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제97장 유명염화검
운요는 천제현 죽길 간절히 원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천제현에게 선의의 충고를 하다니.
‘얘 태도도 많이 변한 것 같네.’
운요가 말한 대로 유명검도 뇌령주처럼 영험한 혼기였다.
강력한 혼기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주인을 선택했다.
혼기를 뛰어넘는 강력한 힘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혼기를 복종시키거나 아니면 혼기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만약 유명검이 천제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천제현은 그것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운에 맡기는 수밖에!’
천제현이 유명검의 손잡이를 쥐자 유명검 안에 깃들여져 있던 고대의 의식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차가운 기운이 경맥을 통해 들어오더니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의 영혼까지 얼려 버릴 기세였다.
천제현은 이상한 공간으로 끌려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방에는 시체와 해골이 가득 쌓여 있었고 주위에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망령들이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요괴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얼굴은 흉악하고 추했으며 온몸은 청백색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대전의 가운데를 지키고 서서 주변의 망령들을 무자비하게 삼켰다.
“크아아!”
요괴가 천제현을 발견하고 괴성을 질러대며 거대한 손으로 천제현을 움켜잡으려 했다.
괴성이 울려 퍼지며 엄청난 기운이 천제현을 덮쳐왔다.
‘좋은 마검이군!’
천제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환상은 기령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정도의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 검이 매우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환술의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검! 내가 가져야겠군!’
천제현이 그림자 정령을 불러냈다.
요괴의 손이 그림자 정령과 부딪히자 처참한 비명을 지르면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유명검의 기령이 거대한 기운에 뒤덮이더니 오그라들었다.
그러고는 공포에 사로잡힌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기령의 기세가 점차 약해졌다.
천제현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다! 앞으로는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널 없애 버릴 것이야!”
그림자 정령이 한쪽 눈을 떴다.
그것이 어떤 눈인가?
그 눈과 마주치면 모든 정신이 붕괴된다!
기령이 저항을 포기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기령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비석이 하나 있었다.
그 위에는 고대문자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유명염화검(幽冥炎火劍)의 구결이었다.
천제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유명검은 매우 강한 무기일 뿐만 아니라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무공을 간직한 매개체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령의 인정을 받아야만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설사 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유명검을 제압한다고 해도 유명검의 무공을 전수받을 수 없게 된다.
유명염화검의 기원은 혼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무상검법에서 진화되어 온 것으로 초식이 괴이하여 예측할 수가 없었고, 사람을 죽여도 형태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유명화와 함께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유명염화검은 만무일의 음풍검결과 비슷한 검법이지만 음풍검결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다.
음풍검결은 순수한 암살검법이기에 검법 자체의 위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명염화검은 달랐다.
뛰어난 암살초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식 하나하나의 공격력도 중주성의 혼검결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가히 최고의 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명염화검을 익히기 위해선 유명화와 유명검이 모두 필요하다.
만약 유명염화검이 천제현의 독문검법이 된다면 그 누구도 유명염화검을 배울 수 없다.
천제현이 유명검과 유명검을 얻어 부족했던 공격력을 대폭 향상시키고 신마의 검 정령을 강화한다면 그 위력은 가히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돌아가면 그때 천천히 수련하자!’
천제현이 정신의 공간에서 나와 가볍게 유명검을 들어 올렸다.
“이 검에 괴상한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내 의식을 흐릴 정도는 아니야. 넌 나랑 같이 가자. 뇌령주를 그냥 준 게 아니거든. 네가 도와야 할 일이 하나 있어.”
천제현이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운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날 구해줬다고는 하지만 저 태도는 정말 화가 나는데!’
운요는 어쩔 수 없이 잠시 동안만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싸우려 해도 뇌령주의 힘이 유명검에 막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천제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저 변태가 사람을 짜증나게는 하지만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은 사실이니까.’
게다가 그가 뇌령주까지 주지 않았던가?
이제 그녀는 복수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좋아, 뇌령주를 봐서 부탁을 들어주지!”
둘은 각자 혼기를 지니고 요괴들을 처치하면서 전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둘은 고묘 3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묘실에 백여 개의 석관이 놓여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뚜껑이 열려 있었고, 주위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매우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아, 암우개!”
매우 온화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채향이 금사로 짠 옷을 입고 걸어왔다.
귀면노자와 염귀 형제는 관 위에 앉아 있었다.
‘어? 처음 보는 사람이 몇 명 있네.’
귀면노자 옆에는 다섯 명의 수련자가 있었다.
대부분 이리로 오는 과정에서 합류한 자들로 하나같이 실력자들이었다.
특이하게도 다섯 명 모두 장도를 사용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특히 눈에 띄었다.
금색의 비늘갑옷을 입고 검붉은 장도를 들고 있었다.
붉은 머리, 크고 건장한 체격에 온몸에서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기운이 풍겼다.
귀면노자가 천제현을 향해 소리쳤다.
“왜 이리 늦은 겐가? 죽은 줄 알았잖나!”
