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제282장 승전보
“마마!”
무장을 한 장군이 들어와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뇌주 수비군 3영이 집결을 마치고 목숨으로 뇌주성을 지키고자 합니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금전후는 놀라 물었다.
“군대는 해산된 것 아니었나?”
“뇌주군의 기개는 8주 중 으뜸입니다!”
장군이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
“이런 대재앙이 닥쳤는데 당당히 앞에 나서지는 못할망정 해산이라니요! 마마는 평소에 저희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는 목숨을 걸고 뇌주성을 지킬 것이며, 뇌주성과 생사를 함께할 것입니다. 뇌주성이 없는데, 저희끼리 살아남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래!”
금전후는 감개무량하여 외쳤다.
“나 강웅, 이런 군대가 있으니 뇌주에서 지낸 세월이 헛된 것이 아님을 알겠도다! 내 너희와 함께 뇌주성을 지키며 왕성의 지원을 기다리겠노라!”
금전후는 결정을 내렸다.
뇌주성은 버리지 않는다. 심연의 악마가 정말로 뇌주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당당히 그놈과 맞서 싸우리라.
그때 사방후와 풍신후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빛이 어두웠다.
“기병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고 있습니다만, 상관비진과 강산, 천제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소.”
금전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사방후 상관홍이 말했다.
“금전후, 모든 병력을 재난지역으로 파견해 수색하면 찾을 수 있지 않겠소?”
“수색? 무슨 수색을 한단 말인가! 백옥성 부근에는 마병들이 쫙 깔렸소이다. 보병들을 그곳에 파견하는 건 죽으라는 얘기와 같소. 악마가 깨어나 최정예병인 질풍기병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오. 말들이 악마의 기운을 당해내지 못하니까. 수색은 고사하고 100리 안으로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오.”
그 말에 사방후가 분노를 터뜨렸다.
“금전후! 이 무슨 배은망덕한 짓이오! 우리는 뇌주성을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달려왔소! 지금 내 아들의 생사가 불분명한데 어찌 그리 몸을 사릴 수 있는 거요! 불원천리 지원 와준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소?”
“말조심하시오! 후계자의 목숨만 목숨이고 수천 군사들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란 말이오?”
“일반 병사들의 목숨이야 먼지처럼 가벼우니 죽어나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소? 여차하면 남주성에서 배상을 해주면 될 것 아니오!”
“뇌주의 군대들이 지켜야 할 건 수백만 백성들이지, 후계자 한 명이 아니오! 내 아들도 실종됐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라오!”
금전후는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고, 상관홍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있었다.
두 제후의 갈등이 격화되자 신풍후는 한숨을 내쉬며 둘을 달래려 했다.
그때였다.
“마마! 마마! 희소식입니다!”
호위병 하나가 급히 뛰어들어오며 말했다.
“마마! 후계자님들이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온 자들이 전부 몇 명이던가?”
신풍후가 황급히 물었다.
“다른 자들은?”
“신풍후 마마, 염려 놓으시옵소서. 중주의 기재들도 돌아왔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세 제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천제현과 강산은 말을 타고 뇌주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성을 떠난 삼천 기병 중 남은 병력은 오백도 안 되어 보였다. 남은 기병들은 모두 전사했으리라.
그들의 모습을 본 공서련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뛰어나갔다.
“천제현, 천제현! 무사할 줄 알았어!”
천제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했죠? 미안해요!”
“흥! 누가 널 걱정했대?”
공서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널 꺾을 사람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서! 악마 한 마리쯤이야!”
‘인정머리 없는 계집애!’
그러나 그 누구보다 천제현을 잘 이해하는 건 공서련이었다.
이때, 제후 셋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비진아, 어떻게 된 것이냐?”
세자가 만신창이의 몸으로 말에 실려 있는 것을 본 사방후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아버님! 소자의 복수를 해주십시오!”
상관비진은 힘겹게 눈을 떠 부친의 모습을 보았다. 말쑥했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으며, 살가죽은 여기저기 화상으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천제현 저놈이 병영을 이탈하기에 문책하고자 뒤를 쫓았으나 계략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감히 내 아들의 몸에 손을 대? 용서하지 않겠다!”
사방후에게서 나온 살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뒤덮었다. 그는 긴 철필을 꺼내 천제현을 겨뤘다.
그 모습을 본 신풍후는 급히 다가가 사방후의 철필을 잡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방후는 왜 하필 이럴 때 직접 천제현의 목숨을 거두려 한단 말인가?
“풍운천! 감히 날 막아서다니!”
상관홍은 두 눈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내 후계자는 천금보다 귀한 몸이다! 그런 몸이 계략에 당해 중상을 입었으니 저놈을 용서할 수 없어!”
그렇다.
