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제102장 깨어난 강시왕(2)
여자 강시의 시커멓게 푹 패인 두 눈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 빛은 악마의 등불처럼 소름 끼치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다!’
그 짧은 몇 분 동안 강시의 검은색 머리칼에 흰색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빠르게 노화하고 있는 것처럼.
여우 얼굴을 한 강시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검은 입술이 가볍게 떨리더니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나를 깨운 것이 너희냐!”
지옥에서 울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너희는 너무 약하구나. 안 돼…… 안 돼!”
강시왕의 지능은 귀왕보다도 훨씬 높은 것 같았다.
살아남은 양씨 형제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도망가자!”
4형제는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때, 검은색 기운이 강시왕의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강시왕이 안개가 되어 순식간에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려냈다.
퍽!
강시왕의 일장에 머리 하나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퍽!
다시 강시왕이 주먹을 뻗자 이번에는 또 다른 한 명의 가슴팍이 산산조각 났다.
둘을 처리한 강시왕이 한 걸음을 옮겼다.
고작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신형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4형제, 아니 이제는 2형제가 된 둘 뒤에서 나타났다.
강시왕은 양손을 뻗어 팔딱거리는 두 개의 심장을 끄집어냈다.
퍼퍽!
심장 두 개가 단번에 터져나갔다.
강시왕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양곤!”
천제현은 유명검을 들며 외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협조해!”
강시왕은 너무 강했다.
악명이 자자한 중주오도 중 넷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다니.
아직 제대로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만약 강시왕이 실력을 제대로 보였다간 모두 죽고 말 것이다.
“알았다!”
양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곽 형, 굴 형, 일단 저것부터 없애고 저 애송이를 처리하든가 합시다!”
“이것들이…….”
강시왕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조롱하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개뼈다귀 같은 시체 나부랭이 주제에 허세는!”
양곤이 일갈하며 튀어 나갔다.
그의 두 손에 황금 팔 정령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그대로 강시왕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러나 강시왕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다시 안개로 변한 후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탓에 양곤의 일격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굴운과 곽승음도 양곤을 도와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가 강시왕을 잡고 있겠습니다.”
천제현은 염귀 형제에게 소리쳤다.
“어서 채향을 데리고 도망가요!”
장로가 죽은 마당에 두 사람이 남아 뭘 할 수 있겠는가?
가능한 빨리 채향을 데리고 후퇴하도록 해야 한다.
천제현은 운요와 눈빛을 교환하며 말했다.
“갑시다!”
여우 얼굴의 강시왕은 다섯 명에게 둘러싸였다.
표정이 없는 차가운 얼굴에는 두 개의 핏빛 눈동자만 괴기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소름 끼치는 눈빛은 칼날처럼 보는 사람의 육신을 뚫어 버리는 듯했다.
강시왕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면서 피부에도 주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약한 놈들은…… 모두 죽어야 해!”
그 순간, 강시왕의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에서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그 안개는 한 데 뭉치더니 10미터 크기의 해골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한 양곤이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강시왕한테도 정령이 있었다니!”
천제현은 그 해골을 보며 말했다.
“망령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정령을 잉태할 수 없어. 저건 음기가 응집되어 만들어진 거야. 정령과 유사해 보일 뿐이지!”
양곤이 다시 소리 쳤다.
“그래! 저게 정령이든 유령이든 뭔 상관이냐. 가자! 죽여 버리자!”
운요가 뇌령주를 높이 들자 태양처럼 눈부신 빛이 주위를 뒤덮었다.
이윽고 수많은 번개 줄기가 주문으로 바뀌었다.
파지직!
전류를 띠고 있는 주문이 복잡하게 얽히더니 사악한 것을 제압하는 힘이 되어 공간을 뒤덮었다.
그 주문은 강시왕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강시왕의 두 눈동자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쏟아지고, 목구멍에서 낮은 울부짖음이 들렸다.
한기를 담은 그 소리는 마치 태곳적 마수의 울음 같았다.
곧이어 안개 해골이 팔을 휘두르자 그 거대한 손이 몇 개의 물방울로 변했다.
그 물방울들은 포악한 힘을 담은 채 번개의 힘과 정면으로 부딪쳐 번개를 쓸어 버렸다.
귀왕조차도 뇌령주를 상대할 때는 전력을 다했건만.
이 여우 얼굴을 한 강시왕은 뇌령주의 힘을 장난하듯 갖고 놀았다.
사악한 것을 제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번개의 힘조차 강시왕 앞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건 그냥 강시왕이 아니야!’
굴운이 소리쳤다.
“뇌령주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군. 곽 형, 파살수를 써 보시오!”
200년간 수련한 파살수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파살수는 요사스러운 것들과 상극 아닌가.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도 파살수의 엄호 덕분에 강시요괴들의 포위를 뚫을 수 있었다.
‘천년강시조차도 파살수는 꺼렸으니 강시왕도 상대할 수 있겠지.’
파살수는 곽승음의 어깨 위에서 몸을 일으켜 먹물처럼 농밀한 먹구름을 뿜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순식간에 강시왕을 에워쌌다.
“흡수해버려!”
곽승음의 눈에 흥분의 빛이 번뜩였다.
저 사악한 강시왕은 못해도 만 년의 음기를 쌓았으리라.
그런 놈을 흡수하면 파살수를 몇 번은 진화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혼성 경지를 넘은 초고수급 영수가 만들어지리라.
파살수는 먹구름을 움직여 해골에게 보냈다.
끼기기긱!
그러나 그 먹구름은 환풍기에 빨려 들어가듯 해골에게 먹혀 버렸다.
파살수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은 채 땅에 떨어졌다.
“안 돼!”
눈이 시뻘개진 곽승음이 소리를 질렀다.
크아악!
