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제277장 교차하는 패배와 승리
사방후와 금전후는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신풍후가 홀로 백옥성으로 날아가자, 지옥 화염이 그를 끝까지 추격했다. 눈앞의 장애물은 상관하지 않았다. 불타는 몸으로 성벽을 부닥뜨리자, 백옥성의 견고한 동쪽 성벽이 쿵하고 무너졌다. 하지만 지옥 화염의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마력은 거의 다 소진되었다!’
신풍후도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지옥 화염은 이미 눈앞에 이르렀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갑자기 회색 연기가 자욱하게 나타나더니, 귀엽고 하얀 새끼 여우로 변했다.
새끼 여우는 지옥 화염의 얼굴로 뛰어들어서는 맹렬하게 지옥 화염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지옥 화염을 덮은 화염의 절반이 새끼 여우에게 단번에 빨려나갔다.
“천제현의 여우군!”
신풍후는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여우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힘이 빨려 나가자 지옥 화염은 새끼 여우에게 더욱 분노하기 시작했다.
펑!
지옥 화염의 입에서 녹색 화염이 분출되었다.
그러자 여우가 반짝하고 사라지더니 바로 지옥 화염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러고는 다시 지옥 화염의 몸에서 화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어어어어!
지옥 화염은 완전히 분노에 휩싸여서 신풍후를 포기하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여우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신풍후는 이 기회를 틈타 바람을 거슬러 빠른 속도로 후퇴했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제 한계일세. 이제는 자네 차례야!”
지옥 화염의 온몸에 타오르는 화염의 강도는 몇 배나 더 강해졌다.
여우는 땅에 발도 붙이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빠져나갔다.
지옥 화염은 머리가 좋은 건 아니지만, 여우가 자신을 유인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런 파리처럼 귀찮은 존재들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지옥 화염이 다시 냉정을 되찾고 신풍후를 쫒으려 했다. 그러나 새끼 여우는 여전히 지옥 화염 주위를 알짱거리며 화염을 흡수했다.
결국 지옥 화염은 불같이 화를 냈다.
강한 놈도 아닌데, 고작 에너지를 흡수하는 능력 하나로 지옥 화염의 화를 돋우고 있는 것이다.
새끼 여우가 엄청난 양의 화염을 흡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지옥 화염을 죽일 수도 없다.
오히려 빌어먹을 파리처럼 이리저리 성가시게 만든다는 게 문제였다.
‘좋아! 우선 네놈부터 죽이고 보자!’
지옥 화염은 신풍후 무리 세 명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고, 다시 새끼 여우를 잡기 위해 뛰어다녔다.
새끼 여우는 이렇게 지옥 화염을 끌고 다니며 산비탈 두 개를 넘더니, 작은 분지에서 멈췄다.
사실 새끼 여우도 계속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새끼 여우도 지쳤다.
지옥 화염 역시 새끼 여우가 약해진 것을 느꼈다.
‘이 성가신 놈, 이제 죽을 때가 되었군!’
지옥 화염이 발을 들어 새끼 여우를 밟아 죽이려고 할 때였다.
작은 산골짜기 사방에서 붉은 빛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네 개의 선홍빛이 골짜기 중앙으로 떨어졌다.
그 네 개는 각각 선홍빛의 빛줄기는 때마침 지옥 화염의 몸에 겹쳐서 투사되었다.
선홍빛의 빛줄기는 곧 밧줄이 되어 지옥 화염을 옭아매어 그 자리에 묶어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온몸 가득하던 화염은 마치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
지옥 화염의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움직일 때마다 무거운 돌을 몸에 단 것 같아 걷기조차 힘들어졌다.
‘이 빌어먹을 차원의 생명이!’
***
가슴을 졸이며 소식을 기다리던 뇌주성 사람들은 비보를 듣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참담하구나!”
“제후 셋이 모두 패하다니!”
“질풍기병단이 전멸했다고?”
“이제 뇌주는 끝이야. 악마들이 쳐들어올 거라고. 도망가자!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할 것 아니냐.”
“사방후와 금전후의 아들, 신풍후의 외동딸까지, 이번 전투에 참가한 3주의 고수들이 모두 연락 두절 상태래!”
간신히 살아남은 질풍기병 한 명이 돌아왔는데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며 살가죽이 떨어져 나가 고깃덩이 같은 형태였다.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의 참상이었다. 생환자의 처참한 몰골에 뇌주성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악마들이 곧 침공할 거래!”
“빨리 도망가야 돼!”
공포는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나가 뇌주성 전체가 공황에 빠졌다. 성 사람들은 너도나도 아이들을 업고 살림살이를 챙겨 피난길에 올랐다.
이 엄청난 피난 행렬은 뇌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렇게 모두 떠나 버리면 뇌주성은 죽은 성이 되고 말 것이다.
‘뇌주의 본성인 뇌주성이 그렇게 되도록 둘 순 없지!’
뇌주성 당국은 피난을 막기 위해 황급히 병사들을 파견했다.
