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제280장 누명 잘 쓰는 운명
“좋았어! 이번 모험은 수확이 꽤 큰걸!”
“너야 수확이 크겠지. 그런데 우린 아무 것도 없어?”
남궁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은근히 물었다.
“이번엔 우리도 꽤 고생했잖아!”
“없긴요! 당연히 있죠! 큰 선물이!”
기분이 아주 좋아진 천제현이 말했다.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세요. 다 들어 줄게요!”
그러자 남궁혜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심 선생님, 운요 언니, 채향아 뭐 바라는 거 없어요?”
그러나 한 번도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셋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풍채향이 호기 있게 말했다.
“악마를 물리치는 건 우리의 의무잖아요. 돌아가면 무안군께서 큰 상을 내리실 텐데 제일 큰 공을 세운 천제현에게 뭘 바래요?”
보아라. 그녀의 인품을.
인품과 교양, 미모를 모두 갖춘 풍씨 가문의 규수를.
남궁 가문의 누구랑은 달랐다.
하지만 천제현은 쩨쩨한 인간이 아닌지라 이대로 입 닦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호탕하게 말했다.
“세 분은 모두 제 가족 같은 사람이니 우리 회사의 간부들에게만 제공하는 성광불멸체를 드리죠.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성광불멸체라고?’
운요와 풍채향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웃는 모습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심빙우도 눈을 빛내며 흥분했다. 그녀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 천제현의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나, 지금 당장 수련할래!”
사실 심빙우는 무공 외에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광불멸체를 탐내고 있었지만 민망해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던 터였다.
기회라고 생각한 천제현은 심빙우의 희고 부드러운 손을 냉큼 잡으며 말했다.
“심 선생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으세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백주대낮에 이 미남을 보쌈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어요!”
그 말에 심빙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즉시 그의 소매를 놓으며 말했다.
“미안.”
“걱정 마세요. 돌아가면 한 부씩 필사해서 드릴 테니까요!”
운요와 풍채향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성광불멸체는 이미 중주에서 꽤 유명했다. 그건 아마도 중주, 아니 남하국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방어무공이리라.
남궁혜는 다시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럼 나는?”
“아가씨한테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곤란해진 천제현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아무 것도 줄 게 없으니 몸을 파는 수밖에요. 제 순결한 육체를 가져가세요!”
그 말에 평생 얼굴을 붉힌 적이 몇 번 없는 남궁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딴 거 누가 원한대?”
그러자 다시 천제현이 말했다.
“그럼 대열반경 입문을 도와줄게요. 어때요?”
“계약 체결!”
남궁혜와 천제현은 그렇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귀찮은 계집애 같으니라고!’
천제현 일행이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산기슭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200~300명의 질풍기병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상관비진이었다.
“네 이놈, 천제현! 네가 감히 탈영을 하다니!”
상관비진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먼저 들렸다.
운요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네! 눈이 삔 거야? 방금 천제현이 심연 악마를 죽였잖아!”
그 산골짜기 여기저기에는 녹색 화염이 널려 있었지만,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옥화염의 유해조차 천제현이 흡수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상관비진이 운요의 말을 믿을 리 없었다.
‘천제현 저놈이 악마를 죽였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상관비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감히 대열에서 이탈해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로 군기를 어지럽힌 죄, 용서할 수 없다!”
그 말에 화가 난 남궁혜가 외쳤다.
“이봐! 그쪽은 눈이 없나? 천제현이 심연 악마를 죽인 덕에 네가 지금 그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거라고. 어디서 헛소리야?”
“모두 들었느냐?”
상관비진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몇 명이서 그 괴물을 해치웠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는 고개를 돌려 기병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들은 탈영으로도 모자라 거짓말로 변명만 일삼고 있으니 용서할 수 없다! 저들을 잡아오너라! 군율에 따라 천제현 저놈을 벌해 본보기로 삼겠다!”
천제현 일행이 전장을 떠난 이유 따위야 상관비진이 알 바 아니었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남궁혜는 방계라고는 해도 남궁 가문의 일원이니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
신풍후의 딸인 풍채향 또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고. 운요의 가문 또한 중주의 세력가로 남하국 전역에서 명성이 자자하니 놓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천제현은 아니다.
천제현 때문에 그의 날개가 모두 꺾이지 않았는가. 상관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건 또 어떻고.
‘그런데 저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이상하군. 누구길래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
하지만 상관비진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뭔 상관이냐! 전부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다!’
상관비진이 기병들을 이끌고 공격을 개시하려 할 때였다.
휙!
눈꽃송이 하나가 그의 말 위에 떨어지자 그의 말이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후 산산조각이 났다. 온 바닥에 말의 피와 살점이 널려 있었다.
상관비진은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에 손쓸 틈도 없이 말에서 떨어졌다.
“감히…….”
저 검은 옷을 입은 여자에게 이런 실력이 있을 줄이야.
심빙우가 다시 두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자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눈송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살기가 주변을 뒤덮으며 대량 학살을 예고했다.
