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제95장 귀왕의 등장(2)
운요는 천제현보다 빨랐다.
그녀의 몸에서 전류가 감돌더니 신영이 사라지며 몇 장 뒤에서 나타났다.
운요가 뇌령주를 발동시켰다.
쾅!
전류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이무기로 변했다.
그리고는 수많은 번개 줄기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앞다투어 귀왕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귀왕은 흉악한 웃음을 짓더니 청백색의 화염을 쏟아내어 번개 줄기를 막아냈다.
괴이한 청백색 화염은 순식간에 번개 줄기들을 뒤덮었고, 무시무시한 이무기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저건 유명귀화! 저놈이 유명귀화를 발동시켰어!”
묵연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끝났어. 저놈에게 유명귀화가 있는 이상 어떤 공격도 먹히지가 않아. 귀왕을 이길 방법은 없어!”
천제현도 귀왕의 진면목을 똑똑히 보았다.
귀왕의 전신은 백지처럼 창백했고 붉은색 장포를 걸치고 허공에 떠 있었다.
열 손가락은 피에 물든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천제현이 다급히 소리쳤다.
“귀왕은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힘을 다 회복하지 못했을 거야. 게다가 뇌령주가 저놈의 힘을 많이 소비시켰어! 계속 공격해!”
운요가 뇌령주의 힘을 소환하자 거대하고 광폭한 번개의 힘이 운요의 몸에 몰려들었다.
수십 개의 번개 줄기가 마치 수십 마리의 독사처럼 동시에 귀왕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귀왕이 한 손을 들자 청백색 불꽃이 뿜어져 나와 화염의 장벽을 만들어 운요의 공격을 막아냈다.
막상막하!
이때 묵연이 두 손에 검은 불꽃을 쥔 채 슬며시 귀왕의 뒤로 다가가 기습공격을 했다.
귀왕은 뒤로 돌면서 묵연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 손으로는 뇌령주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막아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묵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셋은 순식간에 대치국면에 빠졌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탓인지 귀왕의 형체가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귀왕이 하늘을 쳐다보며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철퇴에 맞은 듯 운요와 묵연은 몸을 크게 한 번 떨리더니 선혈을 토했다.
귀왕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치려 했다.
유명귀화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묵연과 운요가 놀라 소리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천제현이 번개처럼 튀어나와 귀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대의 기운이 천제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천제현의 등 뒤에서 마력이 용솟음치며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 형상이 만들어졌다.
‘저건 뭐지?’
운요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천제현의 정령이란 말인가?
그의 정령은 검이 아니었던가?
거대한 그림자를 본 귀왕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것은 이성으로 느끼는 공포가 아닌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무의식적인 진정한 공포였다.
“이제 그만 죽어라!”
그림자 정령이 하나의 거대한 힘이 되어 천제현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승부의 순간이다!’
천제현의 주먹에서 수많은 부적 주문들이 뻗어 나왔다.
태곳적부터 전해져온 심오한 오의가 그의 주먹에 응집되었다.
펑!
천제현의 주먹이 귀왕에게 적중되었다.
-크아아아악!
귀왕이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그의 몸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수백 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묵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먹으로…… 어떻게 영체를 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완전히 상식을 뒤집는 일이다.
그런데 천제현이 그걸 해낸 것이다.
주먹 한 방으로 귀왕을 박살 낸 것이다.
겉보기에는 매우 평범한 소년이.
운요는 천제현을 보며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저 변태는 뭐하는 놈이야?!’
고묘 안이 아니었다면 귀왕은 혼성술사들이라도 쉽게 처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고묘 안에서 봉인된 상태이긴 했지만 쉽게 이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천제현은 주먹 한 방으로 귀왕을 쳐부쉈다.
운요의 흥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특이한 신체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다고 들었다.
이런 자는 정령을 두 개나 각성시킬 수 있는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라고 했다.
물론 정령을 두 개 갖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람의 영혼은 잠재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정령을 강하게 키우는 것도 매우 힘들다.
하물며 두 개의 정령이면 오죽하겠는가.
정령은 수련자의 타고난 자질에 영향을 받는다.
많은 것보다는 강한 것이 좋고, 순수할수록 좋다.
일반적으로 강대한 정령이 분리되면 두 개의 평범한 정령이 된다.
이 어찌 손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천제현의 두 개의 정령은 모두 초월적인 최고급 정령이었다.
특히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그림자 정령은 그야말로 최강의 정령으로 보였다.
마력이 봉인되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는 신급에 달하는 정령이었다.
모두가 경악의 시선으로 천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천제현의 상태는 결코 좋지 않았다.
주(主)정령을 사용하면 신체에 매우 큰 무리가 온다.