상관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천제현을 죽일 생각이었다.
남하팔후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어깨를 움츠렸다.
“탈영이라고? 어처구니가 없군!”
천제현이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탈영을 했다면 그건 너겠지!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나자 꼬리를 말고 도망가지 않았더냐! 수천 기병조차 버리고! 남하팔후 아니라 다섯 살 어린애라도 네 행적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금전후와 신풍후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어찌 저리 무례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상관홍이 시뻘개진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디서 수작질이냐!”
당시 상황은 궤멸 일보직전이었다. 세 제후는 물론이고 모두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고 죽기를 기다린다고?
탈영의 죄를 묻겠다고 천제현을 쫓았다는 상관비진의 말은 그 자체에 어폐가 있었다.
강산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방후 대인, 제가 보기엔 상관비진이 먼저 잘못을 한 것 같습니다.”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감히 내 아들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죽여 버릴 것이야!”
“일단 진정하시오. 상관비진의 부상은 천제현이 낸 것 같지 않소.”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사방후의 행동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금전후는 천제현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물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어찌 된 일이냐고 하셨습니까? 직접 보십시오!”
천제현이 큰 조롱박을 꺼내 사납게 흔들자 지옥 화염의 유해가 와르르 바닥에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공서련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다 뭐야?”
지옥 화염은 죽었지만 옥석 같은 흑녹색의 유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기에서 풍겨져 나오는 강력한 심연의 기운은 거짓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지옥 화염과 직접 겨룬 적이 있는 세 제후는 한눈에 그것이 놈의 유해임을 알아보았다.
제후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문을 잇지 못했다.
신풍후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화색을 띠며 외쳤다.
“이건 요석이 변해서 된 악마로구나. 네가 놈을 죽였어!”
그 말을 들은 성 사람들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저것이 바로 뇌주에 재앙을 가져온 그놈이란 말인가?’
기대 반 불안감 반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본 천제현은 화통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포했다.
“심연의 악마는 죽었습니다! 이제 뇌주성은 안전합니다!”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세 제후조차도 쓰러뜨리지 못한 악마를 어떻게 죽인 거지?’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라운 소식에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두 귀가 먹었어요?!”
흥분한 공서련이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뭐가 놀랍다는 거야? 하나도 놀라울 것 없잖아!’
천제현은 여태까지 한 번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세 제후가 못한 일일지라도 천제현이 나서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 공서련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도 기쁜걸!’
공서련은 천제현 대신 목청 높여 소리쳤다.
“사악한 악마는 중주성의 천제현이 없앴습니다! 이제 뇌주는 안전합니다! 모두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여기까지 외쳤을 때, 공서련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직접 코앞에서 뇌주성의 폭동을 본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얼마나 많은 집과 사람들이 파괴되고 다쳤는가? 셀 수도 없다.
공서련은 백성들의 고통과 절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 괜찮아. 겁먹을 필요 없다고! 모두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돼!’
그러나 뇌주성 백성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이 얼마나 바라고 바란 기적인가? 그러나 그 기적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자 단번에 믿기가 힘들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인가?’
지옥 화염의 흑녹색 유체를 보며 한동안 말이 없던 금전후는 천제현의 앞으로 걸어가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그대는 뇌주의 은인이오! 뇌주의 수천만 백성들을 대신해 감사 인사를 드리는 바요!”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금전후가 보여준 행동이야말로 그들의 의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만세! 만세!”
“천제현 만세! 뇌주성 만세!”
“중주의 영웅이 우리 뇌주를 구했다!”
“…….”
수많은 백성들은 흐느끼며 천제현의 이름을 외쳤다.
“은인님 덕에 우리 가족이 살았습니다. 절을 받아 주십시오!”
한 거구의 사내가 천제현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모습을 본 다른 백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중주에서 온 천제현 일행을 보며 절을 올리고 있었다.
남궁혜, 운요, 심빙우, 풍채향, 그리고 공서련은 그 감동적인 장면을 보며 목구멍으로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지난날 천성하의 위용이 천하를 뒤덮었을 때,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것은 천성하의 힘이 두려워 그랬던 것뿐이다.
지금처럼 백성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무릎을 꿇었던 게 남하팔주를 통틀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남궁혜와 운요, 풍채향, 심빙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심정을 어떤 단어로 형용할 수 있을까. 희열과 흥분, 그리고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천제현 덕에 영광스럽게도 이 역사적인 사건의 참여자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명예롭게 한평생 살 수 있다면 인생에 무슨 아쉬움이 있겠는가.
남궁혜가 크게 소리쳤다.
“천제현이 뇌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웠는데, 저 사악한 부자(父子)는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 저들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감히 은인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뇌주 백성의 적으로 간주하겠다!”
사람들은 비분강개하여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