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제105장 선의를 베푸는 천제현
흑색강시 내단도 다 팔면 분명 이 여우는 단단히 삐질 것이다.
게다가 내단을 빼면 이 여우의 먹이로 뭘 줘야할지도 몰랐다.
사실 염귀형제를 만나러 오기 전에 여우에게 고기 한 덩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여우는 짧은 앞다리로 고기를 내동댕이치더니 ‘어디서 이런 걸 내밀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진짜 여우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천제현이 한숨을 쉬었다.
‘여우의 먹이때문에 파산할 지경이네!’
여우는 그래도 주인이 많이 남겨 놓았다는 생각에 간신히 수긍했다.
그러나 여전히 삐져 있는 상태라 천제현의 어깨에 앉아 털이 보송보송한 발로 길거리 불량배마냥 팔짱을 꼈다.
“암우개님, 이 영수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지금껏 이렇게 영리한 영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고묘에서 찾은 거겠지요.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혈통일 수도 있습니다!”
여우가 침을 탁 뱉고는 양발로 얼굴을 찡그러뜨렸다.
여우의 표정으로 보건데 ‘무슨 상고시대 혈통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하는 듯했다.
염귀 형제는 더욱 놀랐다.
이 여우는 여우가 아니라 사람 같았다.
천제현은 이 여우가 이제 막 태어난 걸 두 사람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했다.
“뭘요. 그저 별 볼 일 없는 여우일 뿐입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여기 강시 내단 50개입니다.”
천제현이 여우의 분노와 불만은 싹 무시한 채 물건을 건네고 마석을 받았다..
‘무려 하품마석 500개다!’
천제현은 무척 기뻤다.
‘정말 시원시원하군!’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여우 먹이만 아니면 강시 내단을 더 팔아 버릴 수 있는데!’
그럼 천제현은 정말 큰돈을 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뭐 그거야 어찌 되었든, 이번에 암시장에 와서 엄청난 수확을 한 건 확실했다.
대량의 마석, 혼영과 3개, 최고의 영약도 여러 개 얻었다.
게다가 유명검, 유명화, 어혼방울.
그리고…….
‘아직 무엇에 써먹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잘 먹는 망할 놈의 여우도 있었지!’
며칠이 지났다.
천제현은 이만큼 피해 다녔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야 할 때이기도 했다.
혼성 경지에 오를 시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천제현이 숙소로 돌아왔다.
두 침대 중 하나에 항호가 누워 있고, 다른 침대에는 자색 옷을 입은 절세미인이 누워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기절한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태는 어때요?”
“항호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자전공자의 상태는 좀 심상치 않아.”
채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강시왕이 전신의 혈관을 끊어 놓은 바람에 아마 오늘을 넘지 못할 수도 있어. 설사 정말 깨어난다고 해도 마력이 크게 떨어져 있을 거야. 게다가 후유증에 시달릴 거고!”
천제현이 운요의 팔목을 잡은 후 마력으로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치료 시간이 지체되면 운요는 폐인이 될 것이다.
‘됐어! 사람을 구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구해야지!’
천제현은 옥상자를 열고 단약을 꺼내 운요에게 먹였다.
채향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건 생생조화단 아니야? 이 단약은 우리 아버지도 귀중히 여기는 데! 이런 걸 함부로 줘도 돼?!”
‘진짜 이름 한 번 거창하다니까. 생생조화단이라니. 조제법도 평범한데.’
천제현은 크게 개의치 않고, 마력을 이용하여 운요의 내상을 치료했다.
모조리 다 끊어졌던 혈관이 하나씩 재생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력한 혈관이 재생되니 운요에게는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었다.
“콜록콜록…….”
운요가 기침을 몇 번 했다.
이내 운요의 기다란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떠 천제현을 보더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채향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거의 죽을 뻔 했어요. 암우개가 당신을 살리기 위해 생생조화단을 먹였어요!”
운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엇 때문에?’
천제현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나한테 빚을 많이 졌잖아. 죽어 버리면 어떻게 빚을 갚아?”
운요는 크게 수척해진 얼굴로 그를 사납게 흘겨보며 말했다.
“생생조화단이 귀하긴 하지. 하지만 우리 운씨 가문에서 갚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나중에 중주성 운씨 가문에 오면, 내가 두 배로 갚아줄게!”
천제현이 우습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중주성 4대 가문의 행실이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다들 탐욕스럽기만 하겠지! 빚을 갚아? 듣기는 좋네. 은혜를 원수로 갚지만 않아도 좋겠네!”
“닥쳐!”
천제현이 운씨 가문을 폄하하자 운요는 기분이 나빠졌다.
“우리 운씨 가문은 다른 3대 가문과는 달라. 장사도 안하고 정치도 안하고 군대와 관련도 없고 사병을 양성하지도 않지. 우리 할아버지 운천학은 중주성학당의 부원장님이셔!”
운천학은 중주학당의 부원장으로 명망이 높았고, 셀 수 없이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그 덕에 운씨 집안은 정치에 종사하지 않지만, 남하국 고위 관료 중 운씨 가문에서 배출된 사람이 꽤 많다.
장사도 지 않지만 남하국의 거상 중 다수가 운씨 일가에서 수학했다.
