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제215장 불합리한 승진
새끼 여우의 전투력은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가끔 한 번씩 침을 날려 공격하는 것 말고는 거의 쓸모가 없을 정도로.
하지만 감지 능력 하나는 엄청났다. 천제현조차 느끼지 못하는 파동과 힘을 즉각적으로 알아채곤 했으니까.
또한, 음기와 사악함에서 태어났는데도 마물들과는 상극이었기에 마공을 연마한 수련자들과 대결할 때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새끼 여우가 거인 노예 한 명의 크고 둥근 외눈을 찔렀다.
철광석을 짊어지고 있던 거인 노예는 예상치 못한 기습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고 그 통에 철광석이 제 발에 떨어졌다.
그놈은 고통과 놀람에 펄쩍 펄쩍 뛰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아 웃음을 자아냈다.
둘, 셋, 넷…….
새끼 여우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순식간에 거인 수십 명의 눈을 찔렀다. 거인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으허허헝!
거칠고 포악한 외눈의 거인들이 이 건방진 새끼 여우를 봐줄 리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들은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새끼 여우를 향해 다가왔다.
여우는 상황이 불리해진 걸 깨닫고 잽싸게 내빼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에 망치며 칼을 든 수백 명의 거구들이 떼를 지어 새끼 여우를 잡겠다고 살기등등하게 몰려들었다.
새끼 여우는 외눈 거인을 피해 달리면서 천제현을 보고 앞발을 휘저었다.
“거인들을 유인하고 있어!”
“빨리 가요!”
천제현이 잽싸게 탑으로 올라가 성진석을 잡았다.
‘괜찮은걸. 예닐곱 개나 되는 성진석을 이렇게 쉽게 손에 넣을 줄이야. 빨리 내려가자!’
이때 분노의 포효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일행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뭐지? 남은 놈이 있었나?”
그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탑 뒤쪽에서 차디찬 빛 두 줄기가 발사되었다.
제일 앞쪽에 있던 남궁혜와 천제현이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자 둘이 있던 자리에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이윽고 다른 거인 노예들과 좀 다르게 생긴 두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두 거인은 매우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몸집도 다른 놈들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손에는 무시무시한 유성추를 들고 있었다.
운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운이 엄청나요! 최소 현혼 경지는 되겠어요! 저보다도 조금 높아 보여요!”
크헝!
광기 어린 무공이라도 시전한 양 그 거인들의 피부가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거인들이 발을 구르자 땅이 움푹 파였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잔영만 남긴 채 사라졌다.
거대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너무 빨라! 도망갈 수 없겠어!”
운요의 뇌령주가 번쩍이자 일행의 주변에 전류가 맴돌며 방어막이 생겼다.
그 방어막에 닿은 거인이 순간적으로 전기에 감전되어 형체를 드러내었다. 천제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했다.
그때, 천제현에게 유성추가 날라오는 게 보였다.
붉은색 빛에 감싸여 불 붙은 폭탄 같이 보이는 유성추가 천제현의 몸에 떨어졌다.
콰광!
공기가 진동하며 천제현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유성추가 몸에 닿기도 전에 공기의 진동으로 몸이 날아간 것이다.
이 정도의 공격력은 혼성 4성의 호신 마력을 지닌 운요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비록 유명검이 힘의 일부를 흡수했지만, 대부분의 충격을 그대로 받은 천제현의 성광체에 무서운 속도로 균열이 생기더니 사라져 버렸다.
천제현은 그대로 십여 장을 날아가 내동댕이쳐졌다!
“괜찮은 거야?”
“아직 살아 있어요! 조심해요!”
천제현이 가슴팍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켰다.
“진동파로 공격을 하는 놈들이에요! 운요! 뇌령주로 저놈들이 3장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요! 1장 안에서는 그 어떤 근거리 공격도 허용해선 안 돼요! 한 방이라도 맞았다간 끝장이에요!”
그 외눈 거인들은 일행 중 누구라도 한 방에 죽일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천제현의 운이 좋았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일력을 맞고 탈락해 벌써 시련탑 밖으로 내팽개쳐졌으리라.
“날 도와 줘!”
운요는 일행 중 가장 전투력이 강했다.
저런 현혼급 괴물은 남궁혜조차 상대가 안 될 테니 그녀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남궁혜와 천제현은 혼성 3성을 상대할 수 있었다. 혼성 3성의 상대라면 아무리 강해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혼성 4성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혼성 4성과 혼성 3성은 한끝 차이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분뢰결!”
운요가 셀 수 없이 많은 보라색 번갯불을 소환했다.
그러자 또 다른 외눈이 거인 한 명이 유성추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운요가 높이 치켜 올린 뇌령주를 다른 손으로 내리치자 강력한 번개의 힘이 맴돌다 유성처럼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과광!
뇌령주와 유성추가 부딪히는 순간, 보라색 전류가 유성추의 쇠사슬을 통해 외눈이 거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공포스러운 번개의 힘을 맨몸으로 받은 거인은 순식간에 감전되어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
천부적 재능을 갖춘 데다가 운씨 가문의 집중적 교육으로 인해 동급에서 이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운요다.
그런 그녀가 뇌령주로 힘을 증폭시키기까지 했으니 상대를 일격에 날려 보낸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또 다른 외눈이 거인이 반격을 하려고 하자 임목과 방한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먼저 임목이 땅에서 나무뿌리를 소환해 그 거인을 칭칭 감았고 방한은 한파를 불러 그놈의 몸을 얼려 버렸다.
