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164화 (161/729)

# 164

제164장 운문과 충돌(4)

운광암, 고호연, 이태 등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엄청난 충격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엘프는 인간보다도 긴 역사를 지닌 종족으로, 수백 개의 몹시 복잡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다.

때문에 작은 왕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을 통틀어도 고대 엘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방자하게 군다 했더니 저런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니!’

천제현이 방금 보여준 능력만으로도 천하의 기재라 일컫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건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재능이었으니까.

“왜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겁니까? 운문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소?”

천제현이 다시 강기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대답할 만한 질문을 하다니!”

사실 천제현의 이 말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먼 미래에 약신경은 제약을 배우려는 사람들의 필수 입문 코스였기 때문에 막힘없이 달달 외워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그 시대에는 모든 학자가 주요 엘프어 몇 개씩은 할 줄 알았다.

고호연과 이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운문의 명예가 실추된 건 둘째 치더라도 대학자 고천추의 제자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게 졌다는 소문이 돌면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둘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태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약신경을 어디에서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안하무인의 태도가 용서되는 건 아니지! 오늘 내가 네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

“이 사제는 고금에 통달하며, 특히 고대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했지. 스승님도 사제의 박학다식함을 칭찬해 주신 바 있다.”

고호연은 거만한 표정으로 천제현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부적 주문과 진법에 정통했다. 스승님의 후계자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학식을 갖췄다고 자신할 수 있어. 네게 다시 한 번 도전할 기회를 주마. 누구와 겨룰지, 어떻게 겨룰지 모두 네가 정하거라!”

‘저 두 사람이 직접 나서겠다고?’

운문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둘은 대학자 고천추의 촉망 받는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제현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말했다.

“귀찮네. 그냥 한꺼번에 덤비시지!”

“네놈이…….”

천제현이 말을 끊었다.

“일단 부진기(符陣棋) 판 열 개를 가져 오시오. 고서적들도 준비해 주고. 바둑을 두면서 학문을 겨루도록 합시다!”

부진기란 바둑 형식으로 두는 특수한 대국이었다.

부적 진법과 도안을 바둑판으로, 부적 주문을 말로 삼아 서로 대결하는데 지혜와 지략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부적 진법과 도안 실력까지 갖춰야 한다.

부진기는 진법과 도안을 바둑판으로 삼기 때문에 전통적인 바둑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진법과 도안, 부적 주문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무수한 경우의 수가 나오고 그로 인해 오묘하고 무궁무진한 변화가 생긴다.

통상적으로 부진기를 둘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랑스러워했으며, 부진기를 잘 둔다는 건 뛰어난 재능을 갖췄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데 천제현은 그런 부진기를 동시에 열 개씩 두겠다고 말한 것이다. 심지어 상대가 운문의 대사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부진기를 두면서 운문의 다른 도전까지 받아들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학식과 견문, 지식을 겨룰 때 사용하는 서적은 운문의 서적일 테니 불리해도 이만저만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꺼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건 자신감이었다.

굉장한 자신감!

또한 이것은 적나라한 멸시이기도 했다.

고호연도 약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했다.

“좋다! 그렇게 하자!”

운광암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건 해도 너무한 처사다. 운문이 이긴다 해도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지런히 승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열 개의 부진기 판이 준비되었다.

부진기 판은 몹시 특이했는데, 전부 거대한 마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는 삼각형, 오각형, 타원형, 육망성 모양 진법과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진법 위에 은은하게 흐르는 빛을 보아 그 모두가 효력을 발휘하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안에 적절한 부적 주문만 채워 넣는다면 즉각 마력진이 완성되리라.

부진기는 마력붓으로 주문을 그려 넣고, 그 부적주문을 말로 삼아 상대와 겨루는 게임이다.

그려 넣은 주문으로 상대의 주문을 파훼하거나, 제거하고 자신의 주문을 완성시켜 부진기 판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 조건이었다.

이때, 열 개의 진법과 도안은 서로 달랐다.

한편, 운문 사람들은 또 거대한 책장을 하나 들고 왔다. 책장에는 운문이 수집한 각종 고서적이며 문헌들이 꽂혀 있었는데, 대부분의 운문 사람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었다.

“이제 향이 반 개 정도 탈 시간이 남았군요!”

천제현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여러분을 괴롭힐 생각은 없습니다. 향이 반 개 타는 동안 열 개의 대국 중 하나라도 제가 진다면 제 패배로 인정하지요! 그리고 저 고서적 중에서 단 하나라도 제가 막히는 내용이 있다면 진 걸로 하겠습니다! 시작합시다!”

고호연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먼저 시작하시지.”

“그럼 사양 않고.”

마력붓을 손에 든 천제현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진법을 그리기 시작했다.

열 개의 복잡하고 오묘한 주문들이 각각 서로 다른 그림 위에 만들어졌다.