각계 권위자, 용병, 명문가 등 각계각층에 운씨 일가의 제자들이 진출해 있었다.
그렇기에 천가, 양가, 낙가 등 3대 가문과는 다르게 운씨 가문은 중주학당을 책임지면서 예절과 덕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막강한 인맥 자원과 평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운씨 가문이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학자 가문의 기풍이 제아무리 강직하다고 해도 한 가문의 영향력과 규모가 커지면, 명문가에서 나타나는 병폐를 피할 수 없다.
젊은이는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을 갖게 되고,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람들이 떠받들다 보니 가문만 믿고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다.
운씨 가문의 손녀인 운요도 사납고 고집스럽고 괴팍하니, 딱 봐도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었다.
운천학도 꽤나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제현은 운씨 가문에 대해 아는 바도, 관심도 없었다.
중주학당의 원장이 누구든 간에 이런 시대에, 이런 곳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녀석은 어떻게 운씨 가문에 대해 모를 수가 있지? 중주 사람 맞아?’
운요가 미심쩍은 눈으로 천제현을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제현은 강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삼매경이었다.
‘검은 옷으로 강시들을 꽁꽁 싸매면 모르겠지?’
강시는 이번 모험에서 가장 큰 수확이다.
강시 14구는 혼성 2성이고, 심지어 4구는 혼성 3성 수준이었다.
강시의 신체는 딱딱하여 창칼이 뚫지 못하고, 시독까지 뿜어낼 수 있다.
통증을 느끼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로지 충성을 다해 죽기 살기로 싸운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호위무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수백 만 인구의 천남성에 혼성술사는 겨우 20~30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다수는 혼성 1성이다.
그런데 천제현은 혼성술사 18명을 수하로 둔 셈이고, 게다가 다들 혼성 2성 또는 혼성 3성의 수준이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힘이 아니겠는가?
강시 18구는 전투력이 부족한 기적상회에 막강한 힘을 부여할 것이다.
물론 강시는 이 힘을 영구적으로 지닐 수 없었다.
이들은 강시협곡에서 음기를 흡입해야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강시협곡을 벗어나면 회복 속도도 굉장히 느려진다.
대도시처럼 양기가 강한 곳이라면 스스로 힘을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천제현은 강시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마력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음기가 강한 재료를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소소한 번거로움은 강시 18구가 지닌 가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적상회의 경제력은 18구의 강시들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안타깝군! 시간만 좀 더 있었다면, 몇 구를 더 가지고 갈 텐데.’
이런 강시가 100구 이상이 있다면 기적상회가 중주성으로 진출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감히 혼성술사 18명의 전력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천제현도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내 단념했다.
이번에 암시장에 와서 풍랑도 피한 데다 예상보다 10배가 넘는 수확도 거두었으니 말이다.
‘천남성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군. 큰아가씨와 작은 아가씨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이런 힘을 얻었으니 천제현은 두 자매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기적상회를 해코지하지 못할 것이다.
***
이튿날.
운요가 정원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그녀의 내상은 어느 정도 완화된 듯했다.
이때 천제현이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크고 건장한 사람 18명이 검은 옷을 걸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마치 먼 길을 떠나는 모습 같았다.
운요는 천제현을 보며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이봐! 중주성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우리 가문으로 같이 가야 내가 빚을 갚지.”
천제현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다.
갖가지 진귀한 보물을 지니고 있는 데다 흉악한 강시 18구를 부리고 있다.
운요는 천제현을 운씨 가문의 사람으로 만드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 이자를 끌어들이면 할아버지가 분명 기뻐하실 거야!’
하지만 운요의 생각과 다르게 천제현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중주성에는 갈 거야. 근데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운요가 서둘러 물었다.
“너 어디 사람이야? 어디서 살아? 어떻게 해야 널 만날 수 있어?”
“질문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두 번 구해줬다고 몸과 마음을 나에게 바치겠다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한참 줄서야 될 거야.”
천제현이 콧방귀를 끼며 거들먹거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충고하나 하겠는데. 너무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이미 몇 번이나 말했듯이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야.”
“그만 좀 해!”
운요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내상을 건드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이 빌어먹을 왕자병 같으니라고!’
부상만 아니었다면 그를 흠씬 두들겨 팼을 것이다.
“화내지 마. 내가 워낙 솔직해서.”
천제현이 재수 없게 웃었다.
그러다 돌연 진지한 어투로 화제를 돌렸다.
“마침 잘 됐네. 네 무공 좀 재미있던데. 다시 대련좀 해보자.”
운요가 경계하며 말했다.
“흥! 너 운가의 절학을 몰래 배우려는 거지?”
‘퉤! 절학은 무슨! 너네 가문의 무공은 내 눈에 눈곱만도 못하다고!’
천제현이 코웃음을 쳤다.
“오늘 내가 기분이 좋아서 몇 가지 가르쳐 드리려고 했는데. 뭐, 원하지 않으면 됐어. 다음에 다시 뵙지!”
천제현이 가려고 고개를 돌렸다.
“잠깐! 알았어. 한 번 해보자. 딱 한 번만이야!”
운요는 어째서 천제현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 평범한 소년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꼈다.
어쨌든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