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제279장 심연의 화염
지옥 화염이 죽은 후 그가 지닌 상념과 힘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불씨만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대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옥 화염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한편, 악마의 심장은 심연 악마들의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심연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아남고 번식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약점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심연 악마들은 약점이 거의 없어 죽이기도 힘들었다.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베어도, 심지어 온몸을 토막 내도 죽지 않는 악마가 허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심연의 악마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생명력을 모아 생명의 핵을 만드는 능력이었다. 각 개체의 생명력, 영혼, 정신이 모두 그 핵 안에 존재하므로 핵만 무사하다면 손발이 잘려도 다시 돋아나고 머리를 베어도 죽지 않았다.
그 핵이 바로 악마의 심장이었다.
조롱박에 검은 돌들을 하나하나 담던 천제현은 네다섯 개로 부서진 악마의 심장 조각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옥 화염이 심연의 악마 중에서는 그리 강한 놈은 아니었지만, 이 심장은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 외에도 호박석처럼 생긴 주먹 크기의 녹색 수정을 하나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정이 아니라 고밀도로 압축된 화염이었다. 그게 바로 지옥 화염의 힘의 근원, 불씨였다.
심연의 불씨는 강력한 마력, 특히 농축된 심연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 성질이 천제현이 수련하는 유명염화검에 아주 잘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 불씨를 복용한다면 검결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으리라.
사실 신풍후로부터 뇌주의 상황을 들었을 때 천제현은 이미 심연 악마의 신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 불씨야말로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번 모험에 참가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만시고묘에서 얻은 유명염화검은 유명검에 기록된 불완전하고 엄청난 위력의 고대 검법이었다.
천제현은 수련을 통해 그 검법을 개선함으로써 기존의 검법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유명염화검은 성광불멸체와 비슷해서 재료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빠르게 수련할 수 있었지만, 괜찮은 수련 재료를 구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천제현이 이 기회를 포기할 리 없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번 모험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들 주변을 둘러 봐주세요.”
천제현이 유명검을 뽑으며 말했다.
“전 검에 이 불씨를 흡수시킬 거예요!”
지옥 화염이 죽었기 때문에 불씨도 빠르게 꺼져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천제현은 아예 이 자리에서 불씨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불씨를 땅에 내려놓고 얼음처럼 한기를 뿜는 검날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연 지옥의 화염이면 유명화에 뒤지지 않겠지. 어쩌면 너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네가 이것을 견딜 수 있나 보자꾸나.”
말을 마친 천제현은 검을 불씨에 꽂았다.
불씨에서 최후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로써 지옥 화염은 마지막 부활의 희망조차 사라진 셈이다. 이윽고 번개처럼 나타난 강력한 힘의 파동이 사방을 휩쓸었다.
불씨에서 흡수된 녹색 화염이 검날 위를 맴돌고 있었다.
천제현은 유명검의 흥분과 긴장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을 삼킴으로써 원래 힘의 절반가량을 회복하고 불멸 혼기의 위력을 회복하게 된 유명검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에 뒤지지 않는 그 힘에 긴장했다. 심연의 화염을 갈라놓지 못했다면 검이 먼저 부서졌으리라.
곧이어 검에서 청백색 화염이 솟구쳤다. 두 개의 화염이 얽히고설켜 격렬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힘 측면에서 본다면 심연의 화염도 결코 유명화에 뒤지지 않았다.
유명화가 의식이 있었기에 유명검의 기령(器靈)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심연의 화염 역시 의식이 있기에 강력한 심연의 악마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심연의 화염은 독립적인 존재이므로 스스로 수련을 거쳐 악마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했다. 즉, 심연의 화염이 가진 잠재력이 유명화보다도 강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심연의 화염은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고, 유명화는 반대였다. 그렇기에 유명화가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곧 심연의 화염이 조금씩 흡수되기 시작했다. 심연의 화염이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항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유명화는 심연의 화염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 기운의 영향을 받아 성질에 변화가 생겼고, 그 충격으로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강력한 힘이 천제현의 체내로 밀려들어왔다.
심연의 화염이 유명검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강력한 마력이 생성되어 천제현의 체내로 들어간 것이다. 천제현은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지금 그가 직면한 한계를 바로 돌파하게 해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천제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강력하고도 순수한 힘은 그를 혼성 4성의 경지로 이끌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력한 화염 악마의 힘을 흡수했는데, 그 작은 한계쯤이야.
거대한 마력이 체내에 쌓이면서 천제현은 마력의 한계를 넘어설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 황량한 황무지는 한계를 돌파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천제현은 비술을 사용해 마력을 체내에 봉인했다. 마력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당장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가 다시 검을 뽑자 검에 꽂혀 있던 불씨가 빛을 잃고 산산조각 났다. 이제 그 불씨는 평범한 돌멩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만년한빙처럼 차디찬 냉기를 뿜고 있는 유명검의 검신에 옅게 검은 기운이 맴도는 것이 보였다. 그로 인해 검 주변의 공기까지 조금씩 일렁거리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심연의 기운이구나!’