둘의 마력이 강하다고는 하나 잠깐 동안만 거인을 잡아둘 수 있을 뿐, 완벽하게 붙들어 두는 건 불가능했다.
남궁혜가 그 틈을 타서 발로 거인을 차서 흉갑을 부숴 버렸다.
거인이 공처럼 굴러가자 운요가 다시 잽싸게 뇌령주로 힘을 모은 후 그 거인을 향해 번개를 발사했다.
마침내 나머지 거인 한 명도 땅에 쓰러졌다.
두 거인 모두 중상을 입어 공격 불능 상태가 되었다.
외눈이 거인의 공격력은 무시무시했지만,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신묘한 힘이 있는 뇌령주와 유명검에 자전공자 운요의 파괴력까지 더해져 거인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죽여!”
나머지 일행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 강력한 괴물을 베어 버렸다.
천제현은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품에서 옥병을 꺼내 생명의 정수를 반쯤 마셨다. 그러자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시련자의 옥패에 따르면 이 괴물은 노예 감독이라는 놈이래요. 저 노예들의 두목인 셈이죠!”
“그래? 어쩐지 세더라니! 여차했으면 허리가 나갈 뻔했잖아!”
두 노예 감독의 시체가 사라진 자리에 돌돌 말린 종이 같은 게 나타났다.
“전리품이에요!”
전리품은 한 장의 지도였다.
“미궁의 지도다!”
일행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미궁의 지형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한 지도였다.
미궁은 매우 복잡해 통로만 100~200개나 됐고 그 사이사이에도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본 남궁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글자야? 하나도 모르겠네!”
“저한테 줘 보세요!”
천제현이 지도를 잠깐 살펴 본 후 말했다.
“고대 천족의 문자네요. 평소에 공부를 안 하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만약 다른 사람이 공부 어쩌니 하는 말을 했더라면 당장 코뼈가 부러졌으리라.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천제현이라 남궁혜는 짜증조차 내지 않고 물었다.
“천족이 뭔데?”
“아주 오래된 종족이에요. 그들이 대륙을 지배했을 때는 엘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요. 마수령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때 인간들은 아마 짐승도 살지 않는 황무지나 깊은 동굴 속에서 발가벗은 채로 장작불을 둘러싸고 우가우가 춤이나 추고 있었을 걸요.”
전설적인 존재인 천족은 혼돈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혼돈의 대륙이 파괴한 후에도 살아남은 그들은 혼돈의 문명을 일부 이어받았다고 전해지나 그중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은 이 시련탑이 천족과 관계가 있다는 거야?”
“글쎄요. 천족은 너무 까마득한 고대에 살았던 종족이거든요. 그 시대의 존재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몇이나 될까요? 이 시련탑은 젊은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걸로 봐서 처음부터 난이도가 높은 장소는 아니었을 거예요. 어쩌면 후세 사람들이 천족이 남긴 시련탑의 유적이나 불완전한 설계도를 보고 새로 복원한 것일 수도 있죠.”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남궁혜가 물었다.
“빨리 지도 좀 봐봐! 어디로 가야 안전하겠어? 시련탑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두세 시간 지났을 뿐인데 괴물들이 벌써 강해지기 시작했다고! 이대로 가다간 거인 노예들조차 상대할 수 없겠어!”
일리가 있었다.
천제현이 다시 한 번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을 때, 통로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저놈들을 다시 데리고 오는 거야? 우리 아직 여기에 있다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본 운소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망했어요. 이 대전은 원래가 막힌 장소였어요! 들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요!”
대전 안으로 들어온 새끼 여우는 몹시 다급해 보였다.
‘이상하군. 아까는 아주 여유로웠잖아. 갑자기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거야?’
영문을 몰라 다가간 일행 일곱 명의 얼굴이 삽시간에 파랗게 질렸다.
거인 노예가 진화해 있었다.
허리춤에 천 한 장을 두르고 있던 놈들이 지금은 전부 고급 가죽 갑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손에는 방패와 활까지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예부대의 모습이었다.
유성추, 검, 화살 등이 새끼 여우를 향해 쉴새없이 날아들었다.
새끼 여우가 말도 안 되게 빠르지 않았다면 진즉에 형체조차 남지 않았으리라.
운소는 넋이 나가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끝장이다!”
“거인 노예들이 전부 노예 감독으로 변한 거야!”
“몇 분 전만 해도 멍청한 노예들이었잖아! 새끼 여우 잡겠다고 한 바퀴 도는 새에 두목으로 변신했다고?”
“승진이 빨라도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아니, 그보다 두목이 있으면 부하도 있어야지! 이건 부하는 하나도 없고 전부 두목이잖아! 불합리하다고!”
그러나 시련탑 설계자의 이상한 진화론을 욕할 틈도 없었다.
400~500명의 노예들이 노예 감독으로 변해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달려들고 있지 않은가.
만약 한 놈 한 놈이 방금 해치운 그 두 명의 노예 감독만큼 강하다면 그들은 끝장이었다.
이 궁전에 출구라고는 딱 한 곳뿐.
아무 데도 도망칠 데가 없었다.
“잠깐만요!”
지도에서 현재 위치를 찾은 천제현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대전 뒤에 점선으로 표시된 통로가 있어요. 그런데 왜…… 실선이 아니고 점선일까요? 비밀통로를 의미하는 게 분명해요! 빨리 거길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