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제287장 삼대 가문의 음모
한때의 경쟁 상대들을 바라보며 천시가 탄식을 뱉었다.
“우리 세 사람이 손을 잡을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군.”
양의가 잔뜩 쉰 소리로 말했다.
“인생사 무상함이야 어제오늘 일이던가. 서로 뭉쳐서 득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뭉칠 수 있는 게지.”
수준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노화를 늦출 수 있다지만, 세 장로는 사실상 여든이 넘은 고령이었다.
반평생을 치열한 암투 속에서 살았으니 교활하고 의뭉스럽기로는 여우 저리 가라 할 이들이었다.
“옳은 말이네. 운씨 가문과 기적상회를 나눠 가지면 우리 세 가문도 다시금 도약할 수 있을 걸세!”
천시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준비는 됐나?”
낙만상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낙씨 가문 정예 오백에 감찰부 이름으로 관아 병사 삼천을 차출해 기적상회 본사 근처에 대기시켜둘 걸세. 결투장에서 기별이 오면 곧장 기적상회를 덮쳐 쑥대밭으로 만들 걸세.”
“중주성 외곽 군영 근처에는 늑대기병을 매복시켜뒀네. 염무기의 지원군은 우리 양씨 가문이 책임지고 막을 테니 안심하게.”
툭툭, 양의가 쇠지팡이를 무심하게 바닥에 대고 두드렸다.
“그리고 혈랑 용병 오백이 운씨 가문 근처에 숨어 있다가 작전 시작과 함께 기습을 감행할 걸세. 운천학은 내 손으로 끝장내겠어!”
“좋아!”
천시가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결투장에 천씨 가문 검객 팔백을 대기시키겠네. 변수가 생기더라도 일단 천제현만 처치하면 큰 문제는 없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겠네!”
“성주 쪽은?”
“안심하게. 우릴 슬쩍 도우면 도왔지 방해할 자는 아니니까. 눈엣가시 같은 천제현을 없애주겠다는데 되려 반가운 일이지.”
서로 눈짓을 나누는 것을 끝으로 세 태상장로는 합의를 마쳤다.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반격의 때가 왔노라!’
몇 주간의 인내 끝에 온 기회, 숨죽이고 기다렸던 만큼 더 맹렬하게 적을 덮쳐야 한다.
애초에 탄생하지 말았어야 할 기적상회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운씨 가문까지, 중주에서 놈들의 흔적을 완전히 말살해 버리리라.
내일.
내일이면 모든 것이 결판난다.
세 명의 태상장로를 비롯해 세 집안의 병력이 총동원될 싸움이 벌어진다. 중주에 불 피바람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전장의 흙먼지가 가라앉은 그 자리에는 새로운 질서가 우뚝 설 것이다. 이기는 자가 전부를 차지하리라!
**
다시금 들끓어 오르는 중주성.
천제현과 천성하가 맞붙는다는 소식이 마치 거대한 폭풍처럼 중주성 전체를 휩쓸었다.
한편 천제현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곧장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고작 혼성 3성 정점으로는 이번 싸움에서 승산이 없었다.
천씨 가문이 노린 이 점은 실상 천제현 본인도 잘 아는 바였다. 무턱대고 가서 개죽음당할 수야 없는 일.
‘그전에 최소 현혼급은 달성해야 한다!’
삼대 가문은 재료 유통 차단으로 천제현의 두 손 두 발을 묶어놨다며 신이 난 상황이었으나 그건 뇌주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기에 가능한 착각이었다.
뇌주에서 얻은 진하고도 순수한 마력, 그 마력을 해방시키는 순간 모든 일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지옥 화염에게 뽑아낸 힘은 천제현을 순식간에 혼성 4성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혼성 초기에서 혼성 중기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어마어마한 질적 도약이 수반됐다.
몇 배나 뛰어오른 마력 외에도 모든 방면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성장했다.
그렇다면 현혼급이 되었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천씨 가문은 이번 싸움에 모든 걸 쏟아부을 것이다. 천성하의 회복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진 것도 그들이 상상도 못 할 약재를 동원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천성하는 이미 혼성 5성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범한 혼성 5성이라면 천제현이 경계할 까닭이 없었다.
상관비진 같은 기재도 여유롭게 상대하던 천제현이 아닌가? 그러나 천성하는 달랐다.
중주 사대공자 중에서도 천성하는 나머지 셋과 급이 다른 실력자였다. 편린이었지만 신검합일의 경지에 발을 들였던 자다.
천제현이 직접 경험한 그의 공격은 실로 대단했다. 혼성 6성의 고수라 해도 천성하와의 정면대결은 힘에 부치리라.
천성하가 정말 혼성 5성이 됐다면 혼성 4성인 천제현이 그를 이길 확률은 기껏해야 3할 일까…….
아예 안 싸우면 안 싸웠지, 결투장에 서려면 적어도 5할의 승산은 보장되어야 하는 법.
천제현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막 나가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결투에 응했다는 건 믿을 구석이 있다는 얘기였다.
첫 번째는 주(主) 정령.
그간 주 정령을 불러내기 꺼려했던 것은 지금의 실력으로는 제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주 정령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가는 위험한 존재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정령을 다룰 능력이 갖춰지거나 아니면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이상 천제현은 괜한 위협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천성하를 꺾기 위해서는 주 정령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두 번째 믿는 구석은 자신의 수완이었다.
천성하가 제아무리 천부적 자질의 소유자라 해도 천제현만의 무기를 넘볼 수는 없었다.
지상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던 지난 생, 이 시대 사람이 천제현을 따라잡기란 경험, 지식, 수단 모든 방면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제현이 조롱박을 기울이자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조각들이 촤르륵 쏟아져 나왔다.