고호연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부진기의 판은 일반 바둑판과 달리 수많은 변화의 이치를 담고 있었다.

판에 손을 대는 순간 비단 그 형태와 내용이 바뀔 뿐 아니라, 속성과 법칙까지 변하므로 아무리 뛰어난 진법사라도 한 번에 두, 세 개의 대국만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낯선 부진기 판을 보면 먼저 그 진법을 꿰뚫어 보아야만 대국을 진행할 수 있으므로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천제현은 어떤가?

한 번 슥 훑어보더니 일필휘지로 붓을 휘둘렀다.

부진기의 규칙에 위배되는 진법은 자동으로 사라진다. 그러니 마음대로 붓을 놀려봤자 소용이 없다.

그런데 그가 그린 열 개의 주문은 진법 위에서 요요한 빛을 내며 마력을 순환시키고 있었다.

그건 곧 열 개의 주문 모두가 부진기의 판의 규칙에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의미였다.

더욱 엄청난 건, 그 열 개의 주문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부진기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상대의 주문을 꿰뚫어 보고 진법의 완성을 막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주문을 무슨 수로 꿰뚫어 본단 말인가?

천제현은 상대가 벌레 씹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예의 차리실 것 없소이다! 모두 함께 덤비시오. 머리를 모아서 나한테 이겨보란 말이오!”

“해도 너무하는군!”

“고 형, 우리가 도와주겠소!”

운문 사람들은 분기탱천하여 열 개의 부진기 판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태의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콧방귀를 뀐 그는 서가에서 고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이 뭐지?”

천제현은 씩씩거리는 강기의 목 뒤를 쳐서 그를 기절시키고 손을 뻗어 그 책을 받았다.

“용문이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대의 신용문이오. 한 사람의 전기를 담고 있는 책이지. 수정용왕 아미라스는 청동기 1331년에 태어나 청동기 3412년에 죽었소. 아무스 초원을 오백 년간 제패해 용족의 기반을 다졌지요. 이 밖에 용제 폐하의 축복을 받아 총 아홉 명의 자손을 뒀으며 그들은 각각…….”

용문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자다.

그래서 학식이 뛰어난 학자들도 몇 날 며칠을 연구해야 겨우 글자 하나, 심지어 문장 부호 하나를 해석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어려운 문자를 천제현은 소설책 읽듯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어 내고 있었다.

사실 이태가 꺼낸 고서는 이태조차 해석하지 못한 책이었다. 게다가 몹시 귀한 서적이었다.

비록 무공과 관련된 책도, 제약에 대한 책도 아니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족의 일생을 담은 이 책에는 그의 주 무대와 모험기, 심지어 사후에 묻힌 곳까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새로운 유적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책을 한 번 슥 훑어본 천제현은 책장을 덮으며 말했다.

“신용문 중에서도 하급 문자군. 하급 용족이 사용하던 문자란 말이오. 여기 나온 수정용왕도 고급 용족이 아닐 테니 시간 낭비하지 마시오!”

그가 손을 한 번 내젓자 고서가 다시 책장으로 돌아갔다.

이때, 가문 사람들과 한참을 의논하던 고호연이 열 개의 부진기 판 위에 부적 주문을 그려 넣었다.

그중에는 공격도 있었고 방어도 있었으며, 위장과 정탐도 있었다.

그러나 천제현은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진법 위에 다시 열 개의 주문을 그렸다. 주문이 아까 전에 그린 주문과 합쳐지며 빛을 발했으나, 그 형태는 각각 모두 달랐다.

고호연과 운문의 고수들은 모두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법이다!’

고호연은 몰래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저 애송이의 진법이 몹시 이상하오.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법들만 사용하다니. 이래선 진법을 파괴하기가 힘들 것 같소.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지. 밀어내는 것!”

‘그래! 밀어내자!’

‘진법을 파괴하는 방법도, 방어하는 방법도 모르겠다면 밀어내는 수밖에.’

먼저 요지를 차지하고 상대의 주문을 끊어 진법이 완성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이걸로 상대를 막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다.

‘자신만만하게 향 반 개가 탈 동안 승부를 내겠다고 한 건 저 애송이 아니었나? 그때까지 시간만 끌 수 있으면 된다.’

혼자서 열 개의 부진기를 두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기억력과 논리력을 필요로 하니까.

그 자리에 있는 부진기 고수들은 고호연을 포함하여 수십 명이 넘었다.

각종 꼼수로 상대에게 혼란을 주고 규칙을 어지럽히는 동시에 길을 막아 버리면 이기진 못해도 현상 유지는 가능했다.

‘이기진 못해도 현상 유지를 하겠다?’

천제현이 그들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천제현이 보기에는 그들이 두는 포석 하나하나가 모두 형편없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자신을 막으려 들다니.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따로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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