그녀는 진혼급의 실력자였다.
어떻게든 공격을 하거나 위협을 가하려던 기병들은 곧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 혼자의 힘으로도 그들 전부를 죽여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놀란 상관비진이 급히 말했다.
“천제현! 감히 왕국의 병사들을 살해하다니! 이것이 반역죄임을 모르는 것이냐!”
탈영병에 이어 이번에는 반역자.
하여튼 누명 하나는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천제현이었다.
***
심빙우는 과묵하고 신중하며 속세를 초월한 듯 신비로운 유형의 미인이었지만, 한 번 성질을 부리면 남궁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성격이므로 그녀가 한 번 손을 쓰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곤 했다.
천제현이 급히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
“멈추세요!”
죽고 싶어 발악하는 상관비진은 그렇다 쳐도 무고한 기병들까지 같이 순장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천제현에게도 원칙이라는 게 있었다. 여태까지 그가 죽여선 안 되는 사람을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넌 툭하면 나한테 시비를 거는데, 나도 이해가 되긴 해.”
천제현은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관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라고 너보다 잘나고 싶어서 잘난 것은 아니라고. 이렇게 잘생기고 능력 있으며 돈도 많고, 심지어 여인들까지 따르는 내가 질투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 내가 너였어도 나를 죽이고 싶었을 거야.”
남궁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놈의 왕자병은 나을 기미가 안 보이는군!’
상관비진이 어두운 얼굴로 쏘아 붙였다.
“진혼급 고수가 지켜준다고 무사할 줄 아나 보지? 상관 가문에 진혼급 고수는 널리고 널렸어! 네가 남하국에서 언제까지 맘 편히 살 수 있나 보자!”
남궁혜는 또 혀를 내둘렀다.
‘또 나왔군! 가문으로 위협하기! 이놈도 자랑할 게 가문밖에 없나 보지?’
“억울한가 봐? 좋아! 그럼 기회를 주겠다! 나와 일대일로 겨뤄 보자!”
천제현은 적당한 말을 고르며 말했다.
“모두에게 사방후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라고!”
혼성 3성 정점에 불과한 천제현이 감히 혼성 5성의 고수에게 도전하다니. 게다가 이 혼성 5성의 고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사방후의 아들이었다.
그의 말에 천제현의 일행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기병들까지 깜짝 놀랐다.
‘겨우 그 정도의 수준으로 상관비진에게 덤비겠다고?’
‘그게 가능한 얘긴가?’
실제로 그 둘의 실력 차이는 엄청났다.
남하국의 작위 세습에는 조건이 있었다. 작위 후계자는 30세 이상임과 동시에 진혼급의 실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관비진은 존귀한 사방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사방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무공을 수련한 덕에 25, 6세 때 이미 당년의 사방후를 뛰어넘었고, 작위 계승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천제현은 어떤가? 이름 모를 소도시 출신으로 몇 번의 기회를 얻어 크게 성장했다고는 하나 그가 어떻게 세자를 상대한단 말인가.
상관비진과 겨뤄 본 적이 있는 남궁혜는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혼성 4성의 불멸체로도 간신히 방어만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천제현이 강하다고는 하나 어쨌건 마력은 혼성 3성 정점에 불과했다. 방어력 또한 남궁혜에 뒤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정말 상관비진을 상대할 수 있을까?
상관비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미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저런 제안은 왜 하느냔 말이다. 어쨌거나 상관비진에게 이 제안은 매우 솔깃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다!”
“모두 물러나세요!”
천제현은 심빙우를 보며 말했다.
“아무도 끼어들어선 안 돼요. 알겠죠?”
천제현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네놈을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거대한 철필을 손에 쥔 상관비진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
“위룡과 무양 같은 애송이 몇 명 쓰러뜨렸다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주제를 모르는 놈에게는 매가 약이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천제현이 천천히 유명검을 가로로 들어 올리자 수정처럼 맑은 푸른색 화염이 검날에서 조금씩 뿜어져 나왔다.
“주제를 모르는 놈에게는 매가 약인 법이지!”
“웃음밖에 안 나오는구나! 나는 사방후의 후계자다. 출신도 불분명한 개뼈다귀 같은 놈이 감히 내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상관비진은 모욕감을 느끼며 거대한 붓을 휘둘렀다.
“죽여 주마! 풍살진(風殺眞)!”
철필이 흔들리며 무수히 많은 영묵(靈墨)이 빗방울처럼 천제현에게 날아갔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눈 깜빡할 새에 거대한 진형을 형성했다. 어느 샌가 바람의 힘이 되어 천제현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윽고 수십 개의 푸른 바람의 칼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격해 들어왔다.
하지만 유명검의 힘이 폭발하며 단번에 바람의 칼날을 녹여버렸다. 이내 천제현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검광이 허공을 난도질하며 상관비진을 향해 날아갔다.
‘대체 저게 무슨 힘이지? 이렇게 쉽게 영묵 진형을 파괴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