼천에 아군의 희생은 고작 백 명, 이 얼마나 압도적인 승리인가.
청목후가 친히 나서고도 번번이 참패 끝에 아까운 목숨만 수만이 묻힌 전장이 바로 이곳 청룡경이었다.
그런데 목헌은 주력부대라고 해봐야 겨우 중갑보병 천 명으로 단 하룻밤 만에 지금의 위업을 이뤄냈다.
아군 사상자는 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사갈수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드문드문 남은 몇 마리쯤이야 큰 위협이 되진 못하리라.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청주성은 기쁨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주민 모두가 거리로 뛰어나와 청주를 구한 영웅들을 맞이했다.
“세자 만세!”
“세자 만세!”
말에 탄 목헌이 천천히 성문에 들어서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늠름하고도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목헌의 가슴이 난생처음 맛보는 성취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제 더는 아버지의 그늘에 기대지 않고서도 백성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목헌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청주의 근심거리를 해결해 준 병사들에게는 포상을, 성 전체에는 사흘간 축하연을 베풀겠소!”
병사들 사이에 흥분이 번졌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을 인정받았는데 들뜨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니?”
목헌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 선생은?”
“보고드립니다. 여 선생은 성에 들어오지 않은 듯합니다!”
목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무슨 상식 밖의 행동이란 말인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다니,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을까?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 선생의 능력을 직접 확인한 뒤에는 불만이 경외로 바뀌었다.
거기다 이제는 세속의 공명심을 초월한 모습까지, 그를 한층 더 존경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문득 목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 선생이 남하국 사람이 아니길 다행이지!’
그런 인물이 위에 떡 버티고 있으면 남하국 사내들은 무슨 수로 낯을 들고 다니겠는가!
***
청주 부두.
배에 오른 천제현과 심빙우가 막 선착장을 떠나려 하던 때였다.
“기다려주십시오!”
저만치 추 선생이 헐레벌떡 쫓아오는 게 보였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늘이 내린 재주를 갖고도 어찌 하찮은 상인으로 살고자 하십니까? 이 늙은이가 삼군에게 선생을 천거, 아니지! 왕에게 천거하리다! 그리하면 역사에 길이 남을 원대한 업적을 일궈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군에게 천거? 그것도 모자라 왕에게까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건 삼군이나 왕을 직접 대면할 재간이 있다는 의미였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자기 뜻을 관철시킬 확신 역시도.
그게 어디 아무나 가능한 일이겠는가? 남하팔후조차도 함부로 내뱉지 못할 소리였다.
“무엇이 하찮고 또 무엇이 원대하단 말이오?”
돛대에 기대어 선 천제현이 선착장에 있는 추 선생을 향해 말했다.
“장사도 궁극의 경지에 오르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지. 어디 한번 지켜보시오!”
“이렇게 가시다니요! 다시 생각해 줄 수는 없겠습니까?”
분명 저자는 남하국에 잡아두면 분명 큰 도움이 될 인물이다.
그러나 천제현은 추 선생의 말을 듣고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유롭게 살던 몸이라 어디 한 군데 묶여 있을 성미는 못 된다오.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소. 그럼 안녕히!”
“잠깐!”
추 선생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남하국에 잡아두지 못할 바에야 가진 지식이라도 좀 더 짜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기회는 바란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천하를 돌며 배움을 구한 끝에 부끄럽지 않은 학문의 경지를 이루었다 생각했으나, 여 선생을 만나고 나서 그간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선생만 괜찮다면 옆에서 조수 일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추 선생이 보여준 학문의 깊이는 운천학에 못지않았다. 그가 운문에 합류한다면 연구 진척에야 득이 되겠지만, 문제는 신원이 불분명한 인물을 곁에 두기가 찜찜하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같은 남하국 하늘 아래 있는 이상에야 언젠가는 다시 만나지 않겠는가?
우선은 거절하는 편이 현명하리라.
천제현이 고개를 저었다.
“연세도 지긋하면서 왜 남의 밑으로 들어오려 하는 거요?”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추 선생은 거의 천제현 앞에 꿇어앉기 직전이었다.
“제자로만 받아주셔도 좋습니다!”
“하하, 난 제자를 들이지 않소. 이러지 말고 돌아가시오!”
추 선생을 외면한 천제현이 심빙우를 보며 말했다.
“출발하죠!”
“잠깐! 가지 마세요!”
“언젠가 다시 볼 기회가 있을 것이오!”
덩그러니 부둣가 바닷바람 속에 남은 추 선생은 애처롭기까지 한 몰골이었다.
‘하늘이시여! 왜 하필 제게 저 요망한 자를 보내셨습니까? 만나고도 이리 허망하게 떠나보내게 함은 또 무슨 이유에서란 말입니까!’
고천추는 문득 깨달았다.
무지 역시 일종의 행복임을. 지식이란 알면 알수록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 그 끝은 결국 고통이었다.
여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대국 학자들과 비견할 수십 년 학문의 자긍심에 도취된 채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덧없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세월이 언제 무정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남은 생은 이대로 회한 속에서 스러지리라!
팔짱을 끼고 갑판에 서 있던 천제현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누님, 추 선생이 누군지 아시겠어요?”
“추측은 하고 있지만.”
심빙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딱 잘라서는 말 못 하겠군.”
