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제278장 지옥 화염을 처치하다
천제현의 외침에 심빙우가 즉시 작은 깃발을 하나 뽑아 들고 분지로 달려갔다.
지옥 화염은 급히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그 위력과 속도는 이미 크게 떨어져 있었다.
심빙우는 가볍게 놈의 공격을 피한 뒤 한 바퀴 돌아 악마의 등 뒤로 가서 깃발을 꽂았다.
그러자 지옥 화염의 등에서 이글거리던 불길이 순식간에 반 정도로 약해졌다.
곧 깃발을 중심으로 하나 둘씩 핏자국이 생기더니 곧 놈의 등을 뒤덮기 시작했다. 핏자국에서 생겨난 엄청난 힘이 태산처럼 악마의 몸을 짓눌렀다.
쿠웅!
얼마 못 가 지옥 화염의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놈은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심빙우가 두 번째 깃발을 꺼내 꽂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지옥 화염의 머리통이 180도 회전하더니 입에서 녹색 화염 한 줄기를 내뿜었다. 그 화염은 화살처럼 심빙우를 덮쳤다.
깜짝 놀란 천제현이 외쳤다.
“조심해요!”
쿠르릉!
회색 안개와 함께 나타난 새끼 여우가 눈 깜빡할 새에 심빙우의 앞으로 달려가 덮쳐오는 화염을 그대로 마셔 버렸다.
새끼 여우의 작은 배가 순식간에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잘했어!”
천제현이 급히 소리쳤다.
“무릎을 공격하세요!”
이어 깃발 하나가 지옥 화염의 무릎에 꽂혔다.
그러자 또 한 번 핏자국이 생기며 거대한 힘이 놈의 오른쪽 무릎을 덮쳤다.
지옥 화염은 이미 일어날 힘조차 없는 것 같았다.
지옥 화염을 거의 제압했다는 생각에 일행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이번엔 어깨다!”
심빙우가 놈의 어깨에 깃발을 꽂자 다시 한 번 핏줄기 같은 에너지가 일렁거리며 놈의 어깨를 뒤덮고 힘을 빼앗아갔다.
그 하나하나의 깃발이 모두 진법이었다.
게다가 신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진법이기에 힘이 봉쇄되어 반격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보통 지옥 화염은 물론이고 만 년, 십만 년 묵은 지옥 화염이라도 신령의 앞에서는 개미처럼 미천한 존재에 불과하니까.
“거의 끝났어요! 힘을 내세요!”
천제현의 명령에 따라 깃발 몇 개가 다시 악마의 몸에 꽂혔다.
이제 지옥 화염의 온몸은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었고, 악마의 힘 또한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흑녹색의 빈 껍데기만 연기를 뿜고 있었으나, 그 연기는 녹색 화염으로 바뀌지 못하고 있었다.
“빙백장(氷魄掌)!”
심빙우가 다시 일장을 날렸다.
그러나 그 흑녹색 껍데기는 아직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천제현이 소리쳤다.
“그 껍데기는 웬만해선 부술 수 없으니 그냥 두세요. 지옥 화염의 체내에 있는 악마의 심장이야말로 놈의 생명줄 같은 거예요. 그걸 부숴야 해요!”
흑녹색 껍데기를 자세히 관찰한 심빙우는 악마의 몸 중앙에 인간의 심장처럼 생긴 것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게 몸 전체에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살려 다오!”
지옥 화염이 정신파동으로 말했다.
“네 너의 노예가 되마!”
남궁혜와 풍채향은 입을 쩍 벌렸다.
지옥 화염이 힘을 회복한다면 3군이 힘을 합해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그 힘을 인간을 위해 사용할 수만 있다면!
“나더러 악마를 믿으라고?”
천제현은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공격해요!”
수많은 눈꽃 정령으로 거대한 고드름을 만든 심빙우는 망설이지 않고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안 돼!”
지옥 화염이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곧이어 바위 같던 놈의 껍데기에 균열이 일어났다.
놈의 육체는 균형을 잃은 돌탑처럼 수많은 돌멩이로 변해 무너져 내렸다.
‘죽었구나!’
세 제후조차도 어쩌지 못한 괴물을 천제현이 죽인 것이다.
일행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심빙우조차도 마력이 소진되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죽은 거야?”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이기다니!”
“아버지께서 아시면 분명 날 자랑스러워 하실 거야!”
남궁혜와 풍채향, 운요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혼자 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들의 손으로 그 무시무시한 지옥 화염을 해치운 것이다.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이 있을까.
새끼 여우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말고 발톱을 핥으며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지옥 화염의 시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녀석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입에서 나무 인형을 한 개 토해낸 새끼 여우는 앞발로 그것을 받쳐 들고 지옥 화염의 시체로 다가가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악마의 시체에서 보랏빛 연기가 흘러 나왔다.
깜짝 놀란 남궁혜가 물었다.
“쟤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영혼 나무 인형이잖아?”
천제현은 새끼 여우가 들고 있는 물건을 알아봤다.
그 나무 인형은 육체를 대신해 영혼의 매개체가 될 수 있는 진귀한 물건이었다.