그때, 해골이 갑자기 포효하며 폭발하듯 힘을 방출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다섯 명은 정신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곧이어 암홍색 폭풍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억만 개의 미세한 바람칼날로 구성된 폭풍이 다섯 명을 덮쳤다.
곽승음과 파살수는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폭풍에 휩싸여 온몸이 수천 조각으로 잘렸다.
그들의 피와 살이 폭풍을 만나 벽에 부딪히며 핓빛 폭풍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시체 조각은 제일 큰 것이 손톱 만할 정도로 갈가리 찢겨졌다.
폭풍은 곽승음을 휘감아버린 뒤 강시왕의 머리 위에 가서 뭉치기 시작했다.
강시왕이 두 손에 힘을 주자 폭풍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더니 주먹만 한 공으로 압축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제현이 황급히 유리체를 시전했다.
“조심해! 폭발한다!”
폭풍구가 폭발하자 수백 미터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운요는 급히 뇌령주를 가동해 번개로 거대한 방패를 만들었다.
양곤도 금색 팔 정령으로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강력한 방어 수단이 없는 굴운은 두 눈 시퍼렇게 뜬 채로 암홍색 폭풍에 먹히고 말았다.
“으아악!”
또 한 번 피와 살덩어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이번에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것이다.
여우 얼굴을 한 강시왕은 한 걸음 발을 옮겨 폭풍의 중심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번개 방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방패가 부서지면서 광포한 힘이 운요의 몸을 쓸어 버렸다.
운요는 줄 끊어진 연처럼 수십 미터를 날아가 대전 입구에 떨어졌다.
운요는 온몸의 뼈 수십 개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했고, 뇌령주는 빛을 잃었다.
“거령대력권!”
양곤이 금빛 주먹을 휘둘렀다.
쾅!
그러나 그 거대한 주먹은 너무나도 쉽게 가녀리고 창백한 손에 막혀 버렸다.
양곤은 즉시 팔을 빼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 돼!”
강시왕의 손이 금빛 팔 정령을 뚫고 그대로 양곤의 팔을 움켜쥐자 검은 안개가 그의 체내로 들어갔다.
“으아악!”
양곤이 처참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점차 검게 변하고 있었다.
강인하기 이를 데 없던 그의 육체가 순식간에 마른 장작처럼 앙상해졌다.
악귀가 눈을 번쩍이자 곧 양곤의 온몸이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운요와 양곤 같은 고수들이 이렇게 쉽게 패하다니.
‘이길 수가 없어! 너무나 강하다!’
고묘의 금제조차 강시왕의 힘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곽승음, 굴운, 운요, 양곤을 처리한 강시왕은 등불 같은 두 눈으로 천제현을 바라봤다.
강시왕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천제현을 훑어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저들과…… 다르구나!”
말하는 동안 강시왕의 머리칼이 반 이상 하얗게 세어 있었다.
강시왕은 차갑게 말했다.
“기회를 주마. 먼저 공격해라.”
양곤의 강한 육신도 저놈 손에서 농락당하다 산산조각 났다.
그런데 천제현이 무슨 수로 강시왕에게 접근해 공격한단 말인가?
그가 오른손에 낀 반지에 힘을 주자 검기가 뻗어 나갔다.
천제현은 시간을 끌려는 것뿐, 강시왕을 공격하겠단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잽싸게 갈가리 찢긴 양곤의 시체 옆으로 가서 어혼방울을 주웠다.
검기를 지켜보던 강시왕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기이한 힘이 나왔다.
그 힘은 검기의 방향을 돌려 천제현을 향하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환장하겠네!’
천제현도 나름 빠르다고 자부하지만, 강시왕 앞에서는 거북이나 다름없었다.
천제현은 신마의 검 정령을 소환한 후 유명검으로 눈부신 검광을 만들어 자신을 덮쳐오는 검기를 잘라 버렸다.
바로 그 순간.
강시왕이 다시 한 걸음 이동해 천제현의 앞에 나타났다.
강시왕은 오른손을 뻗어 천제현의 검날을 움켜쥐었다.
“이런!”
천제현은 검을 거두기는커녕,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막혀 유명검을 빼앗기고 말았다.
‘검을 빼앗기다니! 망했다!’
천제현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강시왕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기괴한 얼굴에 푹 파인 눈두덩에서 잔인한 빛이 번뜩였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험한 기운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아…… 이건!”
천제현의 정령을 본 강시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강시왕은 실망한 빛을 보이며 말했다.
“아니야. 성주께서 기다리던 사람이 너일 리 없다!”
갑자기 살기가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강시왕이 그를 죽이고자 할 경우, 천제현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방법이 없어. 도박이라도 해봐야겠군!’
천제현의 체내에서 공포스러운 위압감이 넘실거리는가 싶더니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자가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 그림자 정령을 본 강시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몇 걸음 물러났다.
“이건…….”
강시왕은 넋을 놓은 채 공격을 멈췄다.
이때, 강시왕의 머리칼이 완전히 하얗게 변했다.
강시왕은 등불 같은 눈을 크게 뜨고 흐릿한 그림자를 주시했다.
기괴한 얼굴에 놀람과 공포, 경이의 빛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너로구나! 너였어! 예언이…… 진짜였어!”
강시왕의 몸을 뒤덮고 있던 해골이 진동하며 낮게 으르렁거리더니 뿔뿔이 흩어졌다.
마치 그림자 정령의 위엄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이놈이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살고 보자!’
천제현은 재빠르게 강시왕에게서 물러났다.
‘이건 도망이 아니라 전략적 후퇴야! 이렇게 변태 같이 강한 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고묘의 금제조차 효과가 없는데 싸우기는 무슨!’
천제현은 그림자 정령의 힘을 이용해 번개처럼 수십 장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