짚이는 구석이 있은 지는 꽤 오래였다. 다만 그 고매하고 자긍심 높은 인물과 눈앞의 추 선생이 워낙 딴판이었기에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
“뭐, 어차피 언젠가는 또 만날 테니까요.”
추 선생과의 재회 자체는 예견했을지 몰라도 그 시기가 예상보다 크게 앞당겨지리라는 건 천제현 역시 알지 못했다.
중주성에 도착한 천제현은 곧장 초음파 수정석을 정련해 연구에 돌입했다.
초음파 수정석은 신호를 고주파 방사선으로 바꿔 먼 곳까지 안정적으로 전달해주는 광물이었다. 초음파 수정석에도 등급이 존재하는데 1급의 최장 신호 전달 거리는 천 리, 2급의 최장거리는 만 리였다.
남하국처럼 좁은 땅덩이에는 2급 초음파수정석만 있어도 충분했다.
중주성에서 왕성 사이에 필요한 전파탑의 수는 대략 예닐곱 개. 중간 중간 위치한 도시 안에 탑을 건설한다면 천재지변이나 마수의 공격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파탑은 일종의 고성능 신호 증폭기였다.
중주성에 초음파 자음탑을 하나 건설한다고 치면 반경 만 리 안에 있는 일반 자음탑 모두가 그 신호를 수신할 수 있다. 이렇게 전달된 신호는 해당 자음탑이 담당하는 범위 전역에 뿌려진다.
다시 말해 중주 본성에 초음파 자음탑 하나가 세워지는 것만으로도 중주군 거의 전체가 신호 전달권에 들어온다.
음성신호만이 아니라 앞으로는 화상신호, 더 나아가 음성과 화상의 결합으로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으리라.
천제현이 중주성으로 돌아갔을 때 즈음, 신풍후도 아득히 먼 왕성에 도착해 있었다.
왕국의 심장인 왕성은 북방 마수령국에서 고작 삼천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중간지대는 변변한 장애물 하나 없는 평야.
마수령 정예 기병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틀 만에 돌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언뜻 보면 바람 앞에 놓인 등불이나 다름없는 상황.
왕성이 지금처럼 위험천만한 위치에 건설된 이유는 남하국의 지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남하국의 역사는 ‘북하시대’와 ‘남하 시대’로 구분된다. 국력 융성의 정점을 찍었던 북하 시기, 왕국 인구는 십억, 국토면적은 무려 현재의 세 배로 이때는 ‘대하국’이라는 국호로 불렸다.
국호에는 엄연한 기준이 존재한다. 인간 국가의 등급은 크게 제국과 왕국으로 나뉜다. 총인구 백억 이상에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은 ‘황제’라는 호칭을 쓸 수 있으나 왕국은 규모, 인구, 영토 등 모든 방면에서 제국에 미치지 못하며 통치자의 호칭도 ‘왕’에 그친다.
왕국은 다시 국력에 따라 전국, 대국, 소국으로 세분된다.
대하국이라는 글자 자체에는 거대한 왕국이라는 의미가 있다.
천제현이 만났던 귀면노자는 대주국 출신으로, 대주국 역시 대국에 속한다. 대주국의 국력은 현재 남하국의 무려 열 배. 국제 무역환경에 발맞춰 나가고자 대륙에서 통용되는 마석을 화폐로 사용하고 있는 국가다.
칠, 팔백 년 전의 대하국이라는 국호는 당시 왕국이 거의 대국에 근접하는 국력을 보유했음을 시사한다. 그대로 쭉 발전했다면 지금쯤 명실상부한 대국 반열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창 성장하던 대하국에 북방 마수령왕국 군대가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을까.
예상치 못한 날벼락에 대하국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왕족이 몰살당하고 국토 전역이 마수령의 손아귀에 들어가다시피 했다.
절체절명의 시기, 동방 가문이 남궁, 상관 가문과 함께 항전에 나서 어렵사리 국토 일부를 되찾았다. 전쟁이 끝난 후 왕위에 오른 동방 가문은 국호를 현재의 ‘남하’로 고쳤다.
대하국에서 남하국이 되고, 출중한 영웅형 인물이었던 남하국 제1대 왕은 마수령을 향해 피의 복수를 천명했다.
그가 왕성을 마수령 점령지대가 직접 보이는 북방에 세운 것도 현재에 웅크리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결심의 표현인 동시에 후대의 투지를 북돋우기 위함이었다.
근심하고 경계하는 자 살 것이요, 굴욕에 안주하는 자 죽을 것이라.
언뜻 무모해 보이는 초대 왕의 결정은 오히려 나라가 강성해지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되어줬다.
건국 이래 줄곧 마수령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남하국. 그 과정에서 단련된 생존 본능은 전사들의 기개로 발현됐다. 삼대 가문이 대대손손 배출한 인재들은 왕성과 왕국을 위해 전장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절대 우위를 점한 마수령도 이들의 저항에 막혀 번번이 침략에 실패했다.
지난 수백 년간 남하국이 순조롭게 발전한 것도 알고 보면 북방에서 마수령과 대치중인 수도의 존재 덕분이었다. 왕성이 최전선을 지키는 동안 남쪽 지방들은 마음 놓고 번영을 이룩해낼 수 있었고, 이는 곧 국력 전반의 상승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