새끼 여우가 나무 인형으로 지옥 화염의 영혼을 흡수하자, 평범했던 인형이 작은 지옥 화염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새끼 여우는 인형에 가볍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지옥 화염의 영혼이 튕겨나갔다. 한동안 땅에서 반짝거리던 영혼은 순식간에 실체를 갖춰 축소판 지옥 화염의 모습으로 변했다.
소환된 지옥 화염은 대략 2장 정도의 크기로, 방금 죽은 놈의 삼분의 일쯤 되었다.
놈이 지니고 있는 힘도 원래의 지옥 화염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봤을 때 상당히 강해 보였다.
남하팔후 급의 인물들과도 어찌어찌 대결이 가능해 보일 정도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미니 지옥 화염은 사고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새끼 여우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풍채향, 남궁혜, 운요 세 명은 깜짝 놀랐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야!’
‘지옥 화염의 영혼으로 새로운 지옥 화염을 만들어 내다니!’
끽끽!
새끼 여우는 신이 난 듯 팔짝 팔짝 뛰면서 소리를 냈다.
지옥 화염은 다시 나무 인형이 되어 새끼 여우의 손으로 들어갔다. 새끼 여우는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하는 양 급히 그 나무 인형을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천제현은 여우의 턱을 만져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드디어 능력을 각성하는 건가?’
천제현이 물었다.
“시련탑에서 숨겨온 게 그 나무 인형이었어?”
새끼 여우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스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바보 같이 왜 진작 말을 안 했어?”
천제현은 새끼 여우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그걸 빼앗을까 봐?”
새끼 여우는 머리를 비비며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모르잖아!
사실 새끼 여우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고, 조금씩 능력들을 각성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영혼나무 인형을 가져간 온도 실험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잘 될 줄이야!
소환 능력을 갖게 되었으니 전투력도 급증하리라. 이제야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제 몫을 하게 된 것이다.
천제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영혼으로 생명체를 소환하는 술법이라. 요괴족의 술법 같은걸? 네 녀석한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 악마는 왜 다시 넣은 거야? 꺼내서 데리고 다니면 멋있잖아!”
새끼 여우는 안 된다는 몸짓을 했다.
여우의 술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영혼나무 인형은 최상품 영혼 저장 도구지만, 영혼을 빨아들일 때는 되도록 그 개체가 살아 있는 게 좋았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흡수한 영혼은 더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 화염은 이미 죽어 있었다. 바로 영혼나무 인형을 꺼내 영혼을 흡수했지만, 기껏해야 2개월가량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 번 소환할 때마다 마력도 급격히 고갈될 것이다. 마력이 모두 고갈되면 다시 사용할 수 없다.
방금 흡수한 지옥 화염의 경우 최대 4회 가량 소환이 가능했다. 게다가 방금 시험 삼아 한 번 소환했으니 앞으로 최대 3번의 기회만 남은 셈이었다.
또한, 지옥 화염을 소환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데에는 꽤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렇게 소진한 힘을 무엇으로 다시 보충한단 말인가.
그래서 새끼 여우는 어쩔 수 없이 아껴두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록 많은 시련 점수를 주고 영혼나무 인형을 바꾸었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새끼 여우는 충분히 이득 본 장사를 한 셈이다.
영혼 나무 인형을 갖고 있는 한 언제 어디서든 혼성 9성의 지옥 화염을 소환할 수 있었으니까.
“시련탑에서의 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마. 하지만!”
천제현이 새끼 여우를 째려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얄짤없어!”
새끼 여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 욕심 많은 여우가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없지!’
남궁혜가 바닥 가득 널린 돌멩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잔해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가져가야죠. 심연의 화염 속에서 천 년을 버티고도 흠집 하나 안 남은 최상의 재료들인데요.”
모두가 그의 말에 동의했다.
심빙우 같은 고수가 전력을 다한 일장에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로 미루어 봤을 때, 지옥 화염의 유해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껍데기는 공간의 한계를 넘고서도 부서지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심연에서 녹색 화염으로 달궈지고도 녹지 않은 물건이다.
그것만 봐도 그 내열성과 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돌멩이들은 그냥 덤에 불과해요.”
천제현이 알 듯 말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위험을 마다 않고 뇌주로 온 이유는 지옥 화염 때문이었어요.”
사실 심연에서 지옥 화염은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더 강력하고 무시무시하며 지위가 높은 악마들과 비교하면 흔하디 흔한 놈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심연 세계는 불가사의한 미지의 공간이었으므로 심연에서 온 생명체를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니 지옥 화염의 가치는 충분히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천제현은 놈을 통해 심연에서 온 재료들을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운 좋게도 심연의 화염과 지옥 화염 악마의 심장까지 얻을 수 있었다.
심연의 환경은 몹시 특이했다.
그곳은 혼돈의 세상으로, 만물의 근원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심연의 환경 속에서는 진귀한 보물들이 종종 만들어졌으며, 잉태와 출생의 과정 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생명체들도 있었다.
지옥 화염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런 생명체들은 일반적으로 번식 능력이 없고 원소족들처럼 분열도 불가능했다. 그저 심연의 기운이 어느 정도 모인 후 특수한 계기가 있으면 불씨로 변할 뿐이었다.
이런 불씨들은 강력한 심연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사고 능력이 생긴다. 그렇게 심연을 떠돌아다니다가 마력을 지닌 광물을 삼켜 점점 몸집을 키우고, 결국에는 심연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는 화염 운석으로 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