강력한 악마의 힘을 품은 이 조각들은 바로 지옥 화염이 남긴 악마의 심장이었다, 조각을 응시하던 천제현이 눈을 감자 머릿속에서 서서히 형태가 갖추어져 가는 무공이 있었다.
그 심오하고도 강대한 무공의 이름은 마신구변(魔神九變), 천제현이 지난 생에 무엇보다 몰두하던 무공이었다.
여건상 곧바로 수련에 돌입하진 못해도 초식 일부를 추려내 지금 수련 중인 무공에 적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악마의 심장이야말로 천제현이 뇌주에 간 주요 목적이었다.
***
천제현이 폐관수련에 들어간 동안 공화련은 불안한 소식을 속속 보고받고 있었다. 삼대 가문이 기적상회를 상대로 뭔가 엄청난 작전을 준비 중인 게 확실했다.
이번 결투는 천씨, 낙씨, 양씨 세 가문이 다시 일어설 마지막 기회였다.
결투 중에 천제현이 죽어준다면 그들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으리라. 결투장에서의 죽음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남하국 전통이었다. 신풍후든 무안군이든 천씨 가문을 어찌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볼 때 삼대 가문이 오로지 결투에만 전부를 걸었을 리는 없다는 게 공화련의 생각이었다.
‘결투장 밖에 분명 뭔가가 더 있다.’
공화련은 곧장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운요, 가서 운 어르신 곁을 지켜요. 가문 정예들을 소집하고 중요한 자산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요. 전투를 준비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내일이 결투인데…….”
“내일 경기장에는 보러 나오지 말아요.”
운요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괜찮을지?”
“세 가문이 움직인다면 첫 표적은 운씨 가문이 될 거예요.”
공화련의 태도는 단호했다.
“곧 피바람이 불 테니 단단히 대비해요. 반드시 무사해야 해요.”
운요는 공화련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천제현의 도움 덕에 여기까지 올라온 건 사실이지만, 기적상회를 빈틈없이 꾸려나가는 걸 보면 공화련은 확실히 능력 있는 여자였다.
공화련이 말을 이었다.
“채향에게 서신을 보내서 중주성에 오지 말고 무우곡에 그대로 있으라고 해요. 염무기 대장군에게도 군영에 머물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연통을 넣고요. 임목과 방한은 황천용병단 정예들과 함께 본사로 부르세요. 심 선생님이 대책 총책임을 맡을 거예요.”
평소의 공화련에게서 볼 수 없던 심각한 얼굴이었다.
사태의 위급성을 직감한 공서련이 물었다.
“내가 도울 일은 없어?”
“서련아, 오늘 밤부터 지하 안전가옥에 가 있어. 내 지시 없이는 나오지 말고, 알았지?”
“그건…….”
“시키는 대로 해!”
공화련이 이번에는 남궁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궁혜는 벌써 몸이 근질근질한 듯했다.
“서련이를 지켜줘요. 실력 아니까 하는 부탁이에요.”
그냥 대피해 있으라고 하면 남궁혜 성격에 펄펄 뛰지 않겠는가.
공서련을 보호하라는 건 표면상의 지시일 뿐, 진짜 목적은 남궁혜를 얌전히 앉혀두려는 것이었다.
비록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남궁혜도 공화련의 말을 면전에서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어서 공화련은 각 가문에 결투장에 나오지 말고 무조건 몸을 사리라는 말을 전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나마 기본적인 대비책은 갖춰진 셈이었다.
***
다음날.
곧 다가올 피바람을 알지 못한 채, 중주성 주민들의 관심은 오로지 세기의 대결에 쏠려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두 천재의 대결,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는 법!’
중주 경기장이 또 한 번 터져나갈 듯한 인파로 꽉 들어찼다.
지난 낙강룡과 양천랑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적상회의 생중계가 빠졌다는 점이 이상했다.
‘그 흥미진진한 방송을 왜 이번에는 안 하는 걸까?’
무대 아래에서 경기장을 훑어보던 공화련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협력 가문들에 분명 경고했건만, 보란 듯이 나타난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걱정 마시지요. 회장님은 제 형제들이 지킬 겁니다.”
공화련의 귓가에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으로 몸을 꽁꽁 감싸 맨 대방주는 낡아빠진 가면에, 손에는 기다란 지팡이를 든 모습이었다. 웃옷에 달린 모자 밑으로 듬성듬성한 백발이 가슴팍까지 늘어져 있었다. 마르고 구부정한 체격은 인파 사이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네 분의 형제들께서요?”
공화련은 여씨 5형제의 실력이 다소 미심쩍었다. 어쨌든 그중 제일 강한 사람은 대방주일 것이다.
“저한테는 신혈강시도 있고 어지간한 놈들쯤은 상대할 수 있어요. 저는 됐으니까 가서 회장을 보호해 주세요.”
대방주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대 부회장님 곁을 비우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숨을 내쉰 공화련이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가 시선을 무대로 옮겼다. 가능한 한 침착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대결이 곧 시작된다.
두웅, 두웅, 두웅!
경기장에 걸린 종이 울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최정점에 선 제왕의 대결, 운명의 숙적이 벌이는 혈투가 이제 곧 모두의 눈앞에 펼쳐지리라.
돌연 하늘 저 위에서 황금색 검 한 자루가 쐐기처럼 날아와 경기장 바닥에 내리꽂혔다. 뒤이어 공중에서 사뿐히 내려와 검 자루를 밟고 선 청년이 있었으니, 오만하게 팔짱을 낀 그의 눈빛은 매섭도록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