파견된 병사들이 성문을 봉쇄하자 뇌주성 거리는 몰려드는 인파로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성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백성들의 공포는 더욱 커졌다. 공포는 조금씩 분노로 바뀌었고, 얼마 안 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폭동이 일어났다.
“이런 망할!”
“성을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왜 못 나가게 막는 건데!”
“요괴들의 손에 죽든 네놈들 손에 죽든 매한가지인데 분풀이나 하고 죽어야겠다!”
분노한 폭도들이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뇌주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거리와 집들이 불타올랐으며 병사들은 주민들에게 포위되었고, 그 과정에서 맞아 죽은 병사도 부지기수였다.
“엄마! 엄마!”
거리 한복판에서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 한 명이 가족을 잃어버렸는지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뇌주에 재난이 닥쳤구나! 재난이 닥쳤어!”
“누가 뇌주를 구할 것인가!”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는 뇌주성을 바라보던 한 노인은 하늘을 보며 한탄한 후,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공서련은 폭동 속에서 아이 몇 명을 구해냈으나, 그뿐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그 모든 걸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임목과 방한이 급히 다가오며 말했다.
“작은 아가씨,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도 빨리 철수해야 돼요.”
“안 돼요! 천제현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에요!”
공서련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희망이 있어요!”
두 남자는 다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천제현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제후 셋이 모두 당했다는 게 문제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뇌주의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을 때, 신풍후와 사방후, 금전후가 거지처럼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힌 채 돌아왔다. 제후나 귀족으로서의 위풍당당한 풍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멈춰라!”
크게 노한 사방후가 소리 쳤다.
“네놈들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감히 반란을 일으키다니! 국법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다!”
“됐소!”
금전후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내버려 두시구려. 나 금전후, 뇌주의 수호자로서 백성들을 지키지 못했으니 이 모두가 나의 불찰이오.”
금전후는 즉각 명을 내렸다.
“성문을 열어 백성들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해주거라!”
신풍후도 어두운 얼굴로 탄식했다.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은 금전후의 명령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 사람이 정말 과거의 그 위풍당당하던 백전백승의 금전후란 말인가?’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건 부상을 입은 채 부서진 갑옷과 투구를 걸친, 재 투성이의 초라한 늙은이였다.
‘제후조차도 이 지경이 되다니 어찌한단 말이냐! 어찌해!’
댕그랑! 댕그랑!
병사들의 손에서 하나 둘씩 무기가 땅에 떨어졌다. 곧이어 병사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피난 행렬에 동참했다.
대대손손 살아온 삶의 터전을 누군들 떠나고 싶겠는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난민 생활을 그 누가 원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세 제후는 엉망이 된 뇌주성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이런 무력감은 처음 느끼는 것이었기에.
“수많은 백성들이 혼란 속에서 갈 길을 잃었구려.”
사방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젠장!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 뇌주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거외다!”
신풍후는 말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그는 그 소년이 한 번 더 기적을 일으켜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뇌주는 남하국의 8주 중 하나다.
뇌주를 잃는다면 그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이 타격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번 재앙의 원흉이 지금 한 소년에 의해 작은 분지에서 제압당하고 있다는 것을.
***
지옥 화염은 줄곧 심연 속에서 살아왔다. 심연은 문명과 이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의 공간으로, 살육과 약탈만이 유일한 법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살아온 지옥 화염이 전략이고, 함정이고를 어찌 알겠는가.
천제현과 운요, 풍채향, 남궁혜는 각각 산골짜기 한 부분을 차지하고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윽고 깃발에서 형성된 거대한 진법이 지옥 화염의 몸에 달라붙었다. 희석한 신혈로 그린 진법은 그 자체의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미약하게나마 신력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지옥 화염은 천제현이 파놓은 함정에 의해 제압되었다.
지옥 화염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당장 벗어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크르릉!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 악마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자 천제현 일행이 들고 있는 깃발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꽉 잡아요! 놓치면 안 돼요!”
천제현은 이를 악물며 깃발을 움켜쥐었다. 다른 셋도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간신히 깃발을 고정시키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두 발이 흙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한편 세 제후와 싸우고 새끼 여우를 쫓으면서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지옥 화염은 진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지옥 화염이 고개를 번쩍 들며 울부짖자, 주변에서 떠돌던 녹색 화염들이 소환되어 분지를 향해 날아갔다.
녹색 화염에서 점차 형체를 갖추는 악마들은 현혼급에 달하는 전투력을 지니고 있어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신경 쓰지 마요!”
천제현이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이놈, 힘이 거의 다 떨어졌어요. 조금만 더 버티면 돼요!”
녹색 화염들이 형체를 갖추고 천제현 일행에게 거의 접근했을 때, 새끼 여우가 달려 나가 화염을 빨아들였다.
곧이어 눈꽃을 동반한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녹색 화염들이 눈발에 맞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난 지옥 화염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요!”
천제현이 외쳤다.
“심 선생님, 지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