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제286장 천성하의 부활
기적상회의 거점은 이제 중주였다.
“상품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야. 통조림 공장 열 군데가 완공을 앞두고 있고, 마수 고기를 비롯한 식자재를 대량으로 사들여서 성안에 대주점도 다섯 군데 더 열 계획이야.”
상회의 놀라운 성장세에 공화련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중주성을 우리 기적상회의 공업기지로 만들어가는 중이야. 새로 설립된 운문연구소의 활약도 대단해. 유료 채널 편성기술이 이미 완성단계에 접어들었어.”
그밖에 수정통신기와 축음기의 개량 등 공화련의 주도로 새로 시작된 프로젝트도 있었다.
공화련은 금화 천만 냥을 들여 운문에 설계부서를 신설했다.
동소어가 전담하는 설계부서에는 높은 몸값에 초빙한 기계장치 전문가 십여 명이 투입됐다.
설계부서의 틀이 제대로 짜이기도 전인 겨우 며칠 사이 수정통신기와 축음기를 축소하는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뒀다. 공화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아예 수정통신기와 축음기를 하나의 제품으로 합치고자 했다.
이름하여 자음기!
새로운 휴대형 장치가 탄생을 앞두고 있었다.
수정통신기든 축음기든 사실 구조는 간단했다. 외형만 그럴듯하게 만들고 나면 그 안에 들어가는 건 자음석판 하나와 마력전지 하나가 고작, 기술이라고 해봐야 마력진 몇 개를 조합하면 그만이었다.
구조가 간단한 만큼 둘을 합치기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 며칠이면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게 공화련의 예상이었다.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어.”
공화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성단 재료를 아직도 다 못 모았어.”
“어쩌다가요?”
“삼대 가문의 수작이 분명해. 우리보다 인맥이 넓으니까. 현재로서는 어디에서도 재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아무래도 성단을 만드는 건 잠시 보류해야겠어.”
“아주 대놓고 방해공작을 벌이는군요!”
바로 이때, 운요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그 얘기 들었어?”
천제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얘기?”
운요의 낯빛이 어두웠다.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천씨 가문이 미뤄뒀던 도전을 신청했어!”
“뭐? 날짜는?”
“내일 정오!”
공화련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노기가 서렸다.
‘이제 최소한의 양심마저 내던진 건가?’
앞으로는 준비할 시간을 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단 제조를 방해하더니.
이제 천성하의 몸이 회복되고 나니 천제현이 신풍후 없이 갓 중주에 돌아온 기회를 틈타 대결을 강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 가서 전해 줘.”
천제현의 얼굴에 비장함이 스쳤다.
“나, 천제현! 도전을 받아들인다고!”
***
천씨 가문 본부.
팔백에 달하는 가문 소속 검객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도열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검을 세워 든 그들은 하나같이 암홍색 가죽 갑옷에 검은 망토 차림이었다. 거의 얼굴 전체를 가린 새카만 복면 탓에 밖으로 드러난 건 매서운 눈매뿐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서슬 퍼렇게 날이 선 검과도 같은 부대.
그들 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는 바로 천씨 가문의 가주 천산하였다.
팔백 명의 검객을 바라보는 천산하의 눈에 흡족한 기색이 서렸다.
최고의 정예이자 천씨 가문 저력의 근원. 각지에 흩어져 은밀히 가문 사업체를 보호하던 이들이 일주일 만에 한 명도 빠짐없이 소환됐다.
수십 년간 유례없던 일이었다.
천씨 가문의 운명을 가를 작전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이때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등에 멘 보검에서 풍기는 핏빛 기운이 그가 천씨 가문의 태상장로 천시임을 알려줬다.
“다 모였나?”
천산하가 천시를 향해 가볍게 포권했다.
“예, 공화련의 눈을 피하느라 우여곡절이 조금 있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계집이더군요.”
천시에게 공화련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장사에나 미천한 재주가 있을 뿐. 그 계집이 위세를 떨치는 것도, 기적상회가 설치는 것도 모두 천제현이 버티고 있는 덕이야. 놈만 제거하면 기적상회든 공화련이든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가문 최정예 팔백이 모였다. 이제 곧 기적상회의 근간을 뿌리째 뽑아내고야 말리라!
천산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꼭 지금이어야 합니까? 기적상회는 이제 예전의 하찮은 집단이 아닙니다.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데다가 민심까지 틀어쥐었어요!”
“그게 바로 서둘러야 하는 이유일세. 우리가 감당 못 할 상대로 클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텐가? 그나마 지금이라면 기회가 있어. 기적상회를 흡수하면 가문이 다시 부흥할 테지만 실패하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몰락의 길이네. 이건 천씨 가문의 흥망이 걸린 싸움이야!”
천산하가 비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천시의 얼굴이 점점 더 근엄하게 굳어졌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네. 신풍후가 왕성에 가서 천제현을 도울 수 없는 상황, 게다가 뇌주에서 들어온 첩보에 따르면 천제현이 이번에 또 큰 공을 세웠다더군. 그 사실이 알려지면 천제현을 건드리기가 더 어려워져. 소문이 퍼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네.”
“예? 뇌주에서 또 공을 세워요?”
일순 흠칫한 천산하가 곧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무안군의 포상이 있을 텐데 이 시점에서 천제현을 건드렸다가는 무안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겠습니까?”
신풍후라면 몰라도 무안군의 눈 밖에 나는 건 심각한 일이었다.