지금 천제현의 몸은 매우 약해져 있는 상태다.
그는 황급히 천년정원초를 모두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정말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만약 운요가 뇌령주를 사용하여 귀왕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면.
묵연이 기습공격으로 귀왕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못했다면.
천제현이 심안을 열어 귀왕 몸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렇게 쉽게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귀왕은 거대한 귀주만을 남겨놓고 소멸되었다.
귀주의 표면에 청백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불씨?”
묵연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은 연성된 유명화였는데, 불씨만 남아 있군. 불씨는 키우기가 매우 어려운 데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유명화의 영화(靈火)를 사용하면 순간적으로 보유자의 힘을 증가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불씨는 오랜 시간을 들여 키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재료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의 무공을 연마하는 것과도 비슷할 정도였다.
고묘에 이제 완전한 유명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영화의 불씨만 남았을 뿐이다.
잠재력만 놓고 봤을 때, 귀왕이 천 년 동안 연성시킨 유명화의 불씨는 보통 유명화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 불씨는 보통의 유명화가 아닐뿐더러 귀왕의 귀력이 담겨 있는 유명화다.
만약 이 불씨를 잘 키운다면 틀림없이 보통 유명화보다 더욱 강력할 것이다.
하지만 불씨를 키우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밑 빠진 독처럼 엄청나게 많은 자원을 소모해 버린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묵연은 조심스럽게 불씨를 챙겼다.
운요는 뇌령화를 들고 한 쪽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그녀의 수중에는 뇌령화가 있다.
전투력이 몇 배나 향상되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면 천제현을 가볍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묵연도 위협적이지 않아! 지금 당장 복수를 해야 할까?’
천제현은 바보가 아니다.
그가 운요에게 뇌령주를 던진 것은 위기를 넘기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지금 귀왕도 사라지고 없으니 이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운요였다.
묵연은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속으로 걱정했다.
‘큰일이군! 만약 자전공자가 지금 손을 쓴다면 저 꼬마와 힘을 합쳐도 막기는 힘들 거야!’
묵연이 천제현을 바라봤다.
둘의 눈이 교차되자마자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만약 자전공자가 둘 중 어느 하나를 공격하기만 한다면 둘은 힘을 합쳐 그녀와 싸울 것이다.
셋은 서로 조금의 거리를 두고 상대를 경계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 것이다.
이때, 묵연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사방을 훑어봤다.
“이상하군. 만무일이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거지?”
확실히 어느 순간부터 만무일이 보이지 않았다.
만무일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대전 안에 어디에도 만무일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분명 음풍둔을 시전하여 자신의 몸을 숨겼을 것이다.
“조심해!”
천제현이 뭔가를 발견하고 운요를 쳐다봤다.
“네 뒤에!”
운요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줄곧 모든 신경을 천제현과 묵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 둘이서 협공하여 자신의 뇌령주를 빼앗을까 두려워 등 뒤의 기습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못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기운이 폭발하면서 가공할 만한 살기가 밀려왔다.
운요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슉!
강렬한 검기가 그녀의 등 뒤로부터 가슴을 뚫고 나왔다.
뚫린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운요의 아름다운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몸에서 힘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쓰러졌다.
“하하하! 내 것이야! 모두 다 내 것이란 말이다!”
만무일이 천을 끄집어내어 신속하게 뇌명주를 싸서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탐욕이 가득 찬 얼굴로 천제현과 묵연을 바라봤다.
묵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전공자는 중주성 운씨 가문의 사람인데. 그를 죽이다니, 운천학의 복수가 두렵지 않단 말이냐?”
“누가 감히 운천학을 두려워하지 않겠소? 하지만 여기엔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묵연이 질겁하여 눈을 크게 떴다.
“너…….”
“문답무용!”
만무일이 음풍둔을 시전하자 다시 그의 몸이 사라졌다.
묵연은 크게 놀랐다.
음풍검객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음풍검결의 은둔술은 남하국 최고의 암살검법이었다.
만무일은 지난 20여 년간 음풍검결을 연마하면서 음풍검결 대성에 이르렀다.
묵연이 몸 상태가 정상적이었어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 그는 마력을 크게 소모한데다 귀왕에게 중상을 입었다.
그런 그가 어찌 음풍검객에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대와 나는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날 죽여 입을 막으려는 것이냐!”
묵연이 분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의 두 손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는 주위에 검은 화염장벽을 쳤다.
그러나 검광이 화염장벽의 틈을 쉽사르 뚫고 들어왔다.
묵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돌았다.
퍽!
묵연의 머리가 땅 위로 떨어졌다.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머리가 없는 낯익은 시체였다.
운요가 쓰러진 자리는 이미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묵연의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그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