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제288장 천제현 대 천성하
스물 네다섯이나 되었을까, 머리에 쓴 백옥관 아래로 강인해 보이는 이목구비 중에서도 눈빛이 특히 날카로웠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청년의 푸른 옷자락이 펄럭였다. 마치 검을 관장하는 신이 속세에 내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천성하!”
“천성하!”
“천성하!”
사방팔방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다. 비록 시련탑에서는 좌절을 맛봐야 했지만, 중주성에서 천성하의 인기란 감히 천제현조차도 넘보지 못할 수준이었다.
천성하가 명성을 얻은 지는 이미 여러 해.
천제현이 샛별로 떠오른 건 기껏해야 한두 달 남짓 된 일이었다.
중주성 주민들의 무한한 응원과 존경을 받고 있는 천제현도 가진 기반과 명망에서만큼은 천성하에게 미치지 못했다.
정정당당하게 붙어서는 누구에게도 져본 적 없고 자기보다 단계 높은 고수마저 쉽게 상대하는 남자, 천성하는 진정 하늘이 내린 기재였다.
마력도 한 수 아래인 천제현이 과연 이번에도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소년이 한 걸음 한 걸음 경기장으로 걸어들어왔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티 한 점 없는 백의를 차려입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두 눈동자가 특히 또렷하게 빛났다. 풍기는 분위기에서만큼은 결코 천성하에게 밀리지 않았다.
천성하를 황금색 검에 비유한다면 천제현은 형체가 정해져 있지 않은 흰 구름에 가까웠다.
천제현의 등에는 보검 한 자루와 커다란 조롱박이 둘러 메여 있었다. 그의 어깨에 올라앉아 꾸벅꾸벅 조는 흰 새끼 여우는 곧 일어날 일에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해 보였다.
“천제현!”
“천제현!”
“천제현!”
경기장이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찼다.
천제현을 응원하는 건 대부분 젊은이였다. 천제현의 전설적인 성공담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두웅!
그 어느 때보다도 육중한 종소리가 울려 펴졌다.
결투가 시작됐다.
슥!
천제현이 천천히 유명검을 뽑아 들며 여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천검공자라 역시 다르긴 다르군. 상처가 가볍지는 않았을 텐데 이토록 빨리 회복하다니! 겨우 몇 주 만에 위풍당당하신 면상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놀랍군!”
천성하의 날 선 눈빛은 심연의 끝처럼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챙! 챙!
그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 순간, 검이 울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금빛 보검이 부채 모양으로 천성하의 등 뒤에서 장벽을 이루며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초식이 화려한 건 여전하군!”
그러나 천제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하나, 속 빈 강정인데!”
천성하는 천제현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성하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땅에 꽂힌 금빛 장검이 나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성하가 검을 쥐자마자 검 끝에서 맹렬한 기운이 용솟음쳐 올랐고, 그 위력에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도 그의 녹청색 장포 자락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이윽고 천성하 뒤에 있던 보검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치더니 폭발했다.
떠들썩한 경기장이 일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뭐지?’
‘왜 검을 폭발시킨 거지?’
사람들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마치 정지화면처럼 이어졌다. 다들 감히 침도 넘기지 못한 채 눈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연기가 가시고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보검 수십 개가 눈 깜짝할 새에 수십 배로 늘어난 것이다.
하늘을 빽빽하게 메운 검들이 금빛 바다를 이루며 거칠고도 냉혹한 검기를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검날이 아래를 향하더니 속속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만검천강(萬劍天降)!”
더할 나위 없이 냉혹한 목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수많은 보검이 단번에 찬란한 금빛을 발하며 활강했다. 폭우가 쏟아지듯 엄청난 속도로 천제현을 향해 달려드니, 강렬한 기세와 귓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굉음에 사람들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와 힘을 자랑하는 이 공격만 보고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천성하가 더 강해졌다는 것을!
그는 이미 혼성 5성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천성하가 혼성 1성의 마력을 가졌을 때 이미 혼성 3성의 고수를 쓰러뜨린 바 있었고, 혼성 4성이었을 때는 혼성 5성의 술사를 손쉽게 이긴 것은 물론, 혼성 6성 강자와도 겨룰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혼성 5성의 실력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천성하의 검결이 예전보다 더욱 매서워진 것으로 보아 무공에도 변화가 있는 게 분명했다.
현재 천성하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현혼급 강자로 우뚝 섰다.
어쩌면 세 가문의 가주들조차 이제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삼대 공자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천성하 눈에 그들은 지나가는 바퀴벌레 정도에 불과했다.
이때, 천제현의 심등이 켜졌고 신식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천성하는 신식의 힘을 느끼고는 입가에 냉소를 그렸다.
‘정말 어리석군! 아무 소용이 없을 텐데!’
물 샐 틈 없이 촘촘하게 짠 검진이니 사각지대가 있을 리 없었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절대 피할 수 없지. 네놈은 지금 여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천제현이 모를 리 있겠는가. 천성하가 시전한 검진은 이미 완전무결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말이다.