언짢은 듯 입을 뗀 귀면노자는 천제현의 옆에 있는 운요를 보고는 조금 불편해하며 말했다.
“자전공자? 그대가 여긴 어떻게!”
천제현은 귀면노자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앞에 있는 다섯 명의 검객을 훑어보며 물었다.
“이 사람들은?”
“우리와 힘을 합치기로 한 자들이네.”
귀면노자는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이자들이 바로 그 유명한 중주오도일세. 이쪽 붉은 머리 검객은 양전으로, 혈노도(血怒刀)에 정통하여 일당백의 실력을 자랑한다네.”
천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면노자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강시왕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조건이든 제시해서 이 다섯 인물을 끌어들인 거겠지.’
귀면노자는 다시 다섯 검객을 보며 말했다.
“이 친구는 우리 일행이라네. 이제 모두 모였으니 우리…….”
“하! 무슨 소리!”
붉은 머리의 검객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고작 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때문에 반나절이나 기다리게 한 거요? 그 시간 동안 보물을 찾았으면 얼마나 많이 찾았겠소!”
“옳소!”
“빌어먹을!”
“난 또 그 일행이 자전공자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일 줄이야!”
검객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하나둘씩 일어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귀면노자도 입장이 조금 곤란해졌다.
“자네 대체 왜 이렇게 늦은 건가?”
천제현도 딱히 숨길 생각은 없는 지라 솔직하게 말했다.
“유명전에 갔다 왔습니다!”
“둘이서 유명전을 통과했다고?”
귀면노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용케도 살아 돌아왔군그래.”
“이걸 보라고!”
운요는 자랑하듯 뇌령주를 내밀며 말했다.
“살아 돌아오기만 했겠어?”
뇌령주를 본 귀면노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이어 천제현이 들고 있는 유명검을 알아보고 숨이 가빠졌다.
“그 검, 팔 생각 없나? 얼마든 부르기만 하게! 원하는 대로 주겠네!”
천제현이 가볍게 유명검을 휘두르자 허공에 검의 잔상이 남았다.
“써보니까 제 손에 딱 맞더라고요. 팔 생각은 없습니다!”
양전도 유명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운도 기똥차게 좋은 놈이군. 유명전에서 그 검을 가져오다니.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게 한 대가는 치러줘야겠다!”
또 다른 검객도 말했다.
“대가로 그 검을 내놓으면 되겠군!”
양전은 귀면노자를 흘끗 본 후에 말했다.
“그렇게 저 검이 갖고 싶으시다면 우리 형제가 갖다 드릴 수도 있소. 저 애송이 하나 없어진다고 해서 강시왕 사냥에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않겠소!”
귀면노자도 그 말에 조금 마음이 동했다.
유명검은 그 정도로 귀하디귀한 혼기다.
사실 중주오도는 강도와 다를 게 없는 자들로, 살인과 약탈을 밥 먹듯이 하고 살아가는 인물들이었다.
채향은 화가 나서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 계집아, 넌 방해하지 말고 한쪽으로 꺼져!”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
다섯 검객은 굶주린 이리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탐욕스럽게 유명검을 바라봤다.
“억지로 팔게 하려다가 안 되겠으니까 이제 힘으로 빼앗겠다고?”
옆에 있던 운요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게 너희 대주국 사람들의 일 처리 방식인가 보지?”
‘자전공자가 저 애송이 편을 들다니?’
‘저놈 편에 서겠다 이건가?’
귀면노자와 염귀 형제, 그리고 다섯 검객은 순간 껄끄러움을 느꼈다.
저 애송이놈 혼자라면 얼마든지 죽이고 검을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저놈이 보기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일행으로 삼는 것보다 검을 빼앗는 게 더 이득이니까.
하지만 운요가 천제현을 돕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뇌령주까지 갖고 있어 상대하기가 몹시 힘든 건 둘째 치고, 설령 제거한다 할지라도 강시왕과 싸울 때 전투력이 두 명 분이나 줄어든다는 얘기니까.
“만무일도 얘 손에 죽었어. 너희 다섯의 검이 음풍검보다 빠를 것 같진 않은데?”
운요는 차갑게 말했다.
“얘가 유명검을 쓰지 않고 싸워도 너네 그 쓰레기 같은 실력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고!”
‘뭐라고?’
‘저 애송이가 음풍검객을 죽였다고?’
비록 고묘의 금제로 마력이 봉인되었다고는 하나 음풍검객은 음풍검법에 통달한 자였다.
‘그런 인물이 저런 꼬마에게?’
귀면노자가 직접 만무일을 상대한다 해도 승산은 오 할 정도였고, 중주오도는 한꺼번에 덤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하하하하, 이 늙은이는 장사치네. 거래가 불발되었어도 사람은 잃지 말아야지. 억지로 물건을 빼앗는 일은 없을 걸세.”
말을 마친 귀면노자는 중주오도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언행을 주의하시게. 앞으로 한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했다간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네!”
양전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입은 다물었다.
그의 표정으로 보건데, 천제현이 음풍검객을 죽였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놈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