일개 지방 호족 따위가 어찌 삼군 급의 인물에게 덤빈단 말인가.
천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점은 걱정할 것 없네. 아직 정식으로 상이 내려온 것도 아니고, 한때 동방 가문에서 문객으로 지내며 뚫어둔 인맥이 있다네. 동방 가문 사람 몇 명만 매수하면 혹여나 상황이 난처해지더라도 왕성에 우리 편이 생기는 셈이야. 무엇보다 천제현은 결투장에서 성하의 손에 죽을 목숨이 아닌가? 소식을 들으면 무안군도 자연히 성하의 실력을 알게 되겠지. 무안군은 실력자들을 제대로 대우할 줄 아는 인물이네. 천제현은 이미 죽고 없는 마당에 뭘 어쩌겠나, 대신 성하라도 키우려 할 걸세.”
‘결국 모든 것은 천성하의 손에 달렸단 말인가?’
바로 그때, 가문 사자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가주 어르신, 태상장로 어르신. 천제현이 내일 결투장에 나오겠답니다!”
‘그래! 잘 되어가고 있어!’
천제현의 성격이야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
분명 타고난 기재지만 자만심이 지나친 애송이였다.
상대가 흔쾌히 응해 준 덕에 일이 쉬워졌다. 그간 삼대 가문이 손을 잡고 벌인 방해 공작으로 천제현은 결국 성단 재료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단도 없이 그 짧은 기간 안에 현혼급에 올랐을 리가 없다.
고작 허혼급 실력으로 결투장에 나온다면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천시가 말했다.
“성하에게 알려줘야겠군. 그 김에 상태가 어떤지도 한번 보고.”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서늘한 음성, 후원 쪽이었다.
곧이어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울림과 함께 건물 안에서 엄청난 힘이 쏟아져 나왔다.
수백 개의 검이 지붕을 뚫고 날아올라 공작새의 깃털처럼 공중에 넓게 펼쳐졌다.
번뜩이는 칼날이 서로 뒤엉키는가 싶더니 곧 검으로 짜인 연꽃이 완성됐다. 연꽃 중앙에는 압도적인 강자의 기운을 풍기는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꿈틀거리는 황금색 교룡의 위용에 저택 전체가 진동했다.
‘천성하!’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수련을 끝낸 것인가!’
과거와 같은 위엄은 물론이요, 베일 듯한 예기까지 더해진 모습에 모두가 전율했다.
‘위풍당당하던 천검공자의 귀환인가?’
천산하와 천시 역시 대견하다는 얼굴이었다. 부상만 극복한 것이 아니라 천성하의 수준은 이미 혼성 4성 정점을 지나 혼성 5성에 도달한 뒤였다.
어디 그뿐이랴.
어검화교결까지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 시련탑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진 것이다.
모두가 확신했다.
지금 상태로 전력을 다한다면 아마 천산하에게도 밀리지 않으리라.
놀랍도록 젊은 나이에 벌써 윗세대 진혼급 고수들에 필적하는 실력이라니.
마치 불꽃을 뚫고 다시 태어난다는 전설의 존재처럼. 천성하는 더 강해졌다.
천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무공이 이토록 고강하니 가문의 앞날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구나! 우선 천제현 그놈부터 없애거라. 놈의 시체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거야!”
천성하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천제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다.
겨우 얼마나 지났다고 놈의 실력에 대단한 변화가 있겠는가. 그간 마력이 제자리였다 해도 천제현쯤이야 문제가 안 될 텐데, 하물며 천성하는 이미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중주만이 아니라 8주 전체를 통틀어도 동년배 중에 감히 천성하에게 대적할 이가 몇이나 될까?
천성하는 채 서른도 되지 않았다. 남하팔후조차도 그 나이 때는 천성하에게 한참 못 미치는 실력이었다.
만약 남하팔후 중 한 명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아무런 무리 없이 작위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아예 남하국 삼대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전쟁터에서 공 몇 번 세우는 것만으로도 서른 전에 너끈히 제후에 봉해졌으리라.
남하국 전체를 놓고 보면 중주 천씨 가문의 세력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그러나 이제 천성하라는 걸출한 기재가 있지 않은가.
천씨 가문에서 ‘후’가, 아니 더 나아가 ‘왕’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기적상회는 성하가 혼성 5성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몰라야 하네.”
천시가 덧붙였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라도 그 늙은이들을 만나봐야겠군.”
저택 대문을 나선 천시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얘기한 늙은이들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낙씨와 양씨 가문의 태상장로들이었다.
사흘 전부터 중주성에 머물고 있었지만 물샐 틈 없는 입단속 덕에 각자 집안의 고위층 몇몇을 빼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시가 향한 곳은 그들과의 비밀 회동 장소였다.
양씨 가문의 태상장로는 귀안랑(鬼眼狼) 양의.
양의는 볼품없이 비쩍 마른 체격이었다. 검은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채 항상 기다란 쇠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비록 겉모습은 애꾸눈 절름발이에 불과할지 모르나 사실 용병계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낙씨 가문의 태상장로는 거령사(巨灵狮) 낙만상.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의 영향일까, 낙씨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낙만상 역시 험상궂은 얼굴에 기골이 장대했다.
지금 나이에도 힘이 무지막지한 데다 머리도 아직 완전히 세지 않았다. 두꺼운 팔뚝에는 털이 빽빽했고 손바닥은 그야말로 솥뚜껑 같았다. 거기서 발휘되는 악력은 강철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