한 점의 빈틈도 없이 날아드는 이 완벽한 공격은 신식으로도 도저히 돌파구를 찾아낼 수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피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칠흑같이 새까만 고대검이 가공할 힘을 내뿜기 시작했고, 뒤이어 천제현의 기운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검은빛을 띤 고대검 정령이 황량한 기운을 내뿜자 신마검이 천지를 갈랐다.
신마의 기운과 숨결이 삽시간에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메웠고, 정령은 사납고 폭발적인 힘을 방출했다.
쨍그랑!
무수한 검날이 천제현에게 닿기도 전에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검의 파편들이 천제현을 둘러싸고 비 내리듯 떨어져 내렸다.
깨지지 않은 검 한두 개가 떨어지긴 했으나 그것 역시 성광에 닿자마자 깨져 버렸다.
삼대 가문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현혼! 저건 현혼급 실력이 틀림없다!’
‘천제현이 이토록 강했나?’
그럴 리가.
현재 상황으로 보아 천제현은 혼성 4성에 이른 현혼급 술사가 틀림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현혼 강자라 해도 정령의 힘이 이토록 엄청나다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정령을 통해 방출된 강력한 검기가 천성하의 완전무결한 검진을 압도적인 힘으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검의 파편이 마치 별동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천제현이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오롯하게 서 있다.
천성하는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휘몰아치는 폭우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이제는 공격과 수비를 구분 짓는 게 무의미해졌다.
강철조차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공격. 이것이 공격이든 방어든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미 이 두 사람은 모든 힘을 끌어 모아 전력을 다해 싸우는 중이었다.
‘근데 참으로 이상하군!’
천씨 가문의 사람들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천제현이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걸까?’
삼대 가문은 기적상회가 재료를 구하지 못하도록 공급 경로를 전부 봉쇄한 상황이라 천제현이 성단을 제조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정령의 힘만으로 이 가공할 힘을 막아내다니!’
‘천제현의 정령은 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칠흑처럼 새까만 검의 정령은 신급 정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위용을 자랑했다. 그러니 검술가 집안으로 이름 높은 천씨 가문으로서는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이 검진은 기세만 보면 압도적이지만, 너무 분산된 게 흠이지. 결국 그것 때문에 위력이 반감된 거고.”
천제현은 부러지고 깨진 검의 파편들에 둘러싸였다.
“날 죽이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원하는 대로 해주지!”
천성하의 목소리는 한없이 무덤덤했다. 놀랍지도,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혼성 4성에 도달한 게 뭐가 대단하다고?’
두 사람의 마력이 엇비슷하다면 고전을 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지금의 천제현은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이 아닌가.
따라서 천성하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고배를 마실 리 없다고 자신했다.
“으아아!”
천성하의 몸에서 금빛 교룡이 튀어나왔다. 온천지에 널브러진 검의 조각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공중에 떠올라 한 데 뭉치기 시작했다.
무한한 정령의 힘이 검의 조각들에 주입되자 용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가 터지더니 2장이나 되는 거대한 교룡으로 변했다.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인 금룡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제 상황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금룡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광만 해도 눈이 부시다 못해 멀 지경이었다.
“삼백육십 유룡검진(遊龍劍陣)!”
금룡 360마리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천제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는 단단히 쥔 유명검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는 있는 힘껏 막았다.
그러자 주변의 땅이 하나 둘씩 쩍쩍 갈라지더니 푸른색 화염이 폭발하듯 날아올랐다.
공중으로 분출되는 푸른 불꽃이 화염구 수백 개로 분열되었고, 그 화염구들은 저마다 꿈틀대면서 어떤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돋아 있고, 전신이 화염으로 이글대는, 영락없이 악마의 형상이었다.
푸른 불꽃의 악마와 금빛 교룡의 만남.
이 악마들은 유명의 분신으로 하나씩 놓고 보면 힘 자체는 대단하지 않지만, 탁월한 자폭 능력을 지녔다.
푸른 불꽃의 악마와 금룡 수백 개가 끊임없이 공격하고 부딪히고 깨지는 바람에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과 금룡 조각이 장내를 수놓았다.
천성하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놈은 대체 뭔 능력이 이리도 많은가?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단박에 처치해야겠군!’
드디어 천성하가 직접 나섰다.
흉흉한 살기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더니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손가락이 마치 검처럼 거대한 검기를 폭발시켰다.
“참천식!”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가운데, 유명화와 정령의 힘이 검과 융화되었다.
천제현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유명검을 잡고 성큼 앞으로 나와 천지를 뒤엎을 듯한 기세로 일격을 가했다.
이것은 유명염화검법의 제3식으로 속도와 방어를 포기한 공격이지만, 파괴력과 폭발력만큼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귀참(幽冥鬼斬)이었다.
암청색 검기와 눈부신 금빛 검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더니 종으로 횡으로 정신없이 부딪혔고, 그 여파로 경기장의 바닥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