불씨를 흡수한 유명검은 과거의 강력했던 힘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등급 또한 변해 있었다.
천제현이 검을 뽑자 검날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그 화염은 여전히 파란색이었고 최상급 수정처럼 순수하고 맑았다.
그가 검으로 눈앞에 있는 바위를 겨누자, 이글거리는 파란색 검기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광!
거대한 바위가 깔끔하게 둘로 쪼개졌다.
바위의 절단면에는 푸른색 화염이 맴돌고 있었다. 그 화염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바위를 전부 뒤덮었고, 바위는 조금씩 재가 되어 날아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대단하다!’
귀왕 체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귀성(鬼性)을 갖게 된 유명화는 물질을 부식시키는 특성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연소 능력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성질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명화는 여전히 냉화, 즉 차가운 불로서 온도가 높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물질 연소 능력도 갖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상대에게 더욱 큰 물리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유명검이 각종 방어 무공에 최적화된 무기였다면, 지금의 유명검은 부식능력과 연소능력을 갖추고 한 번 접촉한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주는 궁극적인 공격 무기로 변해 있었다.
이제 성광불멸체를 수련한 남궁혜조차도 유명검의 공격을 막기 어려우리라.
게다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유명검의 기령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이다.
기령은 의식이 있는 존재다. 일반적으로 기령은 마수의 영혼을 제련하여 만들며, 기령을 통해 무기의 힘을 더욱 강화하거나 무기 자체의 방어력을 높일 수 있다.
유명검의 기령은 선천영화(先天靈火)로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거의 완벽한 원소생명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만, 완전한 생명체라면 무기에서 나오는 것도 가능할 텐데?’
여기까지 생각한 천제현의 머릿속에 오래전 수련한 소환비술이 떠올렸다.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천제현의 마력이 끊임없이 검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검날에서 수정처럼 푸르고 맑은 화염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범람하는 강처럼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거대한 화염이 한데 뭉치면서 조금씩 사람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화염 악마잖아!”
남궁혜를 비롯한 일행은 경악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푸른 화염이 뭉쳐서 만들어진 형태는 색깔만 빼면 지옥 화염이 소환한 악마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걸 본 새끼 여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저건 방금 내가 보여준 술법이잖아! 언제 배워서 따라하는 거냐고! 무시무시한 놈, 내가 저 주인 놈 때문에 살 수가 없다니까!
남궁혜도 깜짝 놀라 물었다.
“저 괴물을 어떻게 소환한 거야?”
“정확히 말하면 소환이라고 할 순 없죠.”
새끼 여우가 보여준 건 영혼만 있으면 육체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소환이었다.
그러나 천제현이 한 것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능력 같은 건 없었다.
심연유명화는 의식이 있으나 그것을 형체화 하는 능력이 없었기에 천제현이 원소 개조 비술까지 사용해 실체 형성을 도와 준 것이다. 그렇게 형체를 갖춘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화염 악마였다.
화염 악마의 몸은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거대하고 흉악한 악마의 온몸에는 푸른 불길이 이글거렸고, 머리에는 뿔이 하나 나 있었다. 또한, 몸 전체에서 짙은 악마의 기운을 뿜는 것이, 심연악마 그 자체였다.
그 화염 악마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제현의 앞으로 걸어갔다. 악마에게서 정신파동이 느껴졌다.
“주인님께서 저를 풀어 주셨군요!”
“말을 했어?”
“지금 쟤가 말을 한 거야?”
“말을 할 수 있다고?”
새끼 여우를 포함한 일행은 화들짝 놀랐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저 악마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물론 원소생명체는 인체 기관이 없기 때문에 입이 아닌 정신력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래!”
천제현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널 ‘유명’이라고 부르마!”
화염 악마 유명은 공손한 태도로 다시 말했다.
“네, 주인님!”
천제현이 검을 들며 외쳤다.
“돌아가!”
그러자 화염 악마의 몸이 흩어져 다시 유명검으로 들어갔다. 유명의 실력은 혼성 4~5성쯤 되어 보였다. 유명의 힘은 자체적인 능력 외에도 천제현의 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또한, 악마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반드시 천제현이 비술을 시전해야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번 모험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번 모험으로 유명염화검은 물론이고 천제현의 마력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뜻밖에 강력한 부하까지 하나 얻게 되다니 수확이 톡톡했다.
유명은 지능이 별로 높지 않아 어눌해 보였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다.
부하마저 새끼 여우처럼 영악했다면 천제현은 정말 울고 싶었을 것이다.
엄청난 성장 잠재력을 지닌 유명은 연구 가치도 무궁무진했다. 어쩌면 언젠가